글: 송석남(宋石男)
유언비어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진시황은 재위기간동안 시종일관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호이다)"같은 류의 유언비어에 시달리다가 그가 만든 제국은 아들대에서 망하고 만다. 도화선이 된 것은 마찬가지로 유언비어 한마디였다: "대초흥, 진승왕(大楚興, 陳勝王)". 고대로마의 황제도 유언비어로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러다보니 공공유언비어감찰을 임명해서, 매일 군중들 틈으로 가서 얘기하는 와중에 유언비어를 찾아내어, 민중의 정서를 파악하려 했다. 만일 필요하다면, 유언비어감찰관은 자신이 만들어낸 유언비어로 반격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64년, 로마는 대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런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폭군 네로는 화재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슬퍼한 것이 아니라, 화재를 찬미했다. 화염이 불사르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자기방어를 위하여 네로는 신속히 새로운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퍼트린다. 그보다 더욱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도시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그리하여, 민중은 희생양이 된 기독교도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처음에 화재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네로였다는 것은 잊어버렸다.
수천년동안, 역사에서 유언비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에는 교통, 통신, 미디어, 인구등의 제한으로, 유언비어의 전파속도나 규모는 모두 근대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1768년, 요술(妖術)에 관한 유언비어로 전국이 대공황에 빠지고 수천만명이 영향을 입는다. 공비력(孔飛力)은 그의 명저 <<규혼 - 1768년 중국요술대공황>>이라는 책에서 날카롭게 분석하고 서술했다. 건륭제는 '규혼안(叫魂案)"을 잔혹하게 조사하여, 사람의 목을 하나하나 잘라버린다. 그리하여 다시는 자라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건륭제가 두려워한 것은 유언비어 자체가 아니었다. 유언비어가 불러오는 사회집단심리의 변화와 행위의 변이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언비어사건을 통하여 심도있게 관찰할 수 있었다. 건륭제는 자신이 이미 통상적인 분야에서 관리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의 여러 경우는 이 이민족정권의 합법성과 안정성에 위협이 되었으므로, 통치자들은 반드시 중대하게 대처해야 했다.
건륭제시대는 청나라으 마지막 태평성대였다. 가경제, 도광제이후에는 난세가 닥친다. 대규모의 유언비어가 샘솟듯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태평천국과 청나라군대의 전투중에, 쌍방은 서로 유언비어를 비정규무기로 삼아서 뿌린다. 홍수전은 이런 유언비어를 퍼트린 적이 있다: "내가 만주족의 시말을 자세히 조사해본 적이 있는데, 그 조상은 하얀 여우(白狐) 한마리, 붉은 개(赤狗) 한 마리가 교합하여 나온 것이다. 요인(妖人)을 낳았으며 종류가 많아지면서 스스로 교합하였으나, 인륜에 동화되지는 못했다." "전 위요(僞妖) 강희제는 암암리에 만주족 1명에게 10집을 관리하게 하여, 중국의 여자와 음란한 짓을 벌였다. 이는 중국인을 모조리 오랑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청나라군대도 즉시 유언비어를 만들어 반격전을 벌였다: "(태평군)이 지나간 곳은 선박은 크기를 불문하고, 사람은 빈부를 불문하고, 모조리 빼앗아가고 풀한포기 남겨두지 않는다." "천부는 천형을 죽이니, 강산을 얻을 수 없다. 장모(長毛, 태평군)는 바른 주인(正主)이 아니다.여전히 함풍(함풍제)에게 양보해야 한다." 우리는 증국번이 승리한 것을 유언비어를 만드는 기술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효과적으로 상대방의 유언비어에 대응하여, 상대방이 퍼트린 유언비어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퍼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승리는 더욱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유언비어의 선동력은 아주 크다. 1891년, 거의 모든 서방의 중국선교사들은 절망을 느꼈다. 그들은 홍수같은 유언비어에 포위된 것이다. 유언비어에서 그들이 부녀자를 강간하고, 아동을 납치하며, 장기를 매매하고, 우물에 독을 타며, 중국인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각종 나쁜 짓을 모두 한다고 하였다. 원한은 유언비어 속에서 성장하고, 결국은 분노한 민중이 장강연안의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를 습격하고, 선교사와 교인을 약탈하고 죽였다. 역사에서 "장강교안(長江敎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의화단의 난 이전에 가장 심각했던 반기독교사건이었다. 교안에서의 유언비어는 유래가 길었다. 그저 1891년에 서적, 신문, 전단등의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전파되었을 뿐이다. 일찌기 청나라초기에, 고염무는 <<천하군국이병서>>에서 천주교회가 어린아이를 삶아먹는다고 적었다. 천주교회가 눈알을 파낸다는 것은 옹정제때으 오덕지의 <<천주교서사>>의 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광22년 위원이 쓴 <<해국도지>>에서도 "서양시장에서는 중국의 흑연 100근을 은 8냥과 바꾼다...은을 만들려면 반드시 중국인의 눈을 써야 한다. 서양인의 눈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런 괴담이었다.
유언비어 자체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역사를 변화시키는 핵심요소가 될 수는 있다. 장립범(章立凡)이 한 말이 정확하다: "사회운동은 어떤 때에는 진상이 필요하지 않다. 유언비어 하나가 폭동을 일으킬 수 있고, 역사를 변경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심으로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진상은 아니다. 그저 큰 변화일 뿐이다."
1911년 10월 9일 오후 3시, 혁명당인은 한구에서 실수로 폭약을 터뜨린다. 개략 같은 시간에 "청나라정부가 혁명당인을 붙잡아 죽이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마침 신군(新軍)내에서 떠돌았다. 10월 10일이 되어, 이 유언비어는 더욱 구체화된다. "청나라정부는 현재 변발을 하지 않은 혁명당인을 붙잡고 있다." 관리들은 이미 혁명당인들의 연명부를 장악하고 있다." 당시의 신군사병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변발을 하지 않았다. 소문속의 연명부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자신이 거기에 적혀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공포는 신군내에서 만연했고, 공포는 새로운 유언비어를 탄생시킨다. 새로운 유언비어는 더욱 큰 공포를 몰고 왔다. 이때, 쿠데타에 참가하는 것이 많은 사병들에게 스스로를 지키는 최선의 선택으로 된 것이다. 10일 저녁, 한 배장(排長)이 점호하다가 발생한 작은 타툼이 졸지에 쿠데타로 되고, 마지막에는 연쇄반응을 일으켜 신해혁명이 된다.
유언비어는 왜 항상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전파에 참여하게 만드는가? 1942년 미국의 두 학자는 유언비어의 전파와 접수에 관한 연구를 한다. 여기서 "유언비어지수"를 계산해낸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유언비어를 쉽고, 45세이상의 사람들이 젊은이들보다 더욱 쉽게 유언비어를 믿었고, 유태인들이 비유태인들보다 더욱 쉽게 유언비어를 믿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더 쉽게 믿는 것은 그들이 현상을 변화시키길 갈망하기 때문이다. 45세이상의 사람들이 더욱 쉽게 유언비어를 믿는 것은 그들의 정보채널과 정보분석능력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이 유언비어를 더욱 쉽게 믿는 것은 전쟁시 유태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안전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언비어는 왕왕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프랑스 학자인 랑 노엘의 <<유언비어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디어>>라는 책에서 유언비어에 대한 새롭고 독특한 견해를 밝힌다. 그는 유언비어는 자주 '진실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불편해하는데 그 이유는 권력이 이런 정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하여 알고 싶으나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을 때, 유언비어가 성행하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정보의 암시장이다. 유언비어을 막으려고 해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유언비어는 셜록 홈즈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상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언비어는 원한을 모아놓은 무당과 같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이러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새로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처엄 보이지만, 실제로는 옛빚을 청산하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막으려는 노력은 자주 무력하다. 외냐하면 유언비어를 막는 것은 사람의 환상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광하는 사람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평범한 현실로 돌아오라고 호소해도, 백일몽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언비어는 사회현상이면서, 정치현상이다. 그것은 일종의 반권력(反權力)이다. 비밀을 폭로하고, 가설을 내놓아서, 당국으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사회군중심리구조의 거울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유언비어는 사회적, 정치적인 것뿐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유언비어는 역사변화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을 뿐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해설자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너무나 많은 유언비어가 있다. 어떤 것은 그 자리에서 소멸되지만, 어떤 것은 살아남는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시전설 혹은 역사신화로 변모한다. 도시전설은 유언비어의 연속극이다. 예를 들어, 바늘로 찌르는 미치광이 이야기가 1922년 프랑스 파리에서 성행한 적이 있다. 80년후인 중국대륙에서도 '에이즈주사기로 찌르는 미치광이'전설이 널리 퍼졌다. 역사신화는 유언비어의 최종형식이다. 예를 들어 의화단운동은, 1901년-1920년동안에 우매, 미신, 야만적인 신화로 인식되었다; 1924년-1937년에는 민족자존심과 항거열정을 포함한 반제국주의의 정의신화였다; 문혁시대에는 더더구나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위대한 군중운동의 신화였고, 홍위병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수유를 했다; 1980년대이후, 그것은 다시 우매, 야만, 미치광이의 신화로 되돌아간다. 단지 시시때때로 여전해 애국주의라는 하나의 면사로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상은 어떠한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역사진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아마도 최대의 역사신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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