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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일본은 왜 송나라이후의 중국을 숭배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11. 4. 22.

글: 정만군(程萬軍)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수(隋), 당(唐)시대에 중국은 일본의 스승이었다. 양송(兩宋)문화는 일본이 마음으로부터 흠모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원(元), 명(明), 청(淸)의 중국왕조는 모두 대국이었지만, 일본과는 숙적이 되었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이웃나라의 중국에 대한 태도변화는 중세기이후의 중국이 매력을 잃어갔고, 이로 인하여 국제적인 지위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진(秦)나라부터 수당까지, 중국의 이웃나라 일본은 스스로 중국을 표준으로 삼았다. 일본은 스스로를 소국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에서 중국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중국의 달은 일본보다 둥글고, 성인은 중국에서만 나온다고 여겼다. 당나라때 일본은 중국문화에 대한 존경이 최고조에 이른다. 송나라때가 되면, 일본은 중국문화를 흡수하고 소화하는 단계가 된다. 동시에 중일양국의 교류가운데, 일본의 엘리트도 점차 봉건사회제도하에서 중국인의 부패한 관념, 통치자의 마목불인(麻木不仁)을 알아차리게 된다.

 

중세기말엽, 한민족이 처음으로 망국의 처지에 놓인다. 양송이 몽골에 멸망당한 것이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태도는 구십도의 대전환을 이룬다. 송나라멸망후 일본은 아쉽게 여기고, 어느 측면에서는 일본인들은 화하문명을 아주 사랑했는데, 중화대지가 몽골민족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일본의 중원문명에 대한 학습은 여기서 일단락되는 것이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나타난다. 일본은 중국의 정치대국의 지위인 '동방최강국'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심리를 드러내게 된다. 몽골이 중국을 점령하였지만, 일본침입과정에서 '카미카제(神風)'를 만나 몽골대군의 두 번에 걸친 일본침입은 실패로 끝난다. '카미카제'로 일본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은 몽골제국에 모조리 먹혀버렸다. 일본인들은 이 사건에서 자신감을 얻는다. 중국도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몽골은 우리에게 패전한 나라이다. 그런데 중국은 몽골조차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중국을 멸시하기 시작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감이 팽창했다. 쿠빌라이의 일본침입한 후, 항몽전쟁을 하면서부터, 일본의 심리는 중국과 평등한 지위를 구하는데서, 우세를 차지하겠다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자신을 '중국(中國)'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며, 중국의 화이질서관(華夷秩序觀)을 그대로 받아들여, 동방의 영도국이 되려는 야심을 갖게 된다.

 

명나라가 들어서며 한족이 나라를 되찾았지만, 일본은 더 이상 중국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망국이후의 화하는 이미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저 일본이 대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국에 보낸 국서는 그들의 광망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일본은 자신들이 이미 옛날의 그 일본이 아니라고 자랑한다: "그 교화가 미치는 곳은 조선이 조공을 하고, 유구가 신하를 칭하며, 안남, 교지, 점성, 여송, 서양, 간포채(캄보디아)등 오랑캐국가의 군주나 추장이 모두 글을 올려 조공을 한다" 거의 중국을 대체한 동방의 우두머리국가가 되었다고 과시하고 있다.

 

일본의 이런 심리를 보면, 중국의 '정치지위'를 자신이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때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배운다. 송나라때도 이런 영향은 여전히 존재했다. 중국의 강대함과 번성함을 그들은 항상 부러워했다. 나중에 양송시기의 일본의 태도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일본은 양송왕조때 대외전투를 많이 벌이는데, 중국이 피로한 틈을 타서 출병하여 중국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양송과는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양송 삼백년동안 양국이 전투를 벌인 기록은 거의 없다. 심지어 일본여인은 중국의 아이를 가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중국남자의 씨를 얻는 것을 일본인들은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남자와 일본여인간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아주 귀하게 여겼다. 나중의 원, 명, 청때와는 전혀 달랐다.

 

사람들은 일본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유약한 송나라에 대하여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면서, 오히려 원, 명, 청과 같이 역사상 대통일왕조와는 전쟁을 벌였을까?

 

일본본국의 정국이 어지러웠는지 여부를 제외하면, 한가지 근원이 있다. 그것은 중국컴플렉스이다. 이런 중국컴플렉스는 중국이 정치적 매력과 문화적 매력을 상실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인은 지금까지도 송나라에 대하여는 강렬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한문화에 대한 학습은 송나라때까지만이다. 그들은 원나라이ㅜ는 사실상 이미 진정한 중국이 아니라고 본다. 소위 "송나라가 망한 이후, 다시는 화하가 없었다."

 

그래서, 원나라와 일본은 원한을 맺고, 명나라때는 일본과 중국이 대항하게 된다. 일본은 더 이상 스스로를 '오랑캐'의 지위에 포지셔닝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여 중국과 평등한 '화'의 지위를 가지려 하였다. 결국 중국을 넘어서서 동방세계의 최강국이 된다.

 

17세기, 화하는 다시 오랑캐의 수중에 들어간다. 19세기에는 아주 쇠약해진다. 메이지유신으로 헌정을 실시한 일본은 마침내 진정으로 중화를 압도하는 기세를 갖게 된다.

 

굴기한 후의 일본인은 청나라는 동방을 지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청나라는 중국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일본이야말로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여겼다. 일본의 국학자들은 청나라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공격하고, 후쿠자와 유키치, 이시하라 간지등 메이지유신후에 활약하던 일본의 엘리트들은 중국을 아주 멸시했다. "시종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을 일본의 '화이질서체계'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이야말로 이 체계의 중심인 동방의 지도자라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