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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중국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한국인

by 중은우시 2011. 1. 31.

글: 이희광(李希光)

 

청화대학은 한국과의 교류가 긴밀하다. 한국의 이미 작고한 전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이 청화대학을 방문하여 강연을 한 바 있다. 청화대학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도 많다. 동시에 청화대학은 한국의 많은 대학들과 아주 밀접한 교류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여름, 한국의 전대통령 김대중은 청화대학에서 강연하면서 아주 겸손하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7세기 한반도가 통일된 이래, 한중 양국은 평화공준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뿐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등 방면에서 밀접한 교류를 유지해왔다. 우리는 중국에서 유교, 불교등 정신적 자산을 도입하여 우리 국민의 지식과 신앙세계를 풍부하게 하였다." 노무현 전대통령도 청화대학에서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두 나라는 수천년의 이웃으로 교류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양국 국민은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느낀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한중양국 인민들의 교류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 마찬가지로 고귀한 역사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청화대학에서 본인은 매주 하루의 시간을 내어, 학생들 혹은 친구들을 데리고 삼림이 무성한 북경 서산으로 간다. 그것에는 당나라때의 조용한 사찰이 있다. "지장사(地藏寺)"이다. 향불을 사른 후, 우리는 사찰안의 다관(茶館)에서 보이차를 마셨다. 한편으로 차를 마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옛날 일부터 지금의 일까지를 얘기했다. 한중간의 순망치한의 우의에 대하여 얘기했다. 지장보살은 중국불교의 사대보살중 하나이다(나머지 세 명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이다). 송나라 <<고승전>> 권20의 기록에 따르면, 지장보살은 신라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교각(敎覺)이다. 그는 출가한 후에 중국의 구화산에서 여러해동안 수련한다. 99세에 원적한 후, 제자들과 중국의 불교도들은 그를 지장보살이 현세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를 김지장(金地藏)으로 높이 모신다. 그리고 신광령에 탑을 지어 공봉한다. 이때부터 이 신라인은 중국불교의 사대보살중 하나인 지장보살이 되었다.

 

청화대학에서 매년 가을학기가 개학하면, 본인은 항항 창화대학의 국방생들과 한국청년이 쓴 가곡 <<팔로군행진곡>>을 부르면서 신학기를 시작한다. 가곡의 작가는 한국의 전라남도에서 태어난 위대한 음악가 정률성(鄭律成)이다. 1937년, 19세인 정률성은 열정을 품고 연안으로 온다. 보탑산의 산언덕에 서서, 전우들이 석양의 빛을 받으면서 항일구호를 외치는 것을 본다. 연안의 성안팎에는 노래 소리가 울려퍼졌다. <<연안송(延安頌)>>은 이런 분위기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중에 모택동이 참가한 한 저녁모임에서, 정률성은 친히 이 노래를 부른다. "아! 연안. 너는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 뜨거운 피는 너의 가슴 숙에서 용솟음친다" 당시, 많은 혁명가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온갖 난관을 헤치며 연안으로 왔고, 중국혁명의 물길에 몸을 던졌다. 정률성의 처는 정설송(丁雪松)은 나중에 중국 최초의 여자대사가 되는데,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연안의 한 저녁모임에서 나는 정률성을 보았다. 정률성은 당시 항일대학의 음악지도선생이었다. 나는 항일대학의 여학생대장이었다. 그는 자주 우리 대로 와서 노래를 가르쳤다. 우리는 이렇게 만난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자주 같이 걷고, 얘기하였다. 서로 못하는 말이 없게되었다." 한 한국청년과 한 중국아가씨는 이렇게 서로 사랑에 빠진다. 연안에서 정률성은 더욱 유명한 음악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한다. 이것은 나중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명칭이 바뀐다. 항일전쟁부터 해방전쟁까지, 수천수만의 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적진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신중국의 여명을 맞이했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될 때, 융중한 개국대전때 이 명곡은 천안문광장에 울려퍼진다. 1988년 등소평에 의하여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된다. 1976년 12월 7일 그가 병환으로 사망할 때, 이 한국계 음악가는 중국인민과 한국인민들에게 300여수의 인구에 회자되는 명곡을 남긴다. 2009년 가을, 신중국 60주년 경축행사의 전날에, 중국의 수억네티즌은 인터넷투표를 통하여, 정률성을 신중국에 위대한 공헌을 한 100명의 걸출한 인물로 선정했다.

 

청화대학에서는 매년 개학후에 첫번째 수업시간에 나는 항상 신문학원의 학생들에게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날의 조선인(북한인)과 한국인은 이 고구려출신의 당나라장군 고선지를 아주 존경한다. 그를 세계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 중 한 명으로 여긴다. 고선지 장군은 중국의 천군만마를 이끌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지금의 카시미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 전투를 벌였다. 비록 그가 이끄는 2만의 중국대군은 탈라스에서 전멸하지만, 탈라스전투로 중국의 제지술과 나침반을 사카르칸트에 전해지게 된다. 몇세기후 제지술과 나침반은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다. 이는 결국 유럽의 르네상스와 유럽인의 항해대탐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