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백수흑(知白守黑)
현재, 많은 연구자들은 압록강(鴨淥江)을 압록강(鴨綠江)으로 잘못 쓰게된 것은 두우(杜佑)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압록강의 "물색깔이 오리머리와 같다(水色似鴨頭)"라고 하여, 사람들이 오리머리가 녹색이라는데 생각이 미쳐서 녹(淥)자를 녹(綠)자로 바꿔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사(宋史)>>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송나라 대중상부2년, 거란의 군주 융서는 고려를 토벌했는데, 압록강을 건넜다(渡鴨淥江)....", <<원사>>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물이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압록강(鴨淥江)이라 한다"는 말이 있고, <<요사>>에는 "겨울 십월 무신, 압록강(鴨淥江)에서 낚시를 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당나라이후에도 공식문서에서는 두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압록강(鴨淥江)이라는 원래 글자를 그대로 유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의 압록강에 대한 기록도 여전히 예전과 같을까? <<명사>>를 보면, 확실히 "녹(淥)"은 "녹(綠)"으로 바뀐다. 물수변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확실히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명사>>는 청나라때 편찬된 공식사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녹(淥)"자의 물수변이 명나라때 떨어져 나갔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이 삼수변이 언제 떨어져나갔는지를 확실히 하려면 건문원년(1399)년에 정부에서 편찬한 <<명태조실록>>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홍무삼십년(1397년) 춘정월, <<명태조실록>>에는 주원장의 조서(詔書)를 하나 싣고 있다. 이 조서는 천하에 경작지를 보호하도록 하고, 방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군인과 백성이 농사를 짓고 방목을 금지하는 지역을 구분했다. 주원장은 <<칙(敕)>>에서 동쪽 경계를 언급하면서, "다시 동으로는 압록강까지(又東至鴨綠江)"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압록강(鴨淥江)"은 어느 사이엔가 "압록강(鴨綠江)"으로 모조리 바뀌어버리게 된다. <<실록>>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압록강의 한자가 바뀐 것이 주원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이와 관련한 다른 방증은 없을까?
홍무29년, 조선은 "인신(印信), 고명장(誥命狀)을 요청하는 글에 주(紂)에 관한 일을 언급하여, 아무 무례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악감정을 갖게 된다. 삼월, 주원장은 먼저 조선국왕 이성계가 '주청인신'을 위하여 파견한 예문춘추관 대학사 정총(鄭總)등을 억류하고, 곧이어 반드시 글을 쓰고 교정을 본 인원을 모조리 보내라고 요구한다.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정총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다. 글을 쓴 인원들이 경사에 도착한 후, 주원장은 그 원인을 심문하고, 돌려보내지 말 것을 명령한다.
주원장에 의하여 억류된 조선유생들 중에는 조선초기의 유명한 주자학자인 권근(權近)이 있었다. 그는 한자로 주원장과 얘기를 나누었고, 표전(表箋)에 실수가 있었음을 해명할 때 아주 겸손하고 실제적으로 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모시는데, 표전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등은 해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학문에 달통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국왕의 충성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신등의 죄이지 우리 국왕은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주원장은 연유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비로소 노기를 풀게 된다. 권근을 문연각에 남도록 하고, 2일간 유람을 하게 해주며, 그에게 시 24편을 짓도록 명하여, 감상한다. 주원장은 그의 시를 읽은 후 아주 만족하여, 어제시 3편을 내려준다.
이 3편의 어제시중에 주원장의 <<압록강(鴨綠江)>>이 들어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압록강청계고풍(鴨綠江淸界古風)
강무사식낙시웅(强無詐息樂時雄)
포도불납천년과(逋逃不納千年課)
예의위수백세공(禮儀威修百世功)
한대가계명재책(漢代可稽明載冊)
요정수고조유종(遼征須考照遺踪)
정회조도천심처(情懷造到天心處)
영세무파술불공(永世無波戌不攻)
이 시는 명나라 여비(呂毖)의 <<명조소사(明朝小事)>>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주원장이 친히 압록강의 '녹'자를 "녹(淥)"에서 "녹(綠)'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에 아무도 바꾸지 않았던 것을 주원장은 왜 바꾸었을까?
주원장은 학문이 얕았지만 주관은 뚜렷한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소색사압두'라는 두우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주원장이 이를 가볍게 믿을 사람은 아니다. 사료기록으로 보면, 주원장은 압록강까지 가본 적도 없다. 강물의 색깔이 오리머리색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주원장이 압록강의 '녹'자를 바꾼 것에는 다른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 것같다.
홍무연간에 압록강주변은 북원(北元), 고려(高麗) 및 대명(大明)간에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지역이다. 홍무20년(1387년) 주원장은 북원의 장수 나하추(納哈出)를 물리치고 원나라가 통치하던 요동지역을 빼앗는다. 당시 고려 우왕(禑王)은 이 지역을 고려에 달라고 요구하나, 주원장이 거절한다. 그때 주원장은 고려의 땅은 예로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우왕은 이에 불복하여, 홍무21년 요동을 공격하여, 쌍방의 관계가 악화된다. 나중에 이성계가 정변을 일으켜, 우왕을 쫓아내니 명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된다. 다만,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주원장은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압록강의 풍운은 주원장의 마음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는 하늘의 뜻을 생각했다. 개국초기에 주원장은 화덕(火德)을 신봉했다. 그의 일언일행은 모두 '화(火)'와 관련된다. 명나라때 유진의 <<국초사적>>에 따르면, "태조는 '화덕'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오색에서 화(火)를 중시한다. 전투복과 모자를 모두 붉은 색으로 썼다." 오행상극의 학설에 따르면, 수극화(水克火). 즉 물이 불을 이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물을 극히 싫어했다.
압록강주변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자, 주원장은 사료에 나오는 압록강의 "녹(淥)"자를 떠올렸고, 이 글자의 삼수변이 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오행상극의 이론에 따라, 압록강의 '녹(淥)"자에서 삼수변을 떼어내고, 녹색과 평화의 녹(綠)으로 바꾸고자 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것은 바로 압록강이 양안의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한 것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압록강은 명나라때 정부문서에 등장할 때면 '녹(淥)"의 삼수변을 떼어내고 "녹(綠)"으로 썼다.
사실 압록강은 만주어 Yalu ula의 음역이다. 만주어의 의미는 '변방의 강'이라는 뜻이다. 이를 놓고 보면, "녹(淥, 발음은 '루')"이 "녹(綠, 발음은 '뤼')"보다 만주어 원래 발음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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