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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중공군 제180사단: 한국전쟁 최대의 참패

by 중은우시 2010. 8. 13.

글: 반융(半戎)

 

1

 

1960년대초, 나는 군대에 입대해서, 육군 제180사단 보병 제539단(團)에서 현역으로 복무했다. 180사단은 인민해방군의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전통을 지닌 부대였다. 전쟁시대에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신은 산서의 몇 개 지방무장세력이었다. 1947년에 승격,합편되어 진기노예군구 야전병단의 제24여단으로 재편된다. 1949년 2월 전군에 통일번호를 부여할 때 제180사단으로 개칭되고, 제18병단 제60군에 배속된다. 해방전쟁초기, 제180사단은 운성, 임분전투에서 공성을 잘하는 것으로 전군에 이름을 떨친다. 전국해방전쟁이 추격전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서북으로 치고 들어가서, 사천으로 몰고 들어가, 휘황한 공적을 세운다. 1954년, 제180사단은 한국에서 귀국한 후 안휘 방부에 주둔한다. 1964년말, 제180사단은 취소된다.

 

군대에 들어간 후, 노병들로부터 제180사단이 한국전쟁때 참혹한 패배를 당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사단의 정치위원까지도 미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사단번호마저 하마터면 취소될 뻔했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당사, 군사에 흥미가 많았으므로, 제180사단이 한국전쟁에서 참패한 경위를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후 몇년간 복무하면서, 사천출신의 연대급간부나 산서출신의 영단급간부와 만날 때면,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그들에게 조선전쟁때의 이야기를 꺼내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들이 친히 참가한 적이 있는 한국전쟁의 제5차전투에 대하여는 말을 회피했다. 아무리해도 그 얘기는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아마도 일찌기 사단의 치욕인 과거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흘러서 80년대가 되었다. 일부 사건기록은 비밀해제되었다. 180사단의 한국전쟁에서의 참패에 관해서도 서적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자세히 읽어보고, 진지하게 연구했다. 마침내 제180사단이 한국전쟁에서 참패한 내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2

 

1950년, 180사단겸 미산군분구(眉山軍分區)는 사천서부에서 비적소탕을 하고 있었다. 제18병단 정치부주임, 천북구 당위서기, 천북구 행서주임, 천북군구정치위원 호요방(胡耀邦)의 지휘하에, 군심을 안정시키고, 사천에 뿌리를 내리며 평화건설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때 국제정세는 크게 변화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쟁국면은 한반도의 전쟁포화가 압록강으로까지 만연되었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도와주며,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수십만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180사단은 1951년 구정전에 명을 받아 하북 창현 박두진에 집결하였다. 같은 해 3월 17일,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180사단이 소속된 제60군은 중국인민지원군 제3병단에 배속된다.

 

압록강 남쪽의 모든 마을은 미군의 비행기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부대는 14일내에 700여킬로미터를 행군해서, 지원군사령부가 지정한 위치인 이천으로 들어가야 했다. 전사들은 평균 25킬로그램을 짊어지고, 짐승들은 100 내지 150킬로그램을 짊어졌다. 방공을 위하여 부대는 밤에 행군하고 낮에 잠을 잤다. 그때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눈이 녹고, 봄비가 내려, 도로는 진흙탕이어서, 행군이 쉽지 않았다. 행군길에 온전한 집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부대는 비바람을 맞으면서 숲속에서 숙영했다. 전체 사단의 장병은 아무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전사들은 두 다리만 있으면 비가 내리든 칼비가 내리든 제시간에 삼팔선에 도착하겠다고 하였다. 열며칠의 밤을 행군하여, 부대는 기한에 맞추어 4월 10일 이천에 도착한다. 10일후, 제5차전투에 돌입한다.

 

전쟁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하여, 그리고 적군이 피로를 틈타서다시 삼팔선 이북에 새로 상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원군사령관 팽덕회는 대규모 반격전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951년 4월 22일, 일요일, 황혼녁에 삼팔선부근의 서쪽으로는 개성에서, 동쪽으로는 인제까지 수백리에 걸쳐 지원군은 대포를 쏘기 시작했고, 제5차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국-북한 연합군의 15개군은 넓은 전선에서 동시에 유엔군의 방어진을 향하여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시에 포탄이 하늘을 뒤덮고, 보병이 홍수처럼 앞으로 전진했다.

 

서부전선의 좌익: 송시륜, 도용이 지휘하는 5개군이 일거에 적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해서 30리를 전진하여, 삼팔선이남지구로 돌격했으며 전투에서의 임무를 완수했다.

 

서부전선의 우익: 양득지, 이지명이 지휘하는 3개군과 조선인민군 제1군단은 임진강을 넘어, 몇곳의 요지와 개성, 장단을 점거한다.

 

제60군, 제12군, 제15군의 3개군은 왕근산의 지휘하에 중앙병단의 제1제대로 정면돌격을 맡는다. 이들은 미군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섬멸하고, 형제병단과 함께 미군제24사단과 제25사단을 섬멸했다. 60군은 병단좌익으로 명을 받아 고대산을 거쳐 출격하여,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서 미군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의 연락을 끊었고, 동시에 미군 제25사단을 막으면서, 미군제3사단을 견제했다.

 

제180사단은 제2제대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적군을 추격하여 일부 적군을 섬멸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초보적으로 전투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동부전선: 제3군단, 제5군단이 각각 양구, 원통을 향하여 진군하며, 남한군제5사단, 제7사단의 일부를 섬멸한다.

 

지원군은 4차전투를 거쳐 유엔군과 싸우면서, 유엔군도 지원군의 작전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지원군에게는 제공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운수라인이 일단 봉쇄되면 매번 전투에서 진공은 부대가 휴대하는 식량과 탄약에 의존하기 때문에 1주일정도밖에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국지원군의 공격을 '요일공격'이라고 불렀다. 지원군이 공격하면 미군은 후퇴하며, 지원군을 유인한 다음, 포탄이 떨어질 때쯤 대규모로 반격을 했다.

 

4월 26일, 전투는 이미 5일이 지났다. 팽덕회는 적군이 이미 주력을 서울 이남 및 북한강, 소양강 이남으로 철수시켜 저항하는 것을 발견했다. 기병제1사단은 서울주위에 밀집한 화력집중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이를 통하여 적군이 서울을 공격하도록 유인해서 대거살상을 노린다고 판단했다. 팽덕회는 서울이북에서 적군을 섬멸할 기회를 이미 놓쳤다고 보고 부대에 공격중지를 명령했다. 그리하여 4월 28일, 제5차전투의 제1단계가 끝난다.

 

이번 전투의 제1단계에서 적군을 겨우 2.3만명 섬멸한다. 미군의 부대를 소멸시킨 전투는 없었다. 팽덕회는 이에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된다.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5차전투의 제2단계 작전명령이 떨어진다.

 

5월 16일 황혼, 제2단계의 공세가 개시된다.

 

제19병단과 인민군 제1군단은 먼저 서울방향과 한강하류에서 거짓공세를 벌인다. 서울을 우회하여 도강하여, 미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서 협공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원군이 병력을 동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현리지구의 남한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다.

 

제9병단과 인민군 제5군단은 상남리와 현리 지역으로 들어가서 남한군 제5, 7, 3, 9의 4개 사단을 공격한다.

 

제3병단의 임무는 서부전선의 미군과 동부전선의 한국군의 연락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미군제40군의 동부지원을 막는 것이었다. 제3병단과 제60군은 제180사단을 제1제대로 하여, 서울 북쪽의 지포리의 산간샛길을 통하여 동쪽으로 진격하여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제5차전투 제2단계 공세가 시작된 둘째날, 제3병단의 왕근산 부사령관은 제60군의 제179사단과 제180사단을 병단의 기동부대로 하여, 각각 제12군과 제15군에 배속시킨다.

 

제180사단 산하에는 538단, 539단, 540단의 3개 보병단이 있었다. 북한강 남안 1개군의 30킬로미터의 작전지역을 180사단 1개사단이 방어진을 폈다. 적군의 집중공격대상지역을 제180사단 혼자서 맡은 것이다. 장비도 뒤떨어지고, 1만명밖에 되지 않는 부대가 300대의 탱크, 800문의 대표, 5만여명의 병력을 지닌 미군 제10군의 기계화부대를 막아내야 했다. 임무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 사단의 장병들은 사기가 높았다. 전투에 대한 갈망이 강렬했다. 그때 미군 육전제1사단, 제7사단이 이미 제180사단의 앞으로 다가왓다. 사령부는 180사단에게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전략으로 춘천, 홍천으로 투입하여 춘천-홍천도로를 장악하여 2개사단의 미군이 동쪽으로 지원하지 못하게 막는다. 이를 통하여 동부전선의 주력부대가 적군을 섬멸할 수 있도록 하려했다. 제180사단은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539단과 538단의 3개영을 하립암, 발뢰에서 각각 북한강을 건너게 하여 한기현에서 양곡산에 이르는 전선을 통제한다. 5월 17일, 540단은 발뢰에서 강을 건너 윤촌리로 들어간다. 539단은 두무동으로 진격한다. 당일, 538단은 신암리에서 적군과 조우한다. 미군탱크 10대를 파괴시키고, 1개연대를 섬멸했다. 5월 18일, 538단 2영은 효자동, 만수동 일선으로 진격한다. 황혼녘에 만수동 서쪽의 368고지를 점령한다. 미국육전1사단은 미친듯이 반격했고, 2영은 진지를 사수하느라 반이상이 사상당한다. 539단은 홍천북안의 265, 268고지를 장악하여 임무를 완성한다.

 

5월 20일, 동부전선의 지원군 2개병단은 향운리지구의 한국군 2개사단의 대부분을 섬멸하고, 또 다른 2개사단을 궤멸시킨다. 합계5.9만명을 섬멸한다. 팽덕회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그러나 부대는 이미 극도로 피로했고, 게다가 비가 내려서 공급이 곤란했다. 더 이상 싸우다가는 적군을 섬멸시키지 못할 뿐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더 곤란해질 수있었다. 그는 그리하여 '전투를 끝내고, 북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전투의 제2단계도 끝이 났다.

 

대부대에 있어서 철수는 진격보다 쉽지가 않다. 팽덕회는 철수시에 나타날 문제점을 우려했는데, 그 우려는 현실이 된다.

 

철수후의 7일째 되는 날, 심야 두시에, 팽덕회는 짧은 바지를 읿고 맨발로 왔다갔다 하고있었다. 홍학지는 막 100여킬로미터 바깥의 지원군 군수사령부에서 돌아왔다. 팽덕회는 그에게 말한다: "60군에 문제가 생겼다. 그 180사단은 병단과 지원부사령부와 연락이 끊겼다. 위걸이 어제 말했는데, 이 사단은 철수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대를 보내서 찾는데 찾을 수가 없다. 1개 사단을 이렇게 잃어비리고 그냥 놔둘 수가 없다."

 

팽덕회는 말을 마치고 바로 제3병단에 전화를 건다.: "명령이다. 즉시 부대를 조직하여 180사단을 구원하러 떠나라. 반드시 그 사단을 찾아서 나에게 데려와라."

 

경호원이 낮은 소리로 홍학지에게 말했다: "홍부사령관. 듣기로 180사단은 차단되었다고 합니다. 팽총사령관은 계속 전화기 곁에 붙어 있습니다. 눈을 붙이지도 못했습니다. 이미 이틀 밤낮을 이러고 있습니다."

홍학지가 다가가서 팽덕회에게 권했다: "먼저 좀 잠을 주무세요. 내가 대신 전화를 지키겠습니다. 상황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팽덕회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다시 제3병단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화를 잔뜩냈다.

 

팽덕회가 제3병단과 제60군에 180사단을 구원하라고 여러번 독촉했지만, 구원부대는 제대로 찾지를 못했고, 제180사단의 행방은 묘연했다.

 

3

 

마침내, 제180사단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아주 나쁜 소식이었다.

 

5월 22일, 전선의 부대가 대거 철수할 때, 군부는 제180사단에 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북한강을 넘어 춘천서북지구로 가서 방어를 펼치도록 했다. 명령을 집행하던 제180사단은 다시 군사령부에서 병단을 거친 명령을 받았다. 제180사단으로 하여금 중부전선의 부상병들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으라는 것이다. 가평, 북한강 이남지역에서 3단계의 방어선을 펼치고 3일에서 5일간 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라고 하였다.

 

이 임무를 집행하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는 쉽지 않았다. 5월 22일부터, 각부대가 휴대한 식량은 거의 바닥이 났다. 일부 영, 연은 아예 식량이 끊겼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제180사단의 좌익에 있는 제15군, 우익에 있는 제63군과 병단예비대는 모두 5월 22일 명령을 받아 북으로 철수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50킬로미터는 텅비어 있고, 그 안에 180사단 1개 사단만 있었다. 나머지 전체부대가 후퇴하면서 제180사단을 남겨두어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적군은 지원군 주력부대가 철수하는것을 보고, 부대를 동원하여 전체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한다. 미군제7사단과 남한제6사단은63군이 철수하여 빈 공간으로 들어와서, 제180사단의 측후방으로 들어간다. 미군제24사단,남한 제2사단등은 모터화쾌속부대와 공군의 지원하에, 정면으로 제180사단을 공격한다.

 

5월 23일, 적군의 비행기가 제180사단본부와 539단의 방어선에 계속적인 포격을 가한다. 적군의 1개단의 병력은 16대의 탱크와 함께 539단 4련이 방어하는 구련산진지에 맹공을 가한다. 4련은 적군의 5번에 걸친 공격을 패퇴시키고, 수백명을 사살한다. 적군은 1개단과 2개영의 병력으로 5련과 싸웠다. 5련의 진지에 미친듯이 포격을 퍼부었고, 진지는 초토화가 된다. 5련의 영장 마흥왕이 지휘하여,8번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리고 기관총 1정을 포획한다. 성황당 일선을 사수하던 540단 1영 3련의 170명의 연대는 마지막에 겨우 십여명이 남게 된다. 간부는 모조리 사망했다. 3영의 교도원 임진화는 전사를 이끌고 적군의 여러번에 걸친 공격을 막아낸 후, 탄약이 소진되자 마지막에는 수류탄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동귀어진한다.

 

이틀간의 진지사수전에서 전사단의 간부사망자는 중국내에서 2년간 전쟁할 때의 숫자를 이미 넘어섰다. 538단의 1영영장 유길요, 교도원 조국태, 539단의 정위 한계명, 3영교도원 양빈, 1영 부교도원 곽청오, 540단 정치처주임 왕체선, 포병영장 장윤호등이 모두 희생된다. 538단은 5명의 연장, 6명의 교도원이 희생된다. 539단은 8명의 연장, 5명의 교도원이 희생된다. 이런 심각한 상황하에서, 5월 24일밤, 군사령부는 180사단이 즉시 북한강을 넘어 강북에서 반격을 조직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적군이 이미 나루터를 장악하고 있었다. 안내원도 없어서, 부대는 그저 임시로 가설한 철사선을 잡고 도강했다. 강물의 물살이 세고, 강물이 차가워서 뼈가 시릴 정도였으며, 강중앙은 가슴깊이까지 깊어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동시에 적기는 계속 강으로 사격을 하고 포탄을 떨어뜨렸다. 이날 밤에 강물에 휩쓸려간 부대원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5월 25일, 사단사령부 및 539단은 명월리와 구순대산으로 전진한다. 538단은 상하방동에서 적군과 만나고, 540단은 북배산, 계관산일대에서 적군을 만난다. 539단 2영이 명월리에 도착했을 때, 적군은 이미 서남 367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교도원 관지초는 즉시 부대를 조직하여 고지를 점령한다. 그는 전투영웅 허사보로 하여금 4련 2배를 이끌고 신속히 우회하여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한다. 그리하여 고지를 점령하고 적군 50여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로로 잡는다. 기관총 4정도 획득한다. 오후 3시, 적의 선두부대 1개영이 구순대산에 도착한다. 산머리를 방어하던 539단 2영 5련을 향하여 맹렬히 공격한다.5련은 탄약이 이미 떨어졌다. 돌맹이, 칼을 들고 백병전을 벌였다. 반복되는 쟁탈전으로 서로간에 무수히 사상당한다. 진지에는 겨우 4명이 남았다. 그래도 적군의 공격을 다시 한번 물리친다. 전체 장병은 적군과도 싸워야 했고, 기아와도 싸워야 했다. 부대는 일찌감치 식량이 떨어졌다. 장병들은 나뭇잎,풀뿌리를 먹으며 연명했다. 어떤 사람은 독초를 먹어서 죽기도 했다.

 

전사들은 이렇게 혈육으로 적군의 철갑을 막아냈다. 그 와중에 사상자가 많았다. 적군의 공격을 막아서 시간을 벌고 주력부대가 후퇴하도록 시간은 벌어주었지만, 자신들은 절망적인 지경에 처한다.

 

5월  25일 오후 5시, 명월리의 180사단은 군사령부에서 병단을 거친 명령을 받는다. 180사단은 2개단을 파견하여 도로를 따라 마평리 배후의 산을 점령하라는 것이다. 1개단을 파견하여 토산로를 따라 가덕산으로 가서 양쪽에서 적군을 공격하여 전병단 3000여명의 부상병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180사단은 명령을 받은 후, 사단직속부대와 각단중포연대, 538단, 539단에 마평리 배후의 산으로 가도록 명령한다. 부대가 행동을 개시했을 때, 다시 명령을 받는다. 사단사령부는 2개단을 이끌고 토산로를 따라 가덕산을 점령하고, 또 다른 1개단은 전체 사단 200여명의 중상병을 이끌고 도로를 따라 마평리 병참으로 이동하라는 것이다. 그 후에 마평리 배후의 산을 점령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사령부는 다시 이미 북으로 이동한 538단에게 되돌아와서 540단과 협동하여 가덕산에 새로 방어진을 구축하도록 한다. 539단에게는 부상병을 이끌고 마평리 병참으로 간 후에, 즉시 마평리 배후의 산을 점령하도록 한다. 그러나 명령이 잘못 전달되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명령을 변경하였는지, 539단은 응봉산으로 오른다. 이 잘못으로 180사단은 마평리 배후의 산을 점령할 기회를 놓친다. 진격과 방어가 모두 유리한 진지를 놓치게 된다.

 

5월 26일, 180사단이 가덕산에 도착했을 때, 마평리 배후의 산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5분도지나지 않아, 적군의 포탄이 맹렬히 날아온다. 사단지휘관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우군이 이미 없다. 산머리는 적군이 점령했다. 이제, 180사단은 미이 적군 4개사단의 포위망 속에 들어간 것이다. 더욱 심각한 일은, 상부와 연락이 끊긴지 이미 하루가 지났고, 부대내에는 양식과 탄약이 없으며, 외부에서 지원병력도 끊겼다는 것이다.

 

5월 26일 정오, 사단장 정기귀(鄭其貴)와 사단 대리정치위원, 정치부주임 오성덕(吳成德)은 가덕산 538단지휘소에서 긴급당위확대회의를 개최한다. 단룡장 부사단장이 먼저 적군의 상황을 보고한다: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 미제24사단이 이미 간촌을 점령했다. 남한 제6사단은 이미 지암리로 진격했다. 미7사단은 마평리에서 우리 사단 측후방을 공격한다. 적군은 이미 우리 사단을 포위했다."

 

정사단장은 말한다: "고수할 것인가 포위망을 둟을 것인가? 집단으로 결정하자."

 

당시, 포탄은 계속 538단의 지휘소주변에 떨어지고 있었다. 회의장소를 경비하던 한 병사는 적군의 기관총사격에 사망했다. 대리정치위원 오성덕은 침중하게 말했다: "요 며칠의 전투로 보면, 우리 사단은 심각한 사상자가 있어, 적군과 직접 대적할 역량이 없다. 적군의 맹렬한 포탄공격에 손해만 보고 있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는, 부대가 포탄에 모조리 죽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더 이상 포탄도 없다. 어떻게 고수하면서 지원을 기다리겠는가? 나는 포위망돌파를 주장한다." 곧이어 부사단장 단룡장, 참모장 왕진방 및 540단 정위 이모소, 538단 단장 방극창등이 발언에서도 모두 포위망돌파를 주장한다. 성격이 급한 포병주임 곽조림은 참지못하고 소리쳤다: "사단장. 빨리 결정합시다. 설마 부대를 이렇게 적군에게 먹히도록 놔둘 것인가. 이게 우리 180사단의 마지막 자산이다." 그러나 몇몇 동지들은 다른의견을 내놓았다: "앉아서 죽느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침중하고 비통했다.

 

정기귀 사단장은 1929년에 군대에 들어온 노홍군이다. 장정과 홍군서로군혈전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20여년의 군대생애에서 그는 계속 정치공작을 담당했고, 1949년초에 180사단장으로 보임되었다. 이전에는 군사업무를 주관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당의 정치간부로서 갖추어야 할 소질과 상급의 명령을 있는 그대로 집행한다는 행동준칙은 이때도 작용을 발휘한다: 상부의 명령이 없이는 철수할 수 없다.

 

정기귀 사단장은 선포한다: "즉시 포위돌파준비를 하라. 작전과는 즉시 군사령부에 지시를 요청하라. 비준을 받은 후 즉시 행동한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군사량부의 회신이 왔다. 180사단이 응봉산을 향하여 포위망돌파를 시도하는 것을 동의한다는 것이다.

 

4

 

180사단은 5월 26일 오후 6시 황급히 포위망돌파를 시도한다. 산길을 따라 포위망을 뚫으려면 무거운 대포는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그저 몇 발의 포탄을 적군을 향하여 발사했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은 포탄내에서 자폭하하여 대포를 망가드리게 한다. 포연대의 전사는 굶어죽을 지언정 자신의 말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풀어주어 산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포위망돌파에서, 사단사령부, 538단, 540단은 가덕산에서 응봉산으로 오는데, 6,7리에 걸친 깊고도 긴 계곡을 통과해야 했다. 수천명이 하나의 계곡 속에 몰려있다보니, 길도 좁고, 되돌아가기도 힘들었다. 집중포화 속에서 앞서가려는 사람이 있다보니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병사들이 흩어지게 된다. 전체부대는 4,5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적지 않ㅇ느 사람들이 행군중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5월 27일 새벽, 응봉산에 도착했을 때, 사단사령부는 겨우 1500여명이 남았다. 당시 산위의 적군은 이미 주봉과 많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180사단의 포위망을 좁혀왔다. 538단의 단장 방극창, 참모장 호경의는 반(班)이상의 당원간부를 조직하여 동태봉 결사대를 조직한다. 오성덕은 539단의 정치부주임 이전산, 보위간사 왕홍운 및 병위배장 여철전, 정찰원 장림천으로 하여금 경위배와 단기관간부 30여명을 이끌고 1영 참모장 주복행이 지휘하는 1영 5개 배와 함께 응봉산 주봉을 공격하도록 한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응봉산주봉은 다시 적군의 손에 넘어간다. 이리하여 포위망돌파는 실패한다.

 

180사단의 나머지 부대는 겨우겨우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응봉 서쪽의 숲속의 골짜기로 들어간다. 이때 사면의 산에 모두 적군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적기가 공중을 돌고 있었다. 몇개 사단의 적이 포위한 것을 보고는 몇몇 사단지휘관들은 형제부대의 도움을 받기는 이미 어렵다고 느낀다. 토의를 거쳐 분산포위돌파를 시도한다.

 

분산포위돌파는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180사단의 나머지 인원은 극도로 피로했다. 식량은 바닥났고, 야채, 풀뿌리로 연명했다. 전투력이라고 할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적군의수량과 장비는 모두 우세했다. 만일 집중돌파를 한다면, 더 많은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부대는 분산포위돌파를 시도한다. 사단대리정치위원, 정치부주임 오성덕이 말에 올랐을 때, 계곡아래의 동지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오주임,오주임" 오성덕이 말에서 내려서 보자, 자신이 알고 있는 538단 2영의 군의 왕홍흥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왕홍응은 오성덕에게 같이 태워줄 것을 요청했다. 오성덕은 통신원에게 539단의 수장에게 이 이을 처리하라고 얘기하고, 한편으로 왕홍흥의 상처를 살펴보며, 그를 위로했다. 오성덕은 이로 인하여 20분을 지체한다. 그는 사단지휘부의 포위돌파에서 낙오된 것이다. 그는 남은 400여명의 부상병을 이글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그 자신이 포위망에 빠진다. 그는 나중에 일부 인원을 이끌고, 거의 생존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하에서 적의 후방에서 500여일간 유격활동을 벌인다. 그는 불행히도 1952년 여름에 포로로 잡힌다. 중국군이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인원중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그는 9월에 마지막일진으로 귀국한다.

 

180사단의 분산포위돌파상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기귀 사단장이 이그는 부대는 작은 길을 따라 사창리 방향으로 전진한다. 사창리 방향에서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마도 적군이 포위망을 뚫는 인원을 저격하려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동북방향으로 방향을 튼다. 산림을 하나 넘어 민둥머리산을 오른다. 이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앞은 절벽이고, 뒤돌아갈 길도 막혔다. 사람들은 허리띠등을 묶어서 연결시킨 후 내려간다. 사람들은 끈을잡고 내려가는데 한번 미끄러지면 팔구십미터나 된다. 중간에 끈이 몇번이나 끊어졌다. 그리하여 여러명이 부상을 입는다.

 

절벽을 내려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 절벽을 내려간 후, 동서방향의 깊은 골짜기에서 동쪽으로 간다. 날이 밝을 때 골짜기 입구에 도착한다. 골짜기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은 작은 강이 있었다. 부대가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안개속에 돌연 십여대의 탱크가 나타나서 그들을 향하여 포격을 가한다. 정사단장은 단부사단장, 왕참모장과 경호원의 호위하에, 적군을 우회하여, 부근의 숲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작은 강을 건넌다. 3,4리를 걸어갔을 때, 다시 큰 강을 만난다. 강에는 적군의 보병이 매복해 있었다. 경비가 그들과 전투를 벌였다. 근접전에서는 지원군이 미군보다 강했다. 그들 200여명은 금방 적군의 진지를 점령한다.

 

정기귀 사단장은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천신만고끝에 6월 1일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었다.

 

5

 

당시, 북경에 있던 모택동은, 180사단이 포위망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침식을 이루지 못한다. 아주 초초해서 자주 전보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서 팽덕회에게 물어보았다: "180사단의 상황은 어떠냐, 이주 걱정된다."

 

팽덕회는 180사단의 손실이 참혹하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한다. 6월 25일, 공사동에서 지원군 군급이상간부회의에서 60군군장 위걸을 심하게 비판한다. 나중에 사단에서 군, 병단에서 지원군총사령부까지, 180사단의 참패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하고 자아비판을 한다. 팽덕회 사령관은 가장 먼저 책임을 적극적으로 지겠다고 나선다. 이 제5차전투를 그는 자신의 일생에서 4가지 군사상 실책의 하나로 여겼다.

 

전투를 할 때면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제3병단 부사령관 왕근산은 1951년 6월 모주석을 접견할 때, 사실대로 모주석에게 자신의 지휘상의 실책을 보고하고, 자신에게 처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지휘부실을 이유로 180사단장 정기귀, 부사단장 단룡장은 직위해제당한다.

 

60군 군장 위걸은 건국후에 성도군구 부사령관을 지낸다.1955년 중장계급을 받는다. 중공중앙 제12기 고문위원회 위원도 지낸다. 1987년 2월 임종시에도 그는 여전히 그 때의 일을 잊지 못했다: "항미원조 제5차전투에서 180사단의 손실이 심각했다. 그러나 책임ㅇ르 180사단에 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1964년말, 중공중앙군사위원회는 180사단을 기초로, 안휘성군구, 강소성군구, 절강성군구의 3개독립사단을 조직한다. 180사단은 3개사단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180이라는 사단번호는 폐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