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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여구노미(閭丘露薇): 내가 본 북한

by 중은우시 2012. 1. 13.

글: 여구노미閭丘露薇)

 

김정일이 사망하고, 전세계의 사람들은 북한TV를 통하여,북한의 사람들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거국적으로 비통해하는 광경을 보앗다. 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한 나라의 국가지도자가 서거하는데, 그 민중들이 이토록 비통해마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북한을 가본 사람들은 이런 장면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평양박물관의 해설원을 기억한다. 김일성부자의 영웅적인 사적을 설명할 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러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김일성부자 그 두 사람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 해설원의 눈물이 나의 눈에는 약간은 뜬금없다고 느껴졌다. 특히 낯설 사람의 앞에서 상대방이 아무런 주저없이 감정을 모두 드러내니, 나는 오히려 난감한 입장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할지 알지 못하여 그저 상대방을 가급적 보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다.

 

나는 그 여자를 비웃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 북한TV의 여자아나운서를 비웃지 않고, 그녀가 말하는 어조, 그녀의 표정, 그녀의 눈물을 비웃으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도 거의 비슷한 어조로 발언대에서 말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표준화된 동작을 해본 적이 있고, 자신의 조국과 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얘기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9년에 북한을 한번 가보았다. 평양에서, 중국과 북한의 예술단은 함께 공연을 했다. 양국의 우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북한여성사회자의 말투, 그들이 공연하는 곡목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수식이 없어서, 한참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모두 중국에서 80년대에 만회(晩會)에서 하던 방식이다. 춤, 합창, 독창. 만일 겉포장을 벗기고 본다면, 북한배우들의 공연이 더욱 순수했다. 같이 공연한 중국의 프로그램은 화려하고 섹시한 복장에, 조명도 각종 곡선을 그렸다.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왜 북한의 젊은 외교관들과 얘기할 때, 그가 심각하게 나에게 이렇게 말했는지: 그가 보기에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에서 벗어난 것같다.

 

이 젊은 외교관은 우리의 북한인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홍콩의 한 친구는 그가 마치 아이돌가수처럼 생겼다고 했다. 그는 영어를 유려하게 구사한다. 그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미국영화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80년대와 비슷하다. 그때 사회에는 영어를 배우는 열기가 있었고, 비록 영어교육의 조건은 열악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독학으로 공부하곤 했다. 업무관계로 그는 많은 나라를 가보았고, 자신의 국가가 아주 가난하고, 굶주림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된 원인은 미국의 제재때문이라고 하였다. 미국의 전대통령 클린턴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를 얘기할 때는 눈이 반작 빛이 났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클린턴 본인을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북한을 가서 김정일을 보았다. 공항에서 중국지도자들이 타고오는 전용기가 도착하는 것을 찍고 있을 때, 돌연 경천동지할 환호성이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원래 김정일이 친히 공항으로 영접을 나온 것이었다. 그때 외부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는 중병을 앓고 있어서, 행동이 불편하다고. 나중에 전용기를 전송할 때는 조금 일찍 공항에 도착을 했더니,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 환호성은 현장에 있는 수백명의 조선남성들이 낸 것이었고, 그들의 앞에는 마이크가 있었다. 그들은 생화를 들고 서서 환호하는 사람들의 뒷편에 서서, 현장에 음향효과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북한 정부는 융중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공항에서 시중심까지 도로의 양켠에 많은 환영인파를 배치했다. 당연히 이런 일은 내가 어렸을 때 해보았던 것이다. 홍령건(紅領巾)을 매고, 종이로 만든 꽃구슬을 들고, 거기에서 리듬에 맞추어 흔들었던 것이다. 얼굴에는 약간 연지도 발랐다. 차량행렬이 지나갈 때, 나는 홍령건을 맨 조선여자아이들의 무리를 보고는 잠시 눈앞이 멍해졌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그저 즐거웠었다.

 

그리고 차창밖의 얼굴들을 보니, 어떤 사람은 격동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보다보니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이런 과거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은 사실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 때문이다. 그저, 이전에는 오랜 기간동안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뿐이다. 왜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는가, 원래 생활은 다른 방식과 선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는 믿었었다. 운이 좋아서 나는 아주 아름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지금 돌아서서 살펴보니, 이런 선택과 변화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무수한 선배들 그리고 나보다 먼저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변혁을 추구하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나와 나처럼 잘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앞으로 전진하는 버스에 태워주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정일이 없는 북한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주목한다. 마치 1976년 9월 9일이후의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당시의 중국은 지금의 북한과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몰랐다. 이 봉쇄된 국가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장래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그 1년후, 중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중국은 바뀌었다. 마찬가지의 일이 아마도 북한에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인으로서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들은 바로 북한인민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인민들이 개혁을 추구할 의식이 없어서, 그런 기회도 없다고 걱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 그것은 시간이 길고 짧고의 문제일 뿐이다.

 

북한매체가 내보낸 사진에 땅위에 울며 엎드린 조선의 여자들을 보면, 그녀들이 입고 있는 것은 여러가지 색깔과 모델의 오리털파카이다. 이것은 이미 내가 2년전에 평양거리에서 보았던 광경과 달라진 모습이다. 중국이 통일적인 남색제복을 입던 것에서 돌연 변화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생각난다.

 

고려반점의 옆에 있는 훠궈(火鍋)가게에서, 젊은 여종업원이 우리와 함께 중국의 유행가를 불렀다. 2009년초, 조선에는 겨우 6천명만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으나, 2011년말에는100만을 돌파했다. 어쨌든 변한다. 독재자도 결국은 죽는 것처럼. 변화가 빨리올지 늦게올지의 차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