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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지금도 남아있는 3가지 중국고대민간의 설날풍속

by 중은우시 2011. 1. 28.

글: 월초(越楚)

 

중국전통의 음력설날은 옛날에 원단(元旦), 원일(元日), 원신(元辰), 원삭(元朔), 정원(正元), 정단(正旦)등으로 불리웠다.

신해혁명(1911년)때 "춘절(春節)"로 이름을 바꾸었다. 민간에서는 "과년(過年)", "과대년(過大年)"이라고 부르고 있다.

음력 섣달그믐날(大年三十)은 옛날에 "제석(除夕)"으로 불리웠다. 그 뜻은 '한 해가 이 날 저녁에 끝이 난다'는 의미이다.

정월초하루는 "세지원(歲之元), 월지원(月之元), 시지원(時之元)"이므로 "삼원(三元)"이라고 불렀고, 민간의 속칭은 "대년초일(大年初一)"이다.

중국민간에서는 '과대년'을 '납월망년(臘月忙年)'이라고도 부른다. 설날세시풍속은 수천년간 변화를 겪었는데,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단년수세(團年守歲)

 

"과년"습속은 고대의 "제랍(祭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민간전설에서의 "년(年)"은 "제랍"과는 다르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년"은 태고시대의 괴수의 일종인데, 매번 추운 겨울이 끝나고 새봄을 맞이할 때쯤이면 사방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문다.

고대인들을 "년"에게 먹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함께 모여서, 모닥불을 피우고, 대나무를 던져넣어서 대나무가 깨지면서 폭음이 나게 한다. 그렇게 하여 "년"이 놀라서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다.

<<시경.소아.정료>>를 보면 "정료지광(庭燎之光)"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정료'가 바로 대나무로 만든 횃불이다. 탈 때 대나무안의 공기가 팽창한 후 갈라지면서 큰 소리를 낸다. 이것이 아마도 '폭죽(爆竹)'의 유래일 것이다.

"년"이 불꽃과 폭음을 두려워하므로, 사람들은 매번 제석이 되면, 붉은 대련(對聯)을 붙이고, 폭죽을 터트리며, 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밤새도록 모여서 지낸다(守更待歲). 그리하여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단년반(團年飯)과 섣달 그믐날에 잠을 자지 않는 수세(守歲)의 풍속이 생긴 것이다.

"단년반"은 "년야반(年夜飯)", "분세반(分歲飯)"이라고도 한다.

<<형초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늦어도 남북조시대에 이미 단년반을 먹는 습속이 있었다. 제석수세도 단년반을 먹는데서 시작했다. 이 식사는 여러 날을 준비하는데, 농가에서는 일년중 가장 풍성한 식사였다. 일반적으로는 등을 켤 때부터 시작하여 한밤중까지 계속된다.

고대의 일부 감옥관리들은 죄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어 집안식구들과 함께 '단년반'을 먹도록 했다. 이를 보면 당시 '단년반'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단년반'의 남북풍속은 서로 다르다. 각각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북방사람들은 교자(交子)를 좋아한다. 그 뜻은 '경세교자(更歲交子)"이다.

강소절강일대는 떡(糕)을 만들고, 초나라땅에는 어육고(魚肉糕)를 만드는데, 이는 "고(糕)'와 '고(高)'가 같은 음이기 때문이다.

양나라의 서군천(徐君倩)은 <<공내인야좌수세(共內人夜坐守歲)>>라는 시를 썼다:

염개풍입장(簾開風入帳) 촉진탄성회(燭盡炭成灰)

물의빈채중(勿疑鬢釵重) 위대효불최(爲待曉不催)

섣달 그믐날은 "하룻밤이 두 해에 연이어지고, 오경도 두 해로 나뉜다"는 밤이다. 집안식구들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놀았다. 이것은 이미 전설상의 소극적인 '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족의 정을 느끼면서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맞이하는 것이며, 새해에 대한 아름다운 희망을 담는 날이 되었다.

 

공배대년(共拜大年)

 

<<북평년요(北平年謠)>>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삼십일(三十日), 흑야좌일소(黑夜坐一宵), 대년초일(大年初一), 출래뉴일뉴(出來扭一扭)"

새해 정월초하루에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서 새 옷을 입고, "개문포(開門炮)"를 터뜨린 후 친척, 친구를 방문하여, 서로 절을 하며(拜年), 새해의 대길대리를 축복한다.

고대에 통상적으로 '배년'의 순서는 먼저 천지에 절을 하고, 다음으로 조상에 절을 하고, 다시 웃사람에게 절을 한다. 그 후에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또한 초하루는 본가에서 절을 하고, 초이틀은 처가를 찾아가고, 초사흘을 친척을 찾아가는 등의 방식도 있다. 이렇게 정월대보름까지 해야 비로소 '배년'이 끝난다.

고대에 배년(拜年)과 하년(賀年)은 구분되었다. 배년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새해인사를 하는 것이고, 하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새해인사를 하는 것이다.

명나라 중엽에 "경사에는 설날후에 위로는 조정관리로부터 아래로는 일반서민까지, 도로를 오가는 자들이 날을 이었다. 이를 '배년'이라고 한다"(숙원잡기)

개략 청나라때부터 배년에서 '단배(團拜)'의 형식이 나타난다. <<측모여담>>에는 "경사에서 새해 첫날에는 단배를 행했다. 이를 통하여 한해의 우의를 다지고, 고향의 정을 돈독히 했다"

송나라때는 친구들 사이에 서로 새해를 축하하는 첩을 보냈는데, 이것은 신년카드의 원형인 셈이다. 명나라때에는 신년카드가 더욱 정교하게 설계되어, 첩에는 보내는 사람의 성명, 주소뿐아니라, '신년쾌락' '길상여의'와 같은 축하하는 문구도 기재되었다.

 

압세기복(壓歲祈福)

 

설날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을 하면, 윗사람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압세전(壓歲錢)"을 아랫사람에게 준다. 그 뜻은 "압세기복(壓歲祈福, 나
쁜 것은 누르고 복을 바란다)"이다.

"압세전"이 사숭(邪崇)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세(歲)"와 "숭(崇)"의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압숭전(壓崇錢)"이라고도 부른다.

아랫사람은 '압세전'을 받으면 새해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경세시기>>에는 두 가지 '압세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채색끈으로 줄을 만들어 용의 모양으로 한 다음 침상다래에 두는데 이를 '압세전'이라고 했다; 윗사람이 아이들에게 주는 것도 역시 '압세전'이라고 했다" 후자가 바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서 붉은 종이로 싸서 윗사람이 아이들에게 주는 '압세전'(세뱃돈)이 된 것이다.

압세전은 아랫사람이 절을 한 후에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줄 수도 있고, 섣달그믐날 아이가 잠을 잘 때, 가장이 몰래 아이의 배게아래에 넣어두기도 한다.

청나라때의 오만운(吳曼雲)이 쓴 <<압세전>>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백십전천채선장(百十錢穿彩線長) 분래재침자수장(分來再枕自收藏)

민간에서 백성들이 '압세전'을 아이의 베개아래에 넣어두는 것은 바로 '압숭(壓崇)'을 위한 것이다. 악귀요마 혹은 전설상의 '년'이 아이를 해치려 할 때, 아이는 이 돈을 그들에게 뇌물로 주고, 화흉위길(化凶爲吉)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은 어른들이 아이가 평안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좋은 마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