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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단오(端午)의 기원은 굴원(屈原)과 무관하다.

by 중은우시 2010. 6. 13.

글: 곽찬금(郭燦金)

 

단오는 음력 오월오일이며, 중국의 중요한 명절 중 하나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굴원이 단오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의 좌도(左徒)인 굴원은 초회왕(楚懷王)의 신임을 받았지만, 동료인 상관대부의 질시를 받았다. 상관대부는 여러가지 수단을 써서 초회왕과 굴원의 관계가 소원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파직되어 유배간다. 굴원은 초회왕이 간신이 횡행하고 정인군자가 조정에 남아있을 수 없는 현상에 절망하고 우울한 마음을 <<이소(離騷)>>로 쓴다. 기원전278년, 진(秦)나라군대가 초나라의 도성을 함락시킨다. 굴원은 슬픔에 빠져 오월오일에 <<회사(懷沙)>>를 쓴 후, 돌맹이를 안고 멱라강(汨羅江)에 투신한다. 굴원이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멱라강변의 주민들은 모두 통곡을 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작은 배를 몰고 강으로 가서, 굴원의 시신을 건져내려고 했다. 굴원의 시신이 물고기에 뜯어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은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강물에 먹을 거리를 대량으로 던져넣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물고기들이 배가 불러, 굴원의 시신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단오절을 형성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사실, 이것은 아름다운 오해이다.

 

문헌을 보면, "단오"라는 단어는 아주 늦게 출현한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단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당서>>이다. <<당서>>는 송나라때 만든 것이다. 이를 보면, "단오"라는 단어는 개략 송나라때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굴원이 투신자살한 때로부터 송나라때까지는 긴 기간이다. 그런데, 이 기나긴 기간동안 '단오'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굴원을 단오와 연결시킬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비록 송나라이전의 자료에 '단오'라는 단어는 없지만, "오월오일"에 대한 기록은 많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때의 <<대재례)), <<하소정>>등의 문헌에 모두 이 날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의 문헌에 나오는 이 "오월오일"은 굴원과 관련이 있는가?

 

답안은 실망적이다. 초기의 기록에서, 이 날자는 여전히 굴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재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월오일은 향료로 목욕을 한다(五月五日蕃蘭爲沐浴)"

<<하소정>>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날은 향료와 약을 채집하여 독기를 몰아낸다(此日蕃採衆藥, 以蠲除毒氣)"

 

이를 보면, 초기의 기록에서 "오월오일"은 무슨 기념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월오일"은 그저 하나의 길한 날이었다. 그래서 오월오일에는 향기나는 향료로 목욕을 하는데, 그 목적은 독기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사기>>에도, 사마천은 굴원이 자살한 구체적인 날짜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저, 굴원이 <<회사>>를 쓰고 돌을 가슴에 품고,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은 우리에게 굴원이 죽은 구체적인 일자를 알려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개략적인 계절마저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단오"를 굴원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고 한다는 것은 견강부회적이다. 먼저 "오월오일"이라는 재앙을 몰아내는 날짜가 있었고, 나중에 이 날을 "단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늘날에는 고증할 수 없는 원인으로 이 날을 대표하는 인물로 굴원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단오절'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역사는 공평하다. 굴원이 자살한지 천년이 지나서, 한 날짜가 그로 인하여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