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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조광윤: 가장 도량이 넓었던 황제

by 중은우시 2009. 9. 27.

글: 유계흥(劉繼興)

 

서기927년 3월 21일, 조광윤은 낙양 협마영의 한 군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홍은(趙弘殷)은 일찌기, 후당, 후진, 후한, 후주 4개왕조의 금군장령을 지냈다. 조광윤은 어려서부터 기우(器宇)가 헌앙(軒昻)하고 의표(儀表)가 비범했다. <<송사>>에서는 "용모가 웅위하고, 기도가 활여(豁如)하여, 아는 사람은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조광윤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사해에 위세를 수백년간 떨치던 대당제국이 사라진지 이미 20년이 되었다. 그때 중화대지는 갈갈이 찢겨 있었고, 전쟁이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군벌할거의 오대십국은 중국역사상 대동란기였다.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조광윤은 어려서부터 군에 들어가, 전쟁터를 수없이 거쳤고, 전공이 탁월하여, 계속 승진을 거듭했다. 나중에 관직이 귀덕절도사,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에 이른다. 960년, 정교하게 계획한 "진교병변"으로 조광윤은 황제의 보좌에 오르고, 대송왕조의 개국황제가 된다.

 

조광윤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었고, 가정의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말타고 활쏘기 및 무술연마를 즐겼다. 그리하여 아주 뛰어난 무예를 익혔다. 조광윤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고대에 무공이 가장 뛰어난 황제였다. 그는 '태조장권(太祖長拳)'을 만들어 냈는데, 북방의 호매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고, 중국무술계 6대명권중 하나이다. 그는 또한 독특한 병기인 '대소반룡곤(大小盤龍棍)을 발명한다. 둘을 함께 사용하면 위력이 대단했다. 대소반룡곤은 한쪽 끝은 짧고 다른 한쪽 끝은 길다. 이는 적군의 말굽을 타격하는데 쓰는 것이다. 갑옷을 입은 병사나 단단한 병기를 깨뜨리는데도 유용했다. 이렇게 하여 적군의 전투력을 상실시켰다. 나중에 무예를 하는 사람들은 조광윤의 대소반룡곤의 원리를 이용하여, 길거리에서 근접전에서 쓰이는 '삼절곤'과 '쌍절곤'으로 발전시켰다.

 

무인출신인 조광윤은 글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글을 약간은 알았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옛사람들은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조광윤도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도 시를 써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양은 가련할 정도로 적다. 평생 쓴 것이 1수반이다. 이 점에 관하여 고대서적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때 진초암이 쓴 <<경계시화>>에 따르면, 조광윤이 황제에 오른 후에, 어느날 밤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며 논 적이 있다. 모두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하느라고 잠을 자는 것도 잃고, 새벽까지 밤을 지샜다. 동쪽 하늘이 이미 밝아왔다. 새벽에 태양이 점점 떠오르자, 한 친구가 그 광경을 보고 <<영일시(迎日詩)>>를 썼다. 조광윤은 그것을 듣고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싯구는 잘 다듬어졌지만, 기세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영초일(迎初日)>>이라는 시를 읊는다:

 

태양초출광혁혁(太陽初出光赫赫)

천산만수여화발(千山萬水如火發)

일륜경각상천구(一輪傾刻上天衢)

축퇴군성축퇴월(逐退群星逐退月)

 

태양이 처음 떠오르니 빛이 환하다

온 산과 온 물이 불이 붙은 듯

한 덩어리 태양이 금방 하늘로 오르니

여러 별들과 달은 쫓겨나는구나

 

이 시는 비록 압운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의미는 비범하다. 그 기세는 산하를 삼킬 듯하다.

 

여러 사람들이 좋다고 칭찬하니, 조광윤도 득의만면했다.

 

황제가 된 후에 조광윤은 정사를 보면서도 매번 이 시를 생각하면, 마음 속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그 싯구가 자랑스러웠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솜씨를 드러내고 싶었다. 옛날의 시보다 뛰어난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시를 지으려면 인연이 닿아야 하고, 느낌이 와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조광윤은 계속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해 중추절에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아주 밝았고,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시흥도 일었다. 조광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전에 <<영초일>>을 썼으니, 이번에는 달에 관해서 한번 읊어봐야겠다고.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다음 바로 앞의 두 싯구를 내뱉았다:

 

미리해저천산묵(未離海底千山墨)

재도중천만국명(才到中天萬國明)

 

아직 바다 속을 벗어나지 못했을 때는 모든 산이 어두웠고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르자 비로소 모든 나라가 밝아진다.

 

그런데, 뒤의 두 구절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조광윤은 깊이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뒷 구절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이 <<영월시(詠月詩)>>는 절반밖에 완성하지 못했고, 큰 유감으로 남았다. 그후 조광윤은 다시는 시흥이 일지 않았고, 사직과 강산을 다스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비록 일생동안 시는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조광윤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예를 들면, 그의 "늑석삼계(勒石三戒)"(즉, 太祖碑誓)가 있다. 왕부지에 따르면, "태조늑석은 전각의 가운데 두고 잠궜다. 승계자가 황제위에 즉위할 때,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읽었다. 그 계는 3가지인데, 첫째, 시씨(柴氏)자손을 보전해주라. 둘째,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 셋째, 농전의 부세를 증가시키지 말라. 오호..이 세가지를 이룬다면 성세를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

 

그는 나중에 후주의 공제 시종훈의 손에서 강산을 빼앗아 온다. 조씨집안에서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손들에게 시씨자손을 보전해주라고 했으니 이는 인자하고 후덕한 것이다. 지식인 간부를 죽이지 않고, 세금을 늘이지 않는 것도 모두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좋은 황제의 품성을 그가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조광윤이 주는 인상중 가장 깊은 것은 그의 도량이 넓다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3가지 이야기를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하루는, 조광윤이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중에 왕저라는 한림이 있었다. 원래는 후주의 신하였는데, 이때 술에 취해서, 옛주인을 생각하며, 여러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여러 신하들은 깜짝 놀랐고, 식은 땀을 흘렸다. 태조는 그러나 전혀 죄를 묻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부축해서 휴식하게 해주라고 하였다. 왕저는 나가려고 하지 않았고, 병풍의 뒤에서 대성통곡했다. 겨우겨우 좌우에서 그를 부축해서 끌어냈다. 다음 날, 어떤 사람이 왕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세종을 그리워하였으니,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러자 태조 조광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취했다. 세종때, 나는 그와 같은 조정의 신하였고, 그의 성격을 잘 안다. 그는 일개 서생이고, 옛 주인을 위하여 곡을 한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둬라." 이같은 흉금을 지니고 있는 황제가 얼마나 될 것인가?

 

또 한번은, 조광윤이 가마를 타고 출궁했는데, 대계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돌연 화살이 날아와서 황룡기를 맞추었다. 금위군은 모두 대경실색을 했다. 조광윤은 그러나 얼굴색이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나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쳐 주니 고맙군" 그러면서 금위군에게는 활쏜 자를 찾도록 하지 못하게 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또 한번은 더욱 멋있다. 송태조가 한밤중에 깨어났는데, 돌연 양간(羊肝)이 먹고 싶어졌다. 그러나 한참을 망설이기만 하고 결국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좌우에서 그에게 물어보았다: "황상께서 무슨 일이든 분부만 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할텐데, 왜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송태조가 대답했다: "내가 만일 말해버리면 매일 양 한마리씩 죽을 것이 아니냐." 그러고는 결국 꾹참고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