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버림받는 송태조 조광윤묘(趙匡胤墓)

by 중은우시 2010. 4. 26.

글: 장경위(張敬偉)

 

"하남성에 문화재가 많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가 아무리 많더라도, 송나라의 개국황제인 조광윤의 능묘를 보리밭에 버려두고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공의(鞏義)의 송릉(宋陵)을 고찰한 대학생이 내뱉은 탄식이다. 이에 대하여 매체에서 현지조사를 벌였다. 거대한 묘에는 산조수(酸棗樹)와 잡풀이 가득 자라고 있었고, 주위의 푸른 보리싹과 대비하여, 오래되고 황량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묘의 남쪽에 있는 한 석비에는 "송태조조광윤지능묘(宋太祖趙匡胤之陵墓)"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비석은 크지 않았지만, 이 곳에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모두 깜짝 놀란다. 송나라의 개국황제의 능묘가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북송의 개국황의 능묘가 이처럼 황량하다니, 정말 누구나 깜짝 놀랄 일이다. 같은 하남성에서 안양의 조조무덤이 나타나자, 지방정부에서 고고학계는 물론 전국매체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다. 몇 달이 지나서, 한 유명한 대학에서는 전국각지의 조조후손을 찾고 있다. DNA검사를 통하여 소위 조조해골이 당시의 조조인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조무덤에 대한 여론조작은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백고향을 두고는 두 나라의 네 도시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조자룡의 관적에 대하여도 한 성의 두 도시 아래에 있는 두 개의 현이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다투고 있다. 심지어 지방최고권력과 매체역량을 동원하여 맞대결도 불사할 태세이다.

 

이와 비교하면, 조광윤의 운명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만일 조조의 능에는 의문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증거가 가짜라고 얘기하고 있다면, 조광윤무덤은 확실한 진짜이다. 이백과 조자룡의 고향과 비교하자면, 공의의 북송황릉은 확실하고, 아무런 의문도 없는 역사적사실이다. 공의의 "칠제팔릉(七帝八陵)"은 정사에 기록이 있을 뿐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다. 난감한 점이라면, 진짜 황제릉은 황야에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버려져 있고, 묘앞에 세워진 석인, 석마, 길상수등은 모두 주위의 '화학공장'에서 나오는 산성비의 침식으로, 돌조각의 표면이 떨어져 나가서 제대로된 모양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한쪽에는 후하고 한쪽에는 박한 것이, 감정상의 호오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이익에 따른 선택이다. 조조무덤은 비록 가치있는 문화재가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현대인들이 그 무덤에 대거 토목공사를 벌여서,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모방건축물도 만들고 이 능묘를 가지고 문화라는 명의로 관광사업을 벌이고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백과 조자룡의 고향을 다투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고대인의 명성을 빌어서 현대도시의 명예를 높이고, 지방관리의 얼굴에 금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양은 수억의 돈을 들여서 조조릉을 포장하겠다고 하고, 이백의 고향이라고 다투는 몇 개 도시는 거액을 들여서 선전을 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며, 조조의 두 고향은 서둘러 조조의 고향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문화가 상업적인 의도에 끌려다니고 있다. 역사명인은 후대자소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이런 문화보호는 현대판의 섭공호룡(葉公好龍)이라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의 묘가 사람들이게 중시되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공의송릉은 비교적 집중되어 있어, "칠릉팔제"는 공의의 30여평방킬로미터의 토지위에 분포되어 있다. 드물어야 귀한 법인데, 송나라황릉은 너무 많다. 그리고 조조무덤의 '칠십이의총'과 같은 역사적 미스테리도 없다.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고학적인 꺼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북송황릉의 명운은 기구했다. 북송일대에 금나라병사들에게 도굴당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1126년, 금나라의 대장 점한(粘罕)이 공의를 점령한다. 개인적으로 병사를 이끌고 송나라의 여러 황릉을 도굴한다. 정강지변으로 휘종, 흠종 두 황제가 금나라병사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공의의 송나라황릉은 모조리 파괴된다. 이에 대하여 남송초기 한호가 편찬한 <<간천일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소흥 무진(1148년), 태상소경 방정석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능침을 찾아갔는데, 여러 능이 모두 발굴되었고, 철종은 뼈가 드러나 있었다. 방정석이 옷을 벗어 유골을 쌌다." 이같은 일을 당하다보니, 현재의 공의에 있는 송나라 황릉은 묘혈이 존재하지 않는다. 배장문물도 모조리 역사에 묻혀버렸다. 남은 것은 겨우 돌로 만든 조각상들 뿐이다. 이들은 현대인들이 보기에 별다른 가치가 없다. 현지정부가 별달리 신경쓰지 않는 것도 이해는 된다.

 

조광윤의 무덤의 비애, '칠제팔릉'의 비애는 당시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며, 현재는 후세인들로부터 중시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북송황릉의 처지는 역사의 비극일 뿐아니라, 현대인의 비애이다. 역사의 비극은 만회할 방법이 없지만, 현대인의 비애는 회피할 수가 있다. 한편으로, 역사인물을 들여다보면, 현대인들은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인 전승을 존중하는 것이 된다. 절대로 이익에 따라 고의로 오도해서는 안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역사문화유적에 대하여, 원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버려두고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투자에 인색하지 않고 옛것을 옛것대로 정성껏 보존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논쟁이 있는 고고학적 유물에 대하여, 간단하게 대거 토목공사를 벌여서 역사를 오도하지 않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역사문화는 공리주의의 침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대인물에 대하여 현대인들이 마음대로 취사선택하고, 필요한 사람만 골라쓰는 실용주의는 더이상 없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