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휘(秀輝)
사람들은 자주 전국칠웅(戰國七雄)을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중국대륙에는 한위조제진연초(韓魏趙齊秦燕楚)의 일곱 나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양(濮陽) 일대에는 '위(衛)'라는 제후국이 칠웅의 혼전중에도 구차한 목숨을 연장해가고 있었다. 위나라는 어떤 때는 조(趙)나라의 속국이 되고, 어떤 때는 위(魏)나라의 속국이 도고, 마지막에는 진(秦)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아마도 역대 진나라 왕들은 상앙(商鞅, 위나라출신)의 변법으로 인해 진나라가 강성하게 된 데대하여 감사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위나라가 약소하여 진, 위(魏), 조조차 굳이 멸망시키려고 하지 않아서인지, 위나라는 이 난세에 이 위나라라는 담장위의 갈대는 아무리 두들겨맞아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도 여전히 멸망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위나라의 역대 군주의 성공적인 '해바라기'전략은 약소한 위나라가 주나라 천자가 천하를 분봉한 후에 목숨을 가장 오래 부지한 제후국이 되도록 만든다.
필자는 위나라를 '약소국'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위나라도 한때 휘황한 역사가 있었다. 위나라가 제후국들 중에서 일류국가가 된 적은 없지만, 위나라도 한때 이류국가중에서는 아주 뛰어났었다. 위나라의 시조는 주공단(周公旦)이 삼감(三監)의 난을 평정할 때부터 시작된다. 주문왕의 아들이며, 주무왕과 주공단의 동생인 강숙봉(康叔封, 성은 姬임)는 위나라제후로 봉해진다. 수도는 은,상나라의 고도인 조가(朝歌)이며, 은,상의 유민을 통치했고, 급은 후작(侯爵)이었다. 이를 보면, 주무왕과 주공단은 이 동생을 신임하고 돌봐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작이라는 고급제후국의 작위를 주었을 뿐아니라, 은,상의 고도일대라는 비옥한 영토까지 내려주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서주시대에 지위가 아주 높았다. 비록 위나라의 역대군주들 중에서 패주가 된 사람은 없지만, 위나라는 주왕실과 특수한 관계가 있어, 위나라는 시종 이류제후국가들 중에서는 뛰어났었다.
주평왕의 동천(東遷)후, 위나라는 주천자가 견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공작(公爵)국으로 승격된다. 위무공(衛武公)은 위나라의 최전성기를 연다. 알아야 할 것은, 당시 중국은 황제라는 수퍼군주의 직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왕이면 가장 큰 군주이다. 이는 주나라 천자만 쓸 수 있는 직함이다. (비록 초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子爵國일 뿐이다). 공작국은 바로 위나라의 사회적 지위가 주나라천자에 바로 다음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까지, 위나라는 전체 서주시대와 동주초기까지 국운이 형통했고, 제후국가들 중에서는 잘나가는 편이었다.
아쉽게도 성극필쇠(盛極必衰)인 법이다. 군주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위나라는 여러번 치명적인 내란이 발발한다. 이리하여 위나라는 잘나가던 나라에서 엉망인 나라로 바뀌게 된다. 위나라의 쇠락은 '주우지란(州吁之亂)'부터이다. 위환공(衛桓公)의 동생인 주우는 정(鄭)나라의 공숙단(共叔段)과 결탁하여 위환공을 죽이고 위나라의 새로운 군주에 오른다. 그러나 곧이어 신하들에게 피살당한다. 이번 '주우의 난'은 위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나라가 쇠락하는 전환점이 된다.
주우가 나쁜 선례를 남긴 후, 위나라의 군주시해전통은 계속하여 이어졌다. 혜공, 성공, 헌공, 출공의 여러 대에 모두 군주와 친족간의 내분이 있었고, 여기에 강대한 진(晋)나라가 위나라를 침략한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내우외환중에 이류국가에서 삼류국가, 급기야 사류국가로 전락한다. 국가가 약화됨에 따라, 위나라는 조가에서 초구(楚丘)로 쫓겨난다. 그리고 다시 초구에서 지금의 복양으로 쫓겨난다. 국토는 계속 줄어들고, 급도 계속 하락했다. 위성후(衛成侯)는 스르로의 신세가 참담하다고 여겨 스스로 '후작'으로 내린다. 위국은 공작국에서 후작국으로 등급이 떨어지게 된다.
나중에 위나라는 다시 진나라에 의하여 복양에서 쫓겨나, 작은 도시인 야왕(野王)까지 밀려난다. 군주의 명호도 '후작'에서 더욱 낮은 '군(君)'으로 내려간다. 이제는 '후'도 아닌 것이다. 위나라의 마지막 군주는 위각(衛角)이라고 한다. 이때는 이미 진나라의 부용국(附庸國)으로 거의 상징적인 수준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한 후에도 왜 도시 하나를 가진 위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았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진왕 영정(진시황)의 마음이 너무 인자해서인지, 아니면 위나라의 외교전략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일까.
위나라의 해바라기성 외교사는 진문공이 패자가 된 때부터 시작한다. 위나라는 시종일관 힘든 나날을 견뎌왔다. 나중에 위,조,한의 3나라로 진(晋)이 갈라지고 난 후에도 위나라는 여전히 조, 위(魏)의 두 나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한때는 위왕이 위나라의 군주를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위나라의 군주는 비굴하지만, 아침에는 위나라를 모시고 저녁에는 조나라를 모시는 식으로 누구의 힘이 더 세면 그의 말을 들었다. 이런 전국칠웅이 경멸하는 외교전략으로 위나라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잇었다. 육국이 앞뒤로 진나라에 멸망당했는데도 위나라의 군주는 야왕에서 여전히 왕으로 지냈다. 위나라의 종묘사직도 여전히 위나라자손의 제사를 받고 있었다. 약한 위나라가 성공적으로 해바라기전략을 추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감탄할만한 일이다. 상나라의 수도 조가도 버리고, 초구로 간다; 네가 초구도 필요하냐? 좋다 나는 다시 복양으로 가면 되지 뭐; 진왕이 복양까지 달라고 하자, 좋다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성 야왕 하나만 남겨달라고 요구한다. 공작의 칭호는 너무 주목을 받으니, 스스로 후작으로 낮춘다. 나중에는 후작마저도 버리고 '군'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약국 위나라가 생존한 비결이다. 당시 육국의 제왕중 누가 자신의 나라가 약하디 약한 위나라보다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잔혹한 진시황도 죽을 때까지 위나라에는 손을 쓰지 않았다. 위나라는 성공적으로 전국칠웅들이 자신을 무시하도록 만듦으로서, 멸망의 액운을 피해갈 수 있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에 진이세가 비로소 위나라의 마지막 군주 위각을 서민으로 만들고, 위나라를 멸망시킨다. 위나라도 한때는 잘 나갔고, 그 이후에는 여러 사람에게 당해왔다. 그러나 위나라의 역대 군주들은 해바라기외교를 통해서, 위나라를 주무왕이 분봉한 제후국중에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나라로 만들었다. 이는 중국고대사상 하나의 기적이다. 위나라의 역사는 무엇이 사는게 죽은 것만 못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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