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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군 잔여부대의 남미전투기

by 중은우시 2011. 1. 16.

글: 문적주간(文摘週刊)

 

1860년 시왕(侍王) 이세현(李世賢)이 이끄는 태평군은 비록 복건(福建)에서 여러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서방열강과 청나라군의 연합작전하에 실패로 끝이 난다. 그러나, 태평군의 잔여인원은 여전히 수만명이었지만, 남아서 계속 청나라에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사방이 모두 청나라병사이고, 바다에는 모두 서양열강의 군함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돼지새끼처럼 외국으로 팔려가서 '계약광부'가 되는 길이었다. 태평군의 잔여인원 약 3만여명응 이 유일한 생로를 선택한다.

 

1862년, 1만여명의 태평군 잔여인원은 그들의 일가친척과 함께 남미 페루의 이키케로 가서 새똥과 초석을 파는 광부로 살아가게 된다. 광산주는 그들을 자주 욕하고 때렸다. 그리고 먹을 거리도 돼지취급을 하였다. 매일 14시간이상씩 일을 했는데 일은 고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여러번 반항을 시도했지만, 사방이 모두 실탄을 장전한 서양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죽을 것이 겁이나서, 그저 묵묵히 참고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병사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갔다.

 

1866년,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간에 초석전쟁이 벌어진다. 1만의 태평군 잔여인원은 마침내 희망을 찾았다. 그들은 칠레 군대를 해방자로 보았다. 1867년 3월, 이키케의 태평군이 의거를 일으켜, 광산감독 시거스를 죽이고, 초석광산의 무기를 탈취한다. 그리고 진압하러 온 페루군대와 격전을 벌여, 페루의 중령 2명을 죽이고, 2백의 인디안용병도 획득한다. 의거를 일으킨 자들은 호남사람 옹덕용(翁德容)과 광동사람 진영록(陳永碌)을 우두머리로 추대한다. 그리고 태평군의 원래 편제대로 재편하고, 포로가 된 인디안용병과 브라질인 1명을 칠레군대의 사령관인 시라피조 소장에게 보낸다. 그리고 칠레를 도와서 페루와 볼리비아군대를 상대하겠다고 제안한다. 시라피조 소장은 크게 기뻐하면서 소위 1명을 변장시켜 의거부대가 주둔하는 이키케 광산지역으로 파견한다. 그는 칠레 대통령의 친필서신도 가지고 가서, 태평군의 장병과 가족들에게 칠레국적을 부여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이키케를 태평군과 그 가족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시피라조 소장은 옹덕용을 소령으로, 진영록은 대위로 임명한다. 그리고 태평군무장세력을 칠레제6변경종대 '갈의군'으로 재편한다. 그들로 하여금 칠레군을 도와 페루의 타라파카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며, 모크조를 점령하여, 칠레군이 이키케시를 점령할 수 있도록 길을 열게 한다.

 

1868년, 태평군은 칠레군대의 요구에 따라 군사행동에 들어간다. 그들은 칠레군사고문의 요구대로 서방식 편제를 하지 않고, 태평군의 방식으로 두개 군으로 나누고, 사수(師帥), 여수(旅帥), 양사마(兩司馬)등 태평군의 관직을 둔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무기가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지 자원을 이용하여 태평도와 같은 무기를 만든다. 이렇게 하여 6월에는 타크나 페루군 후방을 공격하는 행동을 벌이게 된다. 500명의 태평군은 현지의 인디안으로 변장하여 보네이다 요새에 잠입한다. 그리고 일거에 페루군인 300명과 요새사령관을 포로로 잡는다. 곧이어 그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볼리비아군대와 격전을 벌인다. 그들의 선봉 300명은 볼리비아 기병을 한 숲속으로 유인한 후, 습격을 한다. 이렇게 하여 70명의 볼리비아군인을 살상한다. 곧이어 약 1000명의 태평군은 머리에 황색과 홍색의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갈색옷을 입고, 각종무기를 휘두르며 볼리비아군대로 치고 들어가 대거 살상을 감행한다. 볼리비아군의 4000명중 2000여명은 인디안용병이었는데, 그들의 무기는 십나노(十字弩)뿐이었다. 아예 태평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곧 볼리비아군이 속속 패퇴하고, 시신 백여구를 남긴다. 약 1000명이 인디안용병은 투항을 했다. 태평군이 이번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가 아주 많았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보네이다 요새기습전투이다.

 

1869년 칠레군이 안타화가스타항구에 상륙하게 하기 위하여, 태평군은 진영록의 지휘하에 모그조에서 다시 페루-볼리비아연합군과 격전을 벌인다. 그들은 여전히 태평군의 전형적인 작전방식을 사용하여 적군을 습격권내로 유인하였다.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적군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볼리비아군의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이들 머리에 두건을 쓴 갈색의 사람들은 사정거리바깥에서 깃발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전쟁때 징과 괭과리를 두드려 아주 시끄러웠다. 많은 인디안용병들은 습격이 있는 줄 알고 도망치기 바빴다. 장교들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태평군이 잘 쓰는 심리전이다. 태평군의 군사행동으로 페루와 볼리비아군대가 견제를 받는 동안에 아예 안타화가스타항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리하여 칠레군은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고, 손실도 경미했다.

 

제2차 모크조전투에서 태평군은 마침내 칠레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를 벌인다. 시라피조 소장(당시 이미 중장으로 승진)은 진영록을 접견하고, 옹덕옹이 이미 2달전에 병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진영록에게 대령의 계급을 내리고, 그의 군대도 참관한다. 그가 당시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 군대는 서방군대의 기율은 없다. 다만 독특한 중국특색의 기율이 있었다. 그들은 많은 삼각형의 깃발을 준비하고, 나팔로 군호를 대신하고, 그들의 전사들은 각종 무기를 들고 있으며, 동방식의 두 개의 단도(태평도)를 사용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진영록은 삼각기에 쓰여진 '태평(太平)'이라는 글자를 칠레국휘로 바꾸게 된다.

 

모크조전투에서 태평군은 희생을 겁내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다. 그리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군이 참패한다. 그날 페루-볼리비아연합군을 지휘했던 사령관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전쟁터의 곳곳에는 태평군에 죽임을 당하는 페루-볼리비아연합군의 모습이 보였다. 내평군도 400명이 사망한다. 그들은 4개의 대포와 15개의 군기, 대량의 군수물자와 200여필의 전마를 획득한다. 시피라조는 진영록에 칠레국회훈장을 부여하고, 사망한 태평군의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했다. 곧이어 태평군은 다시 타크나와 아리카의 두 번의 전투에서 칠레군대를 도와 페루-볼리비아연합군을 격파한다. 이리하여 칠레군대는 페루-볼리비아 두 나라의 태평양연안의 초석기지를 모조리 차지하게 된다. 볼리비아는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잃었고, 실질적으로 전쟁에서 빠지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칠레정부는 이키케를 태평군의 잔여인원들에게 넘겨주어 자치도시를 건설하도록 허용하겠다고 한다. 다만, 조건은 칠레를 도와서 계속 페루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태평군은 이국타향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아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현지사회에 흡수되는 길을 선택한다. 지금도 이키케 현지의 인구중 1/4은 중국계라고 한다. 그곳의 음식문화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현지에서 중국식당은 '치파'라고 부르는데 이는 광동어로 '식사를 한다'는 뜻이다. 훈둔은 '완단'이라고 하는데 이는 절강어의 훈둔이다.

 

1881년 1월 17일 칠레군대는페루의 수도 리마를 점령한다. 1883년 10월 20일, 페루와 칠레는 리마 북부의 안콘시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태평양전쟁을 끝낸다. 안콘조약에 따라, 페루는 타라파카주를 칠레에 할양한다. 타크나와 아리카의 두 지역은 칠레에 넘겨주어 10년간 관할하게 한다. 볼리비아는 1884년과 1904년에 칠레와 와르파라이소협정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