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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과 객가(客家)

by 중은우시 2010. 9. 3.

글: 도단방(陶短房)

 

인민영웅기념비의 한백옥부조(漢白玉浮雕)의 두번째 것이 바로 '금전기의(金田起義)"이다. 그 안에 그려진 것은 "금전(金田)의 각 민족군중이 떨쳐일어나 태평군의거에 참가했다"는 화면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전기의가 발발한 1850년에, 금전촌에는 소수민족은 한 집도 살고 있지 않았다.

 

왕경성, 가문남 선행이 1978년, 1980년에 두번 금전을 방문하여 얻은 자료에 따르면, 금전촌은 최초에 확실히 요족(瑤族) 부락이었다. 그러나 북송 인종연간에 적청(狄靑)이 농지고(智高)를 토벌하면서, 한족들이 대량으로 이주해들어오기 시작하다. 금전촌에 기록된 최초의 시조는 하관룡(何官龍)이다. 그는 적청을 따라 광서로 왔고, 나중에 광서에 남아서 개간을 한 절강출신의 군인이다. 하씨는 아들이 없었다. 그의 부하인 사(謝)씨성의 인물이 데릴사위로 들어온다. 나중에 그는 원래의 성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하여 금전촌에서 가장 최초이자 최대의 가족은 사씨성이 된다. 금전기의당시에 사씨는 약 300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두번째로 큰 가족은 황(黃)씨들이다. 조상은 광동 고요이고, 청나라 강희 연간에 '삼번의 난' 이후 이주해 온 것이다.; 위(韋)씨는 세번째로 큰 가족이다. 그들은 명나라말기에 금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외부에서 온 객가족이다. 금전기의때, 황, 위, 두 성씨는 모두 100여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의거후 위씨일족들은 모조리 태평군을 따라 원정에 나서다. 한 집안도 남아있지 않는다. 나중에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한 후, 안휘 선성에 정착한 위준(韋俊)의 후손들이 고향으로 성묘를 온 적은 있지만, 금전으로 이주해오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위씨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이주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건국전에, 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중 위창휘(韋昌輝)가 장족(壯族)이라는 것도 있다. 광서통지관은 당시에 이렇게 선전했다. 건국후 광서에서 태평천국문사조사단을 조직하여 금전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위창휘는 장족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리하여 한때는 이 주장이 공식문서에 당당히 기록되기도 하였고, '태평천국운동은 다민족의 반제반봉건의거'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증거는 문제가 있다. 최초에 '장족설'을 취했던 나이강(羅爾綱) 선생도 1942년에 <<위씨종보>>를 보니, 그 안에 위씨는 확실히 객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장족설'이라는 근거는 위창휘가 장족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경성등이 고찰했을 때 발견한 바에 따르면, 광서의 다민족 산지에서는 가족중에 소수민족친척이 있어 소수민족언어를 할 줄 아는 객가인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 위씨가 장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론이 불충분했다. 족보나 현지에 전해지는 말등이 더욱 믿을만하다.

 

일찌기 '소수민족지도자'로 알려진 사람은 여럿이다. 태평천국지도자중 양수청(楊秀淸)은 묘족(苗族)이라고 일컬어지고, 담소광은 요족이라고 일컬어지고, 노육은 장족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양수청은 나중에 조상이 광동 가응주(광동 매주)에서 온 객가인이라고 밝혀졌고, 담소광은 담씨가보에 의하여 광동 남해리 수촌 흥의방에서 왔고, 강희연간에 5대조 담기가 광동에서 광서 평남현으로 이주해왔으며, 객가인이라고 밝혀진다. 일찌기 '장족혁명열사'로 일컬어지던 노육은 현지인의 회고에 따르면, '금전에서 온 객가말을 할 줄아는 객가인'이라는 것이다. 윗대때 자형산 고항충의 데릴사위로 왔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풍운산의 계평현 아문에서 소송할 때의 소송서류에 따르면, 풍운산은 노육을 '사촌형'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사촌형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노육이 장족이었다면 광동 객가인출신인 풍운산이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태평군의 핵심수뇌는 모조리 객가인이라는 것이다.

 

홍수전의 시조는 북송의 명신 홍매(洪邁)로, 강서 상요에서 광동 화현까지 흘러들어간 객가이다; 상제회의 창시자인 풍운산은 광동 객가이다; 석달개도 객가인으로, 조적은 광동 화평현이다; 진일강은 귀현의 객가인이다; 호이광은 조적이 강서 임강으로, 유명한 객가의 거족이다. 이들 이외에 임봉상은 광동 게양사람이고, 몽득은, 이수성, 진옥성, 황문금, 황옥곤, 종방례, 뇌문광....등등 초기의 행적을 고증할 수 있는 태평천국의 우두머리들은 모조리 객가인이다. 이외에 상제회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곡 왕씨, 대충 증씨도 모조리 객가인이다. 태평천국의 초시 7왕(王)중에서 소조귀(蕭朝貴)의 민족이 불명확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광서 혹은 광동의 객가인들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최초의 조직자인 풍운산은 혼자서 광서의 산지로 들어간다. 그는 객가인이다. 객가말을 할 줄 안다. 그러므로 처음에 접촉하고 의지했던 사람은 거의 모두 객가인들인 것이다. 그는 글선생을 하고 일을 했는데, 그를 고용한 사람은 모조리 객가인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해서, 그가 자리잡도록 해준 고림사 증씨집안도 객가이다. 그가 상제회를 만들 때 의지한 노육, 증운정등도 모두 객가이다. 고향을 떠나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종족이라는 당시의 습관에 따르면, 초기의 핵심인물이 모조리 객가라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태평천국은 종교색채의 운동이다. 광서는 토착종교가 발달하고, 온갖 신선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들 신선은 많은 경우 '토신선(土神仙)'이라고 불린다. 객가인들은 왕왕 배척받고, 종교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상제교는 '참사유정(斬邪留正)', '제사신(除邪神)'등의 구호를 내세웠는데, 객관적으로 말하면 소수민족의 '토신선'을 타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객가인들은 안위와 의지가 되었다. 홍수전이 금전, 자형과 평남 등지에서, 장족의 유삼저묘, 다민족혼함신앙의 감왕묘, 묘족의 반왕묘를 깨부수고 낯선 상제로 이를 대체하려 했다. 이는 확실히 객가인들의 호응과 공명을 얻어낼 수 있었다.

 

상제교가 전파된 지역은 대부분 막 개간된 산촌, 광구이다. 이들 지방은 객가인들이 어쩔 수 없이 쫓겨와서 개간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힘들게 일하면서 고생을 하고 있었고, 자기 집안에 더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온 집안을 이끌고 태평천국의 난에 가담하는 모험행위를 할 수 있었다. 객가의 부녀들은 원래부터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들이고 모두 전족을 하지 않았다. 의거후에 고향을 떠나는데 별다른 부담이 없었다.

 

홍수전 등은 내평천국을 객가인왕국으로 만들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왕장차형친이친목공증복음서>>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일찌기 홍세만이라는 신도에게 준 부채에 쓴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진주위왕사사공(眞主爲王事事公), 객가본지총상동(客家本地總相同)". 소조귀는 계평, 귀현 등지의 객가인과 토착 한족, 묘족, 장족이 민족갈등으로 싸움을 벌이고 그 싸움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을 때, '천형'의 말을 빌려 싸움에 신경쓰지 말라고 말한다. 이 싸움은 '요마가 요마를 죽이는(妖殺妖)'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발전은 왕왕 사람들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다. 투쟁에서 패한 객가이들은 속속 금전으로 투신하고, 소수민족과 토착한인들로 이루어진 "장용묘련(壯勇苗練)"은 태평천국초기에 광서 경내에서 가장 완간항 적(敵)중 하나가 된다.

 

당연히 많은 객가인들은 태평천국에 반대하는 편에 섰따. 예를 들어 최초로 풍운산을 체포하고 나중에 상제회에 놀라서 깊은 산으로 도망쳐 병사했다고 하는 왕작신, 왕대작 형제는 바로 청나라 건륭연간에 이주해온 객가이다. 이수성의 주장에 따르면, 지식이 있고 돈이 있는 객가인들중에서 상제회나 금전기의에 참가한 사람은 적다고 한다. 돈이 있던 증씨십안은 비록 상제회에는 참가했으나, 대부분은 금전기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평천국을 간단히 '객가왕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소수민족이 태평천국과는 절연하였는가? 그것도 아니다.

 

위창휘, 석달개의 모계는 장족혈통이 있다. 천경, 소주를 방문했던 외국인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적지 않은 고급장수의 호위대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묘족청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태평천국이 일어난 근본원인은 경제가 붕괴되고 관료통치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객가인들이나 다른 토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태평천국의 의거가 일어날 때, 동시에 같은 지역안에서 소수민족의 의거도 같이 일어난다. 장족의 이문채, 황정봉, 요족의 뇌재호 등이 그들이다. 이들 의거의 참여자들중 일부는 실패후 태평천국에 가담한다. 일부는 석달개가 광서로 돌아올 때까지 끝까지 따른다. 예를 들어 황정봉은 태평군 익전의 예부대중승 주봉기를 군사로 삼았다. 이문체는 직접 석달개 부대에 가입하여, 태평천국 친천연에 임명되고, 그의 민족혼성부대는 1872년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이때는 이미 천경이 함락된지 8년이 지난 후였다. 태평천국은 객가인을 핵심으로 하여 시작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싸운 사람은 소수민족 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