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단방(陶短房)
명나라말기 섬서의 농민의거를 보면, 최초의 두령들은 거의 모두 가명을 썼다. 무슨 점등자(點燈子), 부점니(不霑泥), 사탑천(射塌天), 혁리안(革裏眼)등 각양각색이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들이 비록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처자식은 여전히 고향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과 이름을 숨기는 것은 가족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태평군은 가족들이 모두 군대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천무, 천형(天父, 天兄)이 반드시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그들은 선배들 처럼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따위의 일은 벌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태평천국의 사람들은 위로는 홍수전부터 아래로는 보통병사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고치는 것이 유행이었다.
홍수전의 이름은 그의 아들에 따르면, 하늘이 내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홍인곤(洪仁坤)이고 자는 화수(火秀)이다 전도를 시작했을 때 천부의 뜻에 따라 홍수전으로 개명한다. 이것은 바로 상제의 이름이 “야화화(爺火華, 여호와)”이기 때문에, ‘화(火)’자를 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뿐아니라, 홍수전이라는 이름을 탁자(拆字)하면 여러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중에 금전의거때, 상제도 탁자게임을 즐기 바 있다. 그리하여, “삼성고조일출천(三星高照日出天)”이니, “삼팔입일(三八廿一), 화내옥식(禾乃玉食), 인좌일토(人坐一土), 작이민극(作爾民極)”이라는 얘기를 만들어냈다.
‘삼팔입일’의 ‘입’은 ‘이십’이라는 뜻이다. 삼(三), 팔(八), 이십(十, 十), 일(一)은 바로 ‘홍(洪)’자를 파자한 것이다.
‘화내옥식’의 화내(禾乃)는 수(秀)자를 파자한 것이다.
‘인좌일토;의 인(人), 일(一), 토(土)는 전(全)자를 파자하 것이다.
결국, 홍수전이 ‘그대 백성들의 가장 높은 자리’ 즉 황제에 오른다는 뜻이다.
이 방식은 아주 유용했다. 홍수전은 마지막까지 매일 귀찮아하지도 않고, 이런 글자를 가지고 새로운 수수께끼를 만들어내곤 했다.
홍수전은 이름을 하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상제는 그에게 이름을 바꾸도록 하면서 당부했다. 어떤 때는 ‘홍수’라고 부르고, 어떤 때는 ‘홍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청나라측의 조사를 회피하기 위함이다. 나중에 천왕이 되었을 때는 홍일(洪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바로 태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수전의 심복부하, 대장들 중에서도 이름을 바꾼 사람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북왕 위창휘(韋昌輝)와 동생 위지준(韋志俊)의 원래 이름은 위정(韋正), 위준(韋俊)이었다; 대장 이내방(李來芳)의 원래 이름은 이개방(李開芳)이었다; 명의 이준량(李俊良)의 본명은 이준창(李俊昌)이었다; 영왕 진옥성(陳玉成)은 원래 진비성(陳丕成); 답천예 설지원(薛之元)의 본명은 설소(薛小)였다.
그중 어떤 사람은 한번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충왕 이수성(李秀成)은 원래 이이문(李以文)이었는데 수성(壽成)으로 바꾸었다가, 최종적으로 이수성으로 바꾼 것이다; 찬왕 몽득은(蒙得恩)은 원래 이름이 몽상승(蒙上昇)이었는데, 득천(得天)으로 개명했다가 나중에 득은으로 다시 개명한다; 주왕 뇌세취(賴世就)는 본명이 뇌구(賴九)인데 세국(世國)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세취로 바꾼다.
태평천국에는 왜 개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그들이 개명하는데에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일까?
가장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피휘(避諱)’이다.
봉건시대에는 ‘피휘’가 있었는데, 제왕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름이 두 글자이면, 두 글자를 연이어서 쓸 수는 없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피휘에 대한 애호는 불가사의한 지경에 이른다. 천부,천형의 이름, 홍수전 부자 및 동사남북익의 오왕의 이름을 모두 피휘해야 했다. 그리고 보기 좋지 않은 글자들 예를 들어 축(丑), 해(亥, 해치다의 害와 발음이 같음)등도 쓸 수가 없었다. ‘왕(王)’, 주(主)‘등과 같이 위엄을 나타내는 글자도 쓸 수가 없다. 이렇게 하다보니 성(姓)들도 부득이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왕(王)씨는 중국내에서 세손가락안에 드는 대성이고, 홍수전의 사촌형의 집안도 왕씨집안인데, ‘왕’이라는 글자를 쓸 수 없게 함에 다라, 왕씨는 모조리 성을 바꾸어 왕(汪) 혹은 황(黃)으로 하였다. 태평천국의 경내에서는 왕씨성을 가진 자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홍수전은 일반 백성들이 ‘홍’씨성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안휘사람 홍용해(洪容海)가 태평천국에 가담하여 첫번째로 한 일은 바로 자신의 성을 ‘동(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하는데, 그때 첫번째로 한 일도 바로 자신의 성을 원래대로 회복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뇌세국이 뇌세취로 바꾸게 된 것이나 몽득천이 몽득은으로 바꾸게 된 것도 바로 ‘국’ ‘천’과 같은 글자를 피휘하기 위함이다. 이준창이 이준량으로 바꾼 것은 바로 북왕 위창휘 때문이다. 이개방이 이래방으로 바꾼 것은 바로 익왕의 이름이 석달개(石達開)였기 때문이다.
몽득은의 몇 차례의 개명을 보면, 처음에는 상제(上帝)때문에 ‘상승’을 ‘득천’으로 바꾸었다. 그후에 ‘황천’의 천자 때문에 다시 ‘득은’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태평천국의 피휘문화는 점점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일도 있다. 후기에 천경의 난이 일어나고 석달개가 떠나면서, 창, 개와 같은 원래 피휘되던 글자는 해금되었다. 그리하여 이준창, 이개방등은 본명을 회복하게 된다. 홍수전의 아들인 홍천증(洪天曾)이 태어나면서 ‘증(曾)’씨성의 장수 증천호, 증천양, 증수원등은 할 수 없이 영(永)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바꾼 것이다.
태평천국은 하층에서 일어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불리는 이름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천지회 출신의 나아왕(羅亞旺), 철장(鐵匠)출신의 뇌구, 좀도둑출신의 설소, 소금밀매업자출신의 손취(孫臭. 나중에 孫魁文으로 개명함)는 나중에 고급관리가 된 후에 그에 걸맞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고쳤다. 어떤 사람은 이름이 있기는 하나 별로 좋지않다고 생각하여 바꾼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이문이 이수성을 바꾼 것은 개략 이런 사례라고 할 것이다.
많은 왕조의 황제들은 사성(賜姓), 사명(賜名)을 좋아했다. 홍수전도 예외는 아니다. 진비성이 진옥성이 된 것이나, 이수성(李壽成)이 이수성(李秀成)이 된 것은 바로 그의 걸작이다. 특히 이수성의 ‘수(秀)’는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글자이다. 원래 양수청(楊秀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쓸 수 없는 글자였다. 이는 천하인들에게 이수성을 특별히 중시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태평천국은 초기에 결혼을 금지했고, 기혼남녀도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고독한 장수들은 곳곳에서 아이들을 얻어서 의제(義弟)나 양자로 삼았다. 일부 식구가 단촐한 장수들 예를 들어 양수청 같은 경우는 이런 방식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이렇게 하여 개명한 인물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보왕 양보청(楊輔淸)등 10여명은 모두 명의상으로 양수청의 동생들이다. 사실 이들은 양수청이 양씨성을 준 핵심장수들인 것이다. 양보청의 원래 이름은 양금생(楊金生)인데, 나중에 양수청을 의형으로 모시면서 이름도 자연히 ‘양O청’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이들 양자, 의제들 중에는 원래 같은 성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비왕 전계인의 의제인 전수인은 본명이 주수창이다. 성과 이름을 한꺼번에 바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원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이 외자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왕망은 두자 이름은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전국에 모두 외자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을 내린다(그 영향으로 동한 및 삼국시대의 인물들이 모두 외자이다). 흉노족 선우까지도 1글자의 이름으로 고칠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천년이 흐른 후에 태평천국은 두 글자 이름이 제대로 된 이름이고, 외자 이름은 안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원래 외자였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두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위정, 위준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일찍이 삼원리 항영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는 천지회의 노장 주춘(周春)은 태평천국에 들어온 후 주춘지(周春之)로 개명한다. 염군의 수령인 공득(龔得), 장룡(張龍)은 태평천국에서 공득수(龔得樹), 장원륭(張元隆)이 된다.
고위장수만 이러한 것이 아니다. 하급병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하급병졸들도 피휘를 해야했지만, 어떤 경우는 자신조차도 자신의 이름이 바뀐 줄을 모르는 경우까지 있었다. 예를 들어, 상주태평군의 병사중에 용각(龍角)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용’은 쓸 수 없는 글자였다. 그리하여 그를 명부에 올릴 때는 융곽(隆郭)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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