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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동가(東哥): 9번 시집가고 4개부를 멸망시킨 만주미녀

by 중은우시 2011. 1. 16.

글: 봉상(鳳翔)

 

동가(東哥)라는 이름의 미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전부 부르면 '예허나라 부시야마라(葉赫那拉. 布喜瑪拉)'이다. 그녀는 여진족 예허부(葉赫部)(지금의 길림성 사평시, 예허, 휘파, 우라, 하다는 여진족의 한 갈래인 해서여진 4부이다)의 공주였다.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겁내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겁낸다는 말이 있다. 동가는 어려서부터 미인으로 사방에 이름을 떨쳤고, 많은 영웅호걸들이 그녀에게 구혼했다.

 

첫번째 혼인: 하다부(哈達部)의 수령 다이산(垈善)이 그녀를 위하여 죽었고, 하다부는 쇠락한다.

 

1591년, 동가는 9살이었다. 여진 하다부의 패륵 다이산이 앞장서서 동가에게 구혼한다. 동가의 부친은 마침 그를 멸망시키고 싶어해서, 동가를 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응락한다. 그리고 그가 친히 영친(迎親)에 나섰다. 참새를 어떻게 잡는지 아는가? 곡물을 바닥에 뿌려놓고, 체를 세워 놓는다. 참새가 와서 곡물을 먹으면 체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다이산은 물론 참새보다 똑똑하다. 그러나, 참새와 마찬가지의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기쁨에 겨워서 달려온다. 그리고 동가의 부친이 쳐놓은 덫에 걸려버린다. 그는 복병에 당하여 죽고 만다. 이 사건을 겪고나서 하다부는 내분이 일어나고 세력이 점점 쇠락하게 된다.

 

두번째 혼인: 우라부(烏拉部)의 수령 부잔타이(布占泰)가 포로로 잡히고, 우라부는 속국이 된다.

 

이때 우라부가 굴기했다. 패륵인 부잔타이는 전투에 능했다. 누르하치가 통치하는 건주여진도 날로 강대해졌다. 예허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둘간의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노리고자 한다. 동가의 부친은 다시 미끼를 뿌린다. 동가를 부잔타이에게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부잔타이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장인의 지시에 따라, 우라의 병사를 이끌고 구부연합군의 건주여진공격에 가담한다. 그 결과 전투에서 패하여 누르하치의 포로가 되고, 3년간 포로생활을 한다. 누르하치는 정치를 잘 알아서, 부잔타이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조카딸을 그에게 시지보낸다. 그러나, 부잔타이는 여전히 동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세번째 혼인: 동가가 결혼을 거부하여 누르하치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다.

 

9부연합군이 건주여진을 공격할 때, 동가의 부친은 누르하치에게 죽임을 당한다. 누르하치는 동가부친의 허리를 잘라서 상반신은 예허부에 돌려보낸다. 동가의 오빠인 부양구(布揚古)는 부족이 멸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동가를 누르하치에 시집보내기로 약속한다. 누르하치는 기뻤다. 그러나, 동가는 죽어도 누르하치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나의 부친을 죽인 원수이다. 누구든지 그를 죽인다면,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다." 부양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고모를 동가를 대신하여 누르하치에 시집보낸다.

 

네번째 혼인: 하다부의 수령 멍거부루(孟格布祿)는 망명하고 하다부는 멸망한다.

 

1599년 5월, 예허부는 하다부를 공격한다. 하다부의 패륵 멍거부루는 저항할 힘이 없어 세 아들을 건주여진에 인질로 보내고, 누르하치에 병력지원을 요청한다. 누르하치는 2천의 병력을 보낸다. 예허부는 깜짝 놀라서 다시 미끼를 던진다. 멍거부루에게 만일 건주여진에 인질을 보내는 것을 취소하고, 건주의 병사를 죽인다면, 동가를 그에게 시집보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멍거부루는 여색에 눈이 어두워 즉시 누르하치에 선전포고를 한다. 누르하치는 하다성을 함락시키고 멍거부루를 생포한다. 하다부는 누르하치에 먹혀버린다.

 

다섯번째, 여섯번째 혼인: 휘파부(輝發部)의 수령 바인다리(拜音達理)가 목숨을 잃고, 휘파부가 멸망한다.

 

휘파부의 패륵인 지누가 죽은 후, 손자인 바인다리가 7명의 숙부를 죽이고, 스스로 패륵이 된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이 그를 떠나서, 예허부로 간다. 바인다리는 예허부에 부족을 돌려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누르하치에 도움을 요청한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바인다리의 일족을 거둔다. 예허부는 다시 미끼를 던지는 옛전술을 쓴다. 동가를 바인다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바인다리는 멍거부루의 전철을 밟아 다시 누르하치와 단교한다. 그래도 예허부는 휘파부의 무리들을 돌려보내주지는 않았다. 바인다리는 다시 누르하치에 도움을 요청한다. 정치가 누르하치는 재차 출병하겠다고 시원스럽게 승락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바인다리에게 시집보낸다. 예허부는 다시 동가라는 미끼를 던진다. 바인다리는 다시 걸려든다. 그리하여 다시 누르하치를 배신한다. 누르하치는 바인다리를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았다. 1607년 휘파부를 점령하고, 바인다리 부자는 그 전투에서 전사한다. 휘파부는 이렇게 하여 멸망하였다.

 

일곱번째 혼인: 우라부가 멸망하고, 부잔타이는 상사병으로 죽는다.

 

누르하치는 부잔타이를 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조카딸과 딸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이 통일전선을 파괴시키기 위하여, 예허부는 다시 나이가 근 서른이 된 동가를 다시 부잔타이에게 주겠다고 한다. 부잔타이는 이성을 잃고, 사람을 징벌할 때 쓰는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누르하치의 딸의 등을 쏘아,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게 만든다. 누르하치는 대노하여, 부잔타이를 엄히 질책한다. 그러자 부잔타이는 깜짝 놀라서 황급히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동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누르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친히 우라부를 공격한다. 부잔타이는 예허부로 도망친다. 이리하여 우라부는 멸망한다. 그러나, 예허는 동가를 부잔타이에 시집보내지 않았다. 부잔타이는 상사병으로 죽음에 이른다.

 

여덟번째, 아홉번째 혼인: 다섯나라의 갈등을 도발한다.

 

1615년, 33세의 동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몽골 난토(暖兎)부의 수령아들인 지사이가 구혼을 한다. 부양구는 동의한다. 그러나, 동가는 지사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지사이는 예허부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바로 이때 두 사람의 경쟁자가 뛰어든다. 한 명은 동가를 시종 잊지 못하고 있던 누르하치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 카르카(喀爾喀)부의 다르칸 패륵의 아들인 망구얼다이이다. 부양구는 지사이와 누르하치를 버리고, 동가를 망구얼다이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앞의 여러번은 혼인이 완성되지 못한 것이었지만, 이번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누르하치는 미칠 것같았다. 병력을 출동시켜 예허부를 공격하고자 한다. 이때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너무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예허부와 결맹을 맺고 병력을 보내어 동가를 보호해준다. 이성을 되찾은 누르하치는 즉시 병력을 일으키지 않는다. 누르하치는 전쟁에서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동가의 애정을 얻는데는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1년후 동가는 사망한다.

 

동가의 사후: 예허부가 그녀로 인하여 멸망하고, 명나라도 멸망한다.

 

1619년 8월, 누르하치는 예허부를 멸망시킨다. 부양구는 죽기 전에 하늘에 맹세한다: "나 예허나라는 여자 1명만 살아남더라도 건주여진을 멸망시킬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이 말이 3백년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것은 바로 예허나라씨인 서태후였다. 마지막으로 청나라황제의 퇴위조서에 서명한 융유태후도 예허나라씨이며 서태후의 조카딸이었다) 그후,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토벌한다. 이유는 바로, "명나라가 월경하여 예허를 도와 내가 이미 취하기로 한 여자를 몽고에 시집보내게 하였다...."는 것이 들어 있다.

 

동가는 앞뒤로 9번이나 다이산, 부잔타이, 누르하치, 멍거부루, 바인다리, 지사이, 망구얼다이의 7명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한 바 있다. 하다, 휘파, 우라, 예허의 4부는 그녀때문에 멸망했다. 대명왕조도 그녀때문에 멸망했다. 한 여인으로 인하여 이렇게 많은 부족간에 생사존망을 건 전투가 벌어지다니, 이는 그리스 트로이전쟁때의 헬렌과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전설이다. 그녀는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아마도 누르하치는 절반은 그녀의 미모로 인하여, 절반은 전쟁의 핑계거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6명은 실제로 그녀에게 완전히 반했었다. 특히 부잔타이와 바인다리는 두번씩이나 같은 방식으로 당한다. 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강산을 버릴 지라도 동가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동가를 위하여는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