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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명나라멸망후 주삼태자(朱三太子)는 왜 자주 나타났는가?

by 중은우시 2012. 1. 8.

글: 장걸(張杰)

 

황실에 태어나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금의옥식(錦衣玉食)의 생활을 지낼 수 있다. 그러나, '황실'과 관계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구심투각(鉤心鬪角)의 피곤한 생활을 지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황권을 잃어버리거나, 나라가 망하면 황실구성원이었던 이들의 결말은 좋을 수가 없다.

 

명나라 망국태자의 비참한 운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황태자와 왕조의 운명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나라가 망하면, 원하든 원치않든, 황자의 운명은 그저 '죽음' 밖에 없다.

 

바로 그날 밤, 대명의 주씨집안, 주씨의 아이들은 죽을 자는 죽고, 흩어질 자는 흩어졌다.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군하기 전에, 숭정제 주유검(朱由檢)은 세 아들을 곁으로 불렀다. 대명의 수백년기업이 자신의 손에 의하여 무너질 상황에서 아직은 모두 어린아이인 세 아들을 바라보았다. 숭정제의 마음은 찢어질 것같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빨리 도망쳐서 목숨을 건져라. 시골로 가서,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라. 이후 살면서 조심하고, 관리를 만나면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선비를 만나면 선생이라고 불러라. 만일 너희가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반드시 부모를 위하여 복수하겠다는 것을 기억해라.

 

세 아들을 보내고 나서, 숭정제는 후궁으로 가서 살계를 펼친다. 그리고 딸인 장평공주의 팔까지 베어버린다. 궁중의 태감, 궁녀들은 황제의 눈이 시뻘개진 것을 보고는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저 온 몸에 피칠을 한 숭정제 주유검만이 남았다...

 

주유검은 일곱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은 황장자 겸 태자 주자랑(朱慈烺), 황삼자 영왕(永王) 주자형(朱慈炯), 황사자 정왕(定王) 주자소(朱慈炤)이다. 도망친 이 세 아들은 나중에 반청복명을 위한 황족의 혈맥과 희망을 남긴 셈이다.

 

태자 주유랑은 태감들이 모시고 황궁을 빠져나갔고, 북경성의 어느 골목에 숨어 있었다. 두 동생은 직접 주황후(周皇后)의 부친인 가정후(嘉定侯) 주규(周奎)를 찾아갔다.  주규는 대명종실의 가까운 인척이라 할 수 있다. 두 황자가 도망쳐 들어왔으면,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주규는 그런 친척관계를 전혀 생각지 않고, 적극적으로 두 황자를 이자성의 농민군에 넘겨버린다. 태자 주자랑은 그후 농민군에게 체포된다.

 

이자성은 북경에 진입한 후 세 황자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태자 주자랑을 송왕(宋王)에 봉하고 다른 두 형제와 함께 감시하에 둔다. 그러나, 이자성이 북경에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오삼계는 청나라군대를 산해관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리하여, 이자성은 바로 오삼계를 정벌하러 떠난다. 그리고 세 황제도 자신이 데려고 가서 곁에 둔다. 싸움이라면 세 황자는 할 줄 모른다. 이자성이 그들을 데려간 것은 대명황자의 명의로 오삼계를 초안(招安)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오삼계는 황자든 아니든 신경쓰지 않고 군대를 이끌어 이자성의 농민군을 물리친다. 농민군은 결국 북경을 잃는다. 이자성은 서쪽으로 철수할 때, 이미 궤멸한 농민군은 스스로를 챙기기도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세 명의 전왕조 황자들도 돌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후 주자랑, 주자형, 주자소는 더이상 정사에 출현하지 않는다.

 

주씨 세 태자가 정사에서는 사라졌지만, 야사에서는 '활약'하기 시작한다.

 

순치원년(1644년), 명왕조의 태감 상공공의 집에 누군가 찾아온다. 그는 보자마자 깜짝 놀란다. 온 사람은 다름아닌, 명왕조의 태자 주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상공공은 이 뜨거운 감자를 거둘 수도 없었고, 거둘 생각도 없었다. 직접 그를 주규의 집에 데려고 간다.

 

주규는 주자랑을 보자마자, 크게 소리지른다: "이 사람이 어느 집 자식인가?" 주규가 설마 외손자를 못알아본단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사실 주규는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그저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규의 집에서 쉬고 있던 장평공주는 이 소식을 듣고 내실에서 뛰어나온다. 동생을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한다. 주규는 그 모습을 보고, 할 수 없이 주자랑을 받아들인다.

 

주자랑은 어려서부터 여러 사람이 앞뒤에서 보살펴주는 생활을 해왔다. 그가 주규의 집에서 꼬리를 말고 조용히 지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면서 태자의 버릇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는 이미 왕조가 바뀌었으므로, 주규는 조심조심 살아야 할 때이다. 게다가 망국 태자까지도 집안에 거두어 두고 있다니, 대청의 조정이 알면 무슨 큰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시켜 주자랑을 집밖으로 쫓아낸다.

 

주자랑은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생각하고, 아무도 거두어주지 않는 것을 봤다면, 당연히 빨리 도망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주규의 집앞에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주규의 집 하인들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대문을 사이에 두고 욕으로 맞상대를 했다. 그 결과 둘이 싸우다 보니 청나라의 관병이 달려왔다. 한쪽이 명나라의 태자라는 말을 듣자, 관병은 급히 주자랑을 압송해 간다. 주규는 주자랑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는 화가 곧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히 글을 도르곤에게 올려서 그가 가짜태자라고 말한다.

 

도르곤이 보기에, 그 자는 진짜 태자라 하더라도 가짜 태자가 되어야 했다. 대청은 막 다른 사람의 땅을 차지한 입장이다. 전 지주의 아들이 돌아왔다면, 대청은 만주족이 건립한 것이므로, 한족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 태자의 출현은 대명강산을 회복하려는 자들에게는 좋은 핑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태자는 분명히 가짜여야 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의 목적은 달랐지만, 수단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이 태자의 신분을 극력 부인하는 것이었다.

 

주씨친척, 대명의 궁녀 그리고 전왕조의 관리들이 일치하여 확인한 끝에 이 태자는 가짜라고 결정내린다. 당연히 누군가 진짜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도르곤은 그들을 영원히 입다물게 했을 것이다.

 

주자랑의 재판에 대하여, 막 건립된 대청의 조정신하들 사이에서는 소란이 일어난다. 어쨌든 그들은 명왕조에 대하여 애정이 있었다. 심지어 일부 백성들은 직접 반란을 일으켜 청나라관리들에게 태자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지도 몰랐다. 도르곤이 보기에, 이 태자사건은 빨리 끝내야 했다. 그래서 다음 해에 이 가짜태자를 죽여버림으로써 급히 '태자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북경의 태자사건이 끝나자 마자, '태자'는 다시 남방에 나타난다. 당시 북경이 함락된 후, 명나라는 남방의 잔여세력이 번왕 주유송을 옹립하여 왕조를 건립하고,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이때 주자랑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주자랑의 출현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당시 이자성의 농민군이 실패한 후, 주자랑은 어지러운 가운데 도망쳐나와서, 소주항주 일대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홍로사소경 고몽기의 종이 우연히 한 아이를 알게 되었는데, 저녁에 잠을 잘 때, 종은 이 소년의 내의에 용무늬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묻자마자 이 소년이 바로 명나라 태자 주자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자가 나타난 후, 당시 주유송이 건립한 남명정권이 직면한 것은 이 태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주유송은 생각한다. 그는 금방 황제가 되었는데, 진짜 태자가 나타났다면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태자는 반드시 가짜여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때, 명나라태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남경의 백성들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속속 주유송에게 퇴위를 요청한다. 그리고 태자에게 권력을 돌려주라고 한다. 원래 주유송이 건립한 남명정권은 기반이 단단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태자가 나타나다니, 비록 주유송에 의하여 가짜태자로 확인되었지만, 백성들을 설득시키기는 힘들었다.

 

남명조정이 가짜태자문제로 시끄러울 때, 남경의 수백명 백성은 감옥을 부구소, 주자랑을 구해내서, 그를 황제로 옹립한다. 아쉽게도 이 주자랑은 겨우 5일간 황제로 있다가, 남경으로 공격해 들어온 청나라군대에 붙잡힌다. 청나라군대는 막 황제에 오른 주자랑과 금방 황위에서 끌려내려진 주유송을 북경으로 압송하여 함께 처결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청나라의 통치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주삼태자를 그리워했고, 주삼태자의 명의로 여러번의 반란이 일어난다.

 

'주삼태자'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자칭 주자환(朱慈煥)이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황삼자는 분명히 주자형(朱慈炯)이다.

 

사실 주유검의 세번째 아들은 영왕 주자형이다. 그리고 주자환은 그의 다섯째 아들이다. 주자환은 5살때 요절한다. 명나라 숭정제의 일곱아들중 셋은 요절하고, 장남, 삼남, 사남, 오남이 남았고, 오남 주자환은 사남과 같은 나이이다. 사람들은 그를 습관적으로 '주삼태자'라고 칭했다.

 

주자환이 죽기 전에, 돌연 침대곁에서 숭정제에게 얘기한다: "구련보살이 말했습니다. 황상이 외척들에게 박하게 대하여, 그의 아이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라고." 구련보살은 만력황제의 생모인 이태후이다. 즉, 숭정의 할머니가 된다. 숭정제는 이 말을 듣자, 주자환이 보통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현기자응진군(玄機慈應眞君)"에 봉한다. 반란군은 바로 이 주자환이라는 '비범한 인물'의 신분과 민간에서의 그의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을 이용한 것이다.

 

순치12년, '주주기라는 서생이 스스로 '주삼태자'라고 하면서 소북에서 반청활동을 전개한다.

 

순치13년, 직예에 한 파산상인이 스스로 '주삼태자'라고 하면서 묘회에서 향객들에게 나중에 명나라를 복국한 다음에 관직에 가격을 정해서 돈을 받았다.

 

옹정7년, 이매라는 사람이 주삼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고, 지금 해외로 나가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광동총독은 사람을 보내어 이매를 체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매는 그 후 사라져 버린다.

 

이후, 절강, 광서, 심지어 월남, 여송(필리핀)에서 주삼태자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강희 말년, 대만의 주일귀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역시 주삼태자라는 명의를 내걸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진정한 황삼자 주자형은 이자성의 농민군에서 도망쳐 나온 후, 주원장의 고향인 안휘 봉양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출가하여 화상이 된다. 주자형은 성인이 된 후, 절강을 유람하다가 호씨성의 선생을 만난다. 호선생은 주자형의 재주를 아껴서, 그를 환속하게 하여 딸을 주자형에게 시집보낸다. 이때의 주자형은 그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였고, 반청복명을 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을 생각은 없었다.

 

비록 주자형은 아무런 마음이 없었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호소력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영파 소흥 일대의 반청세력은 명나라 황자의 명의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청나라가 병력을 파견하여 진압하다가 강소절강일대에서 주자형을 붙잡는다. 비롣 이때 주자형은 이미 칠십여세였고,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대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형의 일가 삼대는 모두 처결당한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참 기이하다. 대명대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명나라의 부패한 통치에 대하여 뼛속까지 미워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자성이 손을 한번 휘두르자 그 많은 농민군이 그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청이 이 통한의 명왕조를 무너뜨린 후에는 다시 많은 사람들이 반청복명의 깃발을 내건다. 앞의 반란은 시대의 흐름을 따른 것이라면, 뒤의 반란은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크게는 인류, 작게는 사람까지, 발전의 역정은 모두 옛것을 깨트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다. 그 후에야 회생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개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발전하면, 이전의 장점은 아마도 자신의 발전을 방해하는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포잔수결(抱殘守缺), 고보자봉(固步自封)한다면 전진하는 역사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다.

 

비록 개혁은 고통스럽지만, 자신을 바꾸는 것이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자신을 바꾸는 것은 자신을 뿌리없는 나무나 아무런 주관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다. 눈은 현재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