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남명재상 마사영은 간신인가?

중은우시 2009. 8. 11. 21:37

글: 왕요례(王堯禮)

 

명작의 역량은 엄청나다. <<도화선(桃花扇)>>으로 인하여 마사영(馬士英), 양용우(楊龍友)의 두 귀주(貴州)사람은 역사의 치욕의 기둥에 산채로 못박혀 버렸다. 그러나 극중인물이 역사상의 실제인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들에게 씌워진 오명을 지워주려고 애쓰기도 한다.

 

명나라때 활약한 귀주사람중에서 관직으로 보면 마사영이 가장 높다. 그는 남명 홍광정권의 내각수보(재상)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엄당의 잔재인 완대성(阮大)을 추천하고 중용함으로써 원래 위기에 빠져있던 홍광정권이 급속히 부패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1년만에 와해되고 만다. 당시 사람과 후세인들이 "마완"으로 두 사람을 나란히 불러서 함께 욕하고 침뱉었다. <<명사>>에는 "마완"을 같이 "간신열전"에 수록했다. <<도화선>>은 더더욱 그의 오명을 널리 떨치게 만든다. 귀주사람들도 그를 창피하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를 고향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지 향현전에도 그의 이름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마사영은 자가 요초(瑤草)이고 귀양(貴陽) 사람이다. 개략 명신종 만력19년(1591년)에 태어났고, 만력47년(1619년)에 진사가 된다. 남경호부주사직을 수여받는다. 천계때 랑중이 되고, 엄주,하남,대동삼부의 지부를 역임한다. 숭정3년(1630년)에 산서양화도부사가 된다. 5년에는 우첨도어사를 제수합고, 선부순무가 된다. 그러나 1개월만에 진수태감 왕곤이 조정의 고관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고발당하여, 변방으로 유배간다. 얼마후 남경으로 보내어진다.

 

남경에 머무는 동안 마사영은 완대성을 알게 된다. 완대성은 자가 집지(集之)이고, 안휘 회녕사람이다. 마사영과는 같은 해에 진사가 된다. 천계초년에 급사중이 되는데, 당시는 위충현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그는 위충현의 문하에 들어가서 엄당이 된다. 그리고 동림당을 모함하고 박해하는데 가담한다. 위충현이 죽고나서 위충현에 빌붙었던 엄당은 "역안"으로 인정되었는데, 완대성도 거기에 포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평민이 된다. 안휘의 고향집과 남경일대에 거주한다. 마사영은 완대성을 알고난 후에 서로 아주 가까워진다.

 

숭정14년, 재상에서 쫓겨나서 고향으로 돌아온 주연유(周延儒)는 동림과 복사의 활동하에 다시 수보(재상)에 임명된다. 명계사승에 따르면, 동림, 복사가 주연유의 복직을 위하여 활동하느라고 은20만냥을 썼다. 완대성은 돈을 많이 낸 사람중 하나였다. 그래서 주연유가 복직된 후, 완대성은 자신의 명예회복을 요청한다. 주연유는 잠시 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자 완대성은 마사영을 다시 기용해달라고 하고, 주연유도 응락한다.

 

이때, 이자성, 장헌충의 기세가 왕성했고, 각 성들을 공격했으며, 파죽지세였다. 봉양총독 고광두는 연속하여 5개 성을 잃는 바람에 감옥에 갇힌다. 예부시랑 왕석운은 숭정제에 마사영을 추천한다. 수보 주연유는 이 기회를 틈타서 인정을 베푼다. 그리하여 마사영을 병부우시랑에 발탁하고, 여주,봉양등의 군무총독에 임명한다. 당시 보정총병 유초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순무 왕한이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다 패배하고 그 자신도 죽는다. 황상은 마사영에게 토벌을 명한다. 마사영은 병력을 이끌고 포위하며, 유초는 계속 패퇴한다. 나중에 마사영이 계책을 세워 유초를 사로잡아 북경으로 호송하여, 처결하게 한다. 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숭정제와 조정신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는 일처리가 깔끔하고 모략이 뛰어나다는 평을 얻는다.

 

숭전17년 3월,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킨다. 숭정은 목을 매어 자결한다. 남경의 문무대신은 이 소식을 듣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자 논의한다. 사가법, 고홍도, 강왈광, 왕탁등의 동림당은 노왕 주상노를 옹립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사영, 고걸, 유양좌, 황득공, 유공소등의 공신와 군대장수들은 복왕 주유송을 옹립하자고 주장한다. 마사영은 오백의 귀주병사를 이끌고 복왕을 호송해서 데려온다. 그리하여 기정사실로 만들자, 사가법등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그리하여 복왕이 황제가 된다. 연호는 홍광이라 한다. 마사영과 사가법, 고홍도, 강왈광, 왕탁등이 내각에 들어간다. 마사영은 수보가 되고, 총병 고걸, 유택청을 시켜 상소를 올리게 해서 사가법을 전쟁터의 일선으로 내보내게 된다. 사가법이라는 명망이 높고, 품덕이 뛰어난 동림의 영수는 이렇게 하여 남경에서 쫓겨난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마사영은 동림당의 대신들과 함께 일련의 정확한 방침과 정책을 세웠다. 조정은 새로운 기상을 나타냈다. 그러나, 사가법이 양주로 간 후에 마사영은 조정대신의 반대를 무릎쓰고, 홍광제에게 완대성을 추천한다. 홍광제는 완대성을 병부첨주우시랑에 임명하고 오래지 않아 우첨도어사에 임명하여 방어업무를 맡긴다. 다음해에는 병부상서 겸 우도어사로 승진시킨다. 완대성이 등장한 후, 그를 반대하는 동림, 복사당과 다른 정직한 신하들을 탄압한다. 그리하여, 곤란한 일이 많고, 모순이 쌓여있는 홍광정권에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청나라병사들이 대거남하하는데 유효하게 항거하도록 조직하지도 못했고,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마사영이 나라를 망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민국시대에, 요대영 선생이 지은 <<마각노세원록>>은 마사영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기정사실화된 정설을 뒤집지는 못했다. 그렇기는 해도, 마사영에 대하여 혹은 역사에 대하여 두 가지 문제는 확실히 했다.

 

첫째, 마사영은 엄당(환관 위충현의 당)이 아니다. 세상사람들은 왕왕 "마완"을 나란히 언급하므로, 마사영도 엄당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틀리다. 당시에는 엄당이라는 추악한 정치집단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엄당이 상존하더라도, 그 당의 어느 누구와 교류한다고 하여 엄당이라 할 수는 없다. 확실히 완대성을 추천하고 중용한 것은 맞다.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에 재난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완대성이 재기용된 것이 완전히 마사영때문도 아니다. 완대성은 음험하고 재능이 뛰어났다. 시를 잘 쓰고 극본도 잘 썼으며, 병법에도 능했다. 마사영이 그를 추천하기 전에, 그는 이미 환관과 내통해 있었다. 나중에 그는 <<춘등미>>와 <<연자전>>이라는 극본을 써서 궁중에서 공연했다. 이를 통해서 홍광제의 호감을 산다. 그는 강방지책(江防之策)을 썼고, 홍광제는 그를 장수재능을 지녔다고 보았다. 당시의 청류(淸流) 중에서도 완대성에 대한 입장은 둘로 나뉜다. 완대성이 남경에 한거하고 있을 때, 동림, 복사의 명사들인 주연, 고고, 오응기, 황종희,후방역등은 <<유도방란공게>>를 써서 그를 축출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러나 그의 시집을 보면 같은 시기에 그와 함께 노래하고 시를 짓던 친구들 중에는 일부 동림에 속한 인물들도 있다. 예를 들면, 범경문, 사가법, 문진맹, 왕사임, 양보등등이 그들이다. 그들중에는 청나라에 항거하여 순국한 사람도 있고, 유민의사도 있다. 그들의 품격으로 봐서 엄당의 사람과 교류할 리는 없는 사람들이다. 일찌기 마사영을 몰아내야한다고 소리높였던 왕사임은 완대성의 역안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은 완대성의 재기가 완전히 마사영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사영이 완대성을 추천하고 중용한데는 3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완대성이 주연우에게 자신을 추천해준데 대한 보은이다. 둘째는 완대성에게 속은 것이다. 비록 완대성이 재주가 있어, 청류의 일부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는데, 마사영이 그에 속았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명사>>에는 남경이 함락된 후, 마, 완은 엄주총경 방국안의 군중으로 차례로 도망간다. 완대성은 여전히 큰소리로 병법을 논했다. 방국안도 정말 장량, 제갈량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여겨서 아주 기뻐한다. 그러나, 마사영은 "남쪽으로 옮기게된 원인의 절반은 완대성에게 있다고 보았고, 그 자신이 악명을 얻었다는데 대하여 아주 미워했다" 마사영은 나중에는 완대성을 기용한 것을 후회한 것같다. 동시에 이는 마사영이 당초에는 어느 정도 완대성에게 속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세번째는 같은 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명나라말기의 당쟁은 아주 격렬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동림당, 복사와 같은 진보집단도 정치이상과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정당한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명사>>의 간신열전에 들어간 주연유가 다시 재상이 되도록 활동하기도 한 것이다. 마사영은 한 지방의 사령관에서 내각의 중추에 올라간다. 그러다보니 지위나 명망이 부족했다. 입각때 동림당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그를 반대하지 않은 자들도 마음 속으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편이 필요했다. 다재다능하고 병법을 논하기 좋아하는 완대성은 얻기 힘든 후보자였다. 그는 이 얻기 힘든 인재가 그를 망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둘째, 마사영은 매국노가 아니었다. 어떤 책에는 마사영이 청나라에 투항하여 피살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남경성이 함락된 후, 홍광제는 태평으로 도망치고 오래지 않아 청나라에 투항한다. 그리고 북경에 호송된 후 처형된다. 마사영은 왕모비(王母妃)를 모시고 귀주병사 사백명을 호위로 삼아 절강으로 간다. 여러 곳을 거쳐, 나중에 엄주총병이며 귀주대정총병을 역임한 바 있는 옛친구 방국안의 군영으로 들어간다(나중에 완대성도 도착한다). 다만, 방국안, 마사영은 청나라병사의 공세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패배한다. 두 사람은 잔여병력을 이끌고 감국(監國)으로 복주에 있는 당왕 주율건에게 의탁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왕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태호의군 오역의 군영으로 들어간다. 오군이 패배한 후 청나라병사에 포로로 잡혀, 군중에서 참수당한다. 마사영은 생사의 기로에서, 완대성처럼 꼬리를 흔들며 삶을 구걸하거나 새로운 주군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어쨌든 자신의 절개는 지킨 것이다. 비록 생사를 가지고 영웅을 논해서는 안되겠지만, 어쨌든 매국노는 아니다. 어떤 사서에는 마사영이 청나라에 투항한 후, 명나라군대와 암중으로 내통했다고 되어 있고, 그래서 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다. <<명사. 마사영전>>으 결말에는 이런 견해가 붙어 있다. 그저 일설일 뿐이다. 만일 마사영이 정말 투항했다면, 청나라가 공식적으로 편차한 <<명사>>에서 그의 이런 오점을 감춰줄 이유가 없다. 현대사학자인 진원 선생은 <<경계진검불교고>>에서 "오로지 마사영만이 홍광조에 최후까지 전쟁을 준비한 사람이다. 완대성이 먼저 엄당에 빌붙고,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결론이 아마도 공정한 것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사영은 일정한 재능이 있었다. 다만 이 재능은 지방관리로서는 괜찮은 수준이지만, 나라의 중추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더더욱 주요한 것은 그의 인품이 훌륭하지 못하고, 못된 무리들과 어울렸으며, 간사한 자들을 등용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큰 화를 불러왔고, 결국 역사의 죄인이 된다.

 

시간은 이미 삼백년이 흘렀다. 오늘 우리가 그 당시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당시의 사람들보다 명확한 부분이 있다. 황상 선생이 <<유하설서. 마요초>>에서 하완순의 견해를 하나 인용했다. 하완순은 "사가법은 깨끗한 지조에는 남음이 있지만, 재주와 변화는 부족했다. 마사영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고, 호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병사를 다루는데는 사가법보다 못했지만, 그도 역시 보통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실제상황을 보고 두 사람의 입장을 바꾸어놓아보자고 말했다. 황상선생은 그러한 견해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서생의 단견이라고 본다. 남명 홍광조정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한 두 사람의 능력으로 국면을 만회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황상 선생의 견해가 이치에 맞는다. 명나라는 가정제이래로, 정치, 경제, 군사 및 사회생활의 각 방면에서 모두 부패가 극에 달했다. 충직한 신하,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장군은 죽거나 갇히거나 쫓겨났다. 사기가 떨어지니 인심이 흩어졌다. 청나라군대가 들어오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서 강산의 절반을 차지한다. 중원을 석권하던 이자성마저도 막아내지를 못했다. 위기의 순간에 홍광조정은 구폐를 일소하고 개혁을 해야 했고, 힘을 모아서 대응해야 했다. 그렇게 하여 명성과 위엄을 다시 세우고, 강산을 수복해야 했따. 그러나, 그저 옛방식을 답습하고, 북경에서 싸우던 내용을 남경으로 그대로 옮겨왔다. 조정신하와 조정신하간의 불화, 내각과 장수의 부조화로 각자 자신의 지역에서 싸웠고, 각자 자신의 이익만 고려했다. 마, 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동림, 복사당인들도 대부분은 절개가 있고, 인망이 있던 인사들이지만, 편협하다는 약점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먼저 마사영의 입각을 반대하고, 군대장수들과도 싸우고, 나중에는 완대성이 등용된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리하여 조정에 남은 사람이 없게 된다. 사악한 세력이 횡횅하게 된다. 그저 사가법만이, 마음 속에 큰 뜻을 품고, 인욕부중하며 양주를 지킨다. 그러나 그의 수하인 강북의 '사진'은 그의 지휘를 듣지 않는다. 군대는 무능했고, 자기 지반을 놓고 싸웠으며, 백성을 약탈하는데는 뛰어났다. 병력을 장악하고 무한을 지키던 좌량옥은 대국을 돌보지 않고, 결과도 생각지 않고, 20여만의 군대를 이끌고 "청군측(淸君側)"을 하기 위하여 내려온다. 이같은 국면에서 어떻게 청나라병사의 남하를 막아내겠는가? 마사영이 원래 재상의 인재는 아니었지만, 제갈량 곽자의가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어쩔 방법이 없다고 한탄했을 것이다. 홍광조가 멸망한 책임을 모조리 마사영에게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마사영은 이미 죽었다. 현재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왕왕은 희곡 <<도화선>>으로 안다. <<도화선>>은 유명한 희극이다. 그러나 어쨌든 역사는 아니다. 극중의 마사영은 역사상의 마사영과 차이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