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용골대(龍骨大): 청나라초기의 군사가, 외교가

중은우시 2010. 5. 4. 18:50

출저: 미상

 

용골대는 중국에서는 영아이대(잉어얼다이, 英俄爾岱), 혹은 영고이대(英固爾岱, 잉구얼다이)라고 부르며, 성은 타타라(他塔喇)씨이다. 명나라 만력24년(1596년)에 태어나서, 청나라 순치5년 이월초이틀(1648년 2월 24일)에 병사한다. 그는 청나라 개국시기의 유명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이재와 외교에 밝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용골대는 대대로 자쿠무(지금의 요녕 무순 동남쪽)에서 거주했고, 그의 조부인 다이투쿠하리가 누르하치에게 귀순한 후, 정백기(正白旗)에 예속되었다. 용골대는 청년시기에 전투에서 용맹하여 우록액진(牛祿額眞)으로 승진하여, 백부인 토보의 우록을 관장한다. 천명연간에 용골대는 중대한 전투에 계속 참전한다. 천명4년(1619년), 그는 누르하치를 따라 개원(開原)을 공격하고, 명나라장수, 몽골족용사인 아부르를 벤다. 천명6년(1621년), 후금의 요양, 심양전투때 전공을 세워 유격으로 승진한 후 다시 참장(參將)으로 승진한다.

 

같은 해 12월, 용골대는 사고로 인하여 참장에서 비어(備御)로 강등된다. 좌절 속에서도 그는 계속 노력했다. 천명8년(1623년), 그는 공을 세워 다시 삼등유격으로 승진한다. 천명10년(1625년) 그는 다시 전공을 세워 삼등참장에 오르고, 한번 죽을 죄를 면제받는 특례를 얻는다. 성공과 실패의 경력은 용골대에게 백절불굴의 진취적 정신을 불어넣었다.

 

천총연간에 용골대는 연부역강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정치, 군사의 여러 방면에서 임무를 맡는다.

 

천총원년(1627년), 조선이 후금과 '형제지맹'을 맺는다. 같은 해 5월, 용골대는 부장 유흥조(劉興祚)를 데리고 조선에 사신으로 간다. 양국관계를 회복하는 사명을 띄고 간 것이다. 그는 유흥조를 도와 조선왕의 동생 이각(李覺)을 귀국시키고, 홍타이시(청태종)의 조선국왕 이종(李倧)에 대한 '맹세'를 이행하라는 국서를 전달한다. 그는 이 임무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십이월, 홍타이시는 명나라의 경제봉쇄를 벗어나고, 식량과 기타물자결핍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용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무역문제를 협의하게 한다. 힘든 협상끝에, 용골대는 조선과 변경호시(互市)를 열기로 합의한다. 합의서에서는 조선에서는 쌀 3천석을 준비하여 2천석은 보내고, 1천석은 변경호시에서 매매하며; 다른 물자는 '백성들이 변경으로 가서 시장에서 교환하도록 허용하며, 서로 가진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 그후 5년 즉 천총2년(1628년)에서 6년(1632년)까지, 용골대는 후금의 감시관(監市官)으로 심양과 조선을 오가면서, 후금에 시급히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해결해서, 큰 공헌을 세운다.

 

천총3년(1629년), 홍타이시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내몽고를 거쳐 북경을 기습한다. 용골대도 출정한다. 십월하순, 후금의 군대가 관내로 들어가서 파죽지세로 석문역등 10개성을 함락시킨다. 십일월 사일, 후금군은 준화를 함락시킨 후, 주력을 계속 전진시킨다. 용골대는 준화성에 남아서 지켰다. 용골대는 방어를 강화하며, 이 틈에 난양영의 투항을 받아낸다. 오래지 않아 준화의 형세가 악화되었다. 다음 해(1630년) 사월, 명나라의 계료총독 장봉익, 순처눈무 사여란등이 병력을 이끌고 밤에 준화를 공격했다. 사면에서 공격을 받아 석문역등 11개성이 모두 등을 돌린다. 이때 준화성의 후금수비군은 겨우 800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절반은 부상병이었다. 용골대는 완강하게 방어하며, 적은 인원으로 많은 공격부대를 막아내고 있었다. 세번싸워서 모두 물리친다. 명나라 기병 백명, 보병 천여명을 사살했다. 그후 그는 정치공세를 펼쳐서, 등을 돌린 11개성을 설득한다. 그중 나문욕등 5개성은 다시 그의 통제하에 들어온다.

 

천총5년(1631년) 정월, 홍타이시와 조선국왕 이종의 '형제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한다. 조선국왕 이종이 보낸 사신 박난영(朴蘭英)이 후금으로 봄철 공물을 보내왔다. 홍타이시는 공물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조선국왕 이종이 고의로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인삼등의 답례물은 준비해서 용골대로 하여금 박난영이 머무는 관사로 보내도록 했다. 박난영은 그러나 이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후금이 조선측의 공물을 받지 않았는데, 자신이 후금측의 답례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용골대는 공물을 받지 않은 것은 조선측이 맹세를 어기고 공물을 갈수록 감소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난영은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후금의 답례품도 계속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용골대는 비록 화는 났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쌍방간이 서로 우호적이면 선물을 서로 주고 맏는 것이므로, 당신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 그러면서 말을 돌렸다. 조선이 여러번 명나라를 도와서 후금의 괴롭혔지만, 후금은 여전히 대의를 생각해서 조선을 대해주었다는 점을 하나하나 나열해서, 박난영으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삼월, 용골대가 조선에 사신으로 간다. 쌍방의 관계 및 봄철 무역에 관해서 계속 논의했다. 이 기간동안 만주에서 도망친 385명이 배를 타고 조선의 경내로 들어갔다. 용골대는 이를 알고난 후, 즉시 사람을 보내여 구금해서, 심양으로 송환했다. 칠월, 홍타이시는 관제를 정하고, 육부를 두었는데, 용골대는 호부승정(戶部承政)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후금의 돈과 양식문제를 책임지는 중임을 맡았다. 천총6년(1632년) 사월, 홍타이시는 만주,몽고대군을 이끌고 차하얼을 정벌한다. 육월, 원정군의 식량이 부족하여, 용골대는 심양에서 식량을 운송하였다.

 

그후, 용골대는 여러번 조선에 가서, 조선에 식량을 공급해주고, 무역을 진행하자고 요구한다. 천총7년(1633년) 사월, 그는 조선으로 가서 담판을 벌인다. 조선이 조선국경인근에 주둔한 후금병사들의 식량공급을 책임져달라고 요구했다. 육월, 그는 다시 조선으로 가서 교섭을 벌인다. 동시에, 그는 팔기무역인원 팔십인을 데리고, 인삼 900근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서 무역을 한다. 용골대가 협상에 능하였기 때문에 그는 조선에서 비교적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협상은 원만하게 끝난다. 조선국왕 이종은 조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로써 변경병사들의 식량문제가 해결된다. 팔월, 용골대는 심양으로 돌아간다. 구월, 다시 무역인원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가을 무역을 벌인다.

 

십일월, 조선은 회녕 통시를 단속하기로 결정한다. 홍타이시는 다시 용골대를 조선에 보내어 교섭을 벌인다. 이는 이 해에 그가 벌써 5번째 조선으로 간 것이다. 이번의 담판은 쉽지 않았다. 홍타이시는 특별히 용골대에게 전권을 부여한다. 그는 조선국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용골대를 파견하여 여러가지 논의하는 것은 모두 용골대가 구두로 전하게 하였다."

 

용골대는 근면하고 뛰어난 외교적 재능을 발휘하여, 홍타이시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홍타이시는 만주족,한족 대신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육부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용골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일처리가 분명하여 짐이 아주 좋아하고 인정한다. 나머지 각부의 대신들 중에서는 힘을 다하여 일처리를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천총8년(1634년) 삼월, 용골대는 마복탑(馬福塔)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호시(互市)를 연다. 계속되는 무역으로 후금은 조선에서 대량의 청포, 망단, 대단, 천청단, 섬단, 붕사, 수은등의 물자를 얻어, 후금통치자들의 수요에 맞추었을 뿐아니라, 이 화물을 다시 몽골에 팔고 마필을 얻어왔다. 이렇게 하여 후금의 기병을 무장시켰다. 이는 용골대가 후금의 군대건설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해 오월, 용골대는 일등갑라장경(一等甲喇章京)으로 승진한다.

 

같은 해, 용골대는 홍타이시를 따라 명나라의 선부, 대동을 원정간다. 이번 군사행동의 목적중 하나는 차하얼의 나머지 인원을 정찰하고 편제에 넣는 것이었따. 육월, 후금군대가 내몽고를 지나게 된다. 용골대 각라포이길(覺羅布爾吉)이 병력 이천을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 도중에 용골대는 차하얼의 무리들과 만나게 된다. 용골대는 장정 이백여명을 죽이고, 부녀, 아이 140명을 획득하고, 낙타, 말, 소, 노새, 양등 600여마리를 얻어서 홍타이시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이어서 후금의 철기가 장성을 넘어 선부, 대동을 석권한다. 선봉대는 오대산에 이르고, 오십여일간 마음껏 유린한다. 윤팔월, 용골대는 대군과 함께 동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차하얼의 나머지 무리들이 속속 투항했다. 용골대는 명부를 들고 유수패륵에게 보고하고, 투항한 무리들을 안치하는 업무를 맡았다.

 

구월, 홍타이시는 팔기제도를 정비하기로 결정한다. 포로로 잡히거나 획득한 물건을 팔기가 균분하는 구제도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용골대는 홍타이시의 어명을 들고, 다이산(代善)등 여러 패륵을 모아서 회의를 개최한다. 용골대의 조직하에, 향후 중대한 영향을 미칠 이 회의에서 마침내 의견일치를 달성한다. 결의에서는 30우록을 1기로 하며, 30우록이 넘는 자들은 빼버린다; 새로 얻은 포로나 가축은 8등분할 필요가 없다. 일률적으로 부족한 기에 보낸다. 이는 홍타이시가 삼대패륵과 함께 국정을 다스리는 제도를 시행한 이후, 다시한번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만주족과 후금정권이 봉건화하는데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후, 홍타이시는 용골대를 더욱 중시한다. 십일월, 용골대는 삼등매륵장경에 오른다. 다음해(1635년) 정월, 홍타이시는 공신들의 요역을 면제해주는데, 용골대는 장정50명을 상으로 받는다.

 

십년(1636년) 이월, 홍타이시는 황제를 칭할 준비를 한다. 그의 지시하에, 만주의 여덟명의 화석패륵, 열일곱명의 고산대신 및 모고 사십구패륵이 연명으로 조선국왕 이종에게 글을 보내어, 이종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그들과 함께 홍타이시에게 황제칭호를 드리자고 요구한다. 용골대는 이 연명서신을 가지고, 대량의 인원을 이끌고 조선으로 간다. 그러나, 이때 조선의 형세는 이미 바뀌었다. 주전파가 득세하여, "오랑캐 사신을 참하고, 오랑캐의 글을 불태여서 대의를 드높이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용골대등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관사의 주위는 활과 화살을 든 사병들이 밤낮으로 둘러싸고 감시했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용골대는 국왕을 만나뵙기를 청한다. 그러나 만나주지를 않았다. 연명서신을 제출하고자 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으로 용골대는 곤경에 처한다. 용골대는 할 수 없이 전체인원을 이끌고 백성의 마필을 빼앗아, 문으로 돌진해서 나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말을 몰아서,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다. 조선국왕 이종은 골치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즉시 사람을 보내어 이들을 뒤쫓아가서, 조선의 회신을 용골대에게 건넨다. 동시에 이종은 3가지 명령을 내려, 변방의 수비를 강화한다. 용골대가 돌아가는 도중에 명나라의 가도의 병사들이 길을 막았지만, 이를 뚫고 돌아간다.

 

숭덕원년(1636년) 십이월, 홍타이시는 제2차로 조선에 진격한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정치공세를 펼친다. 용골대는 홍타이시와 조선국왕 이종의 회담에 모두 참여한다. 이십팔일간의 힘든 협상끝에, 용골대는 양군의 사이를 왕복하며, 힘을 다한다. 홍타이시는 군사적인 우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용골대등이 중간에서 주선하여, 결국 협상에 성공한다. 조선과 명나라는 관계를 끊기로 한다. 청나라와 조선은 화해한다. 조선국왕 이종은 용골대에게 감사하며, 백은 이천냥을 선물로 준다. 용골대는 받은 백은을 모두 위에 바친다.

 

양식부족으로, 농사를 버리는 현상이 많아졌다. 숭덕2년(1637년) 이월, 홍타이시는 계속하여 호부로 어명을 내려보낸다. 하나는 호부에서 즉시 곡식을 보관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매각하도록 하고, 매점매석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지 말라고 하였다. 둘째는 각 아문에 농사때를 어기지 않도록 하고, 봄에 씨를 뿌리게 준비하도록 하였다. 용골대는 적시 곡물가격을 억제하고 춘경을 하도록 조직하였다. 그는 전쟁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경작지를 늘였다. 이를 통하여 홍타이시의 농업을 발전시키라는 지시를 이행한다. 숭덕3년(1638년) 사월, 그는 부하관리를 이끌고, 봉황성, 개수, 우악등지에서 수백리를 개간한다. 숭덕6년(1638년) 그는 다시 사람을 이끌고 요하의 서쪽의 땅을 측량한다. 그는 요동의 농업경제를 다시 일으키고, 청나라군민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숭덕2년 삼월, 용골대는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승진한다. 숭덕4년(1639년) 팔월, 정백기 고산액진(固山額眞)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외교, 군사, 정무의 중요분야는 계속 임무를 수행했다. 숭덕5년(1640년) 십월, 그는 예부, 형부대신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간다. 거기서 조선국왕 이종과 대신들이 소위 '명나라와 몰래 왕래한' 문제를 따진다. 숭덕6년(1641년) 삼월, 그는 도르곤, 하오거등이 금주를 포위했을 때, '병사들을 귀가시키고 병력을 멀리 주둔시킨' 사건을 심리한다; 육월,그는 지얼하랑의 금주포위시의 공과에 대하여 조사한다; 숭덕7년(1642년) 십월, 그는 조선의 대신 최명길, 병사 임경업의 '명나라와 내통'한 사건을 심리한다. 이상의 활동에서, 용골대는 홍타이시의 명령을 충실히 집행했다. 그는 조선의 친명파에 타격을 가하고, 명나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내부의 여러 왕, 패륵, 대신들이 법규를 어겼을 때 그 집행을 맡았다. 이를 통하여 황권을 공고히하는 역할을 했다.

 

숭덕6년 팔월, 용골대는 저명한 송산전투에 참가한다. 이해 칠월, 명나라의 계료총독 홍승주는 십삼만 명나라군대를 이끌고 금주에 포위된다. 도르곤이 명나라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했고, 청나라의 병마가 많이 다쳤다.

 

팔월 초여드레, 용골대는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도르곤을 지원간다. 십구일, 홍타이시가 전선에 나와서 친히 지휘한다. 전투초기에, 홍타이시는 신속히 홍승주와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 의도에 따라 그는 용골대를 고교에 주둔하게 한다. 용골대는 이 방안이 좋지 않다고 보고, 도르곤 하오거 등과 함께 홍타이시에게 건의한다: "명나라병사는 아주 많습니다...만일 속전속결로 하려면 힘이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황상께서 지금 고교에 주둔하게 하였다가 금주, 송산의 병사가 안팎에서 협공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홍타이시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송산을 둘러싸고 주둔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송산에서 명나라의 양식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전술을 썼다. 결국 오랫동안 포위되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홍승주는 패배하여 포로가 된다. 탑산, 행산, 금주도 연이어 청나라군대에 점령된다. 이번 청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것은 용골대가 선봉에 서서 상대방의 예기를 꺽었다는 것이다.

 

대군이 산해관을 들어갈 때, 용골대는 병력을 이끌고 명나라의 이십만의 보병, 기병을 무찔렀다.

 

용골대는 자신의 충성과 공로로 홍타이시로부터 중용되었고,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숭덕8년(1643년) 칠월, 홍타이시는 용골대의 수하들에게 '100명이 모두 인삼을 채굴할 수 있다'는 허가를 준다. 허가받은 인원수가 공신들 중에서 두번째였다. 십이월, 용골대는 삼등매륵장경에서 삼등앙방장경으로 승진한다. 이 해에 호부승정은 호부상서로 고쳐지고, 용골대는 호부상서를 맡는다.

 

청나라군대가 북경에 들어온 후, 할 일이 많았다. 당시 전쟁이 격렬하여, 군수물자보급이 급박했다. 용골대가 호부를 맡아서, 여러 측면으로 공급책임을 맡았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곤란한 일들이 많았다. 그는 섭정왕 도르곤을 도와서 전국에서 일어나는 반청반란을 막는데 힘썼고, 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힘썼다.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청나라의 전국통치를 공고히하는데 힘썼다.

 

순치원년(1644년) 칠월, 용골대는 도르곤의 명을 받아, '농업, 잠업을 근본으로 삼고, 도망한 호구를 채워넣음으로써' 사회생산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쓴다. 팔월, 용골대는 홀아비, 과부 혹은 살기힘든 자들을 봉양하는 정책을 쓴다. 전쟁이후 땅이 황폐하고 사람은 도망가서 백성들이 곤궁한 것을 보고는 용골대는 인력을 동원하여, 호구를 다시 정비하고, 토지를 다시 나눠주었다. 그리고 소위 삼향(요향, 초향, 연향)을 폐지한다.

 

순치2년(1645년) 이월, 용골대는 만주귀족들이 강매하는 위법현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위법사실을 고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포고를 내린다. 사월, 그는 경성내에 만주귀족이 일반백성을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린다. 억지로 노비가 된자는 석방하도록 한다. 이들 조치가 모두 제대로 시행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입관초기의 한족의 반발을 무마시키는데는 도움이 되었고, 청나라통치를 강화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