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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홍타이시와 도르곤: 누가 누르하치가 생각한 후계자인가?

by 중은우시 2012. 1. 30.

글: 인민망

 

누르하치가 죽기전 몇년동안, 그의 후계자문제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했다. 그중에 "귀영개(貴永介)에게 말하기를 '구왕자(九王子)를 후계자로 삼아야겠는데, 나이가 어리니, 네가 섭정의 직위를 맡은 후, 나중에 구왕자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이 자료에 근거하여, 최근 들어 많은 저작에서 이를 사실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고, 더떤 저작은 완전히 반대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하나하나 분석하고 판단해보도록 하자.

 

1. 대패륵(大貝勒)의 실정(失政)

 

천명4년(1619년, 만력47년), 사르후(薩爾滸)대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4월 초사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변경으로 병력을 옮겨 주둔하기로 결정하고, 계범산에 성을 쌓는다. 2달간의 공사를 거쳐, 그해 육월 초십일, 도성을 잠시 계범성으로 옮긴다. 그러나, 천명5년(1620년, 만력48년)삼월, 대푸진(大福晋)사건의 충격으로, 누르하치는 대패륵 다이샨(代善)에 불만을 가졌지만, '아들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대푸진이 주백, 망단, 금은을 많이 절취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에게 죄를 물어' 대푸진에서 폐위시키고 별도의 방에 거주하게 한다. 다이샨은 이 사건으로 인한 벌을 받지는 않았다. 당연히 근본적으로 말해서, 다이샨에게 무슨 잘못은 없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당시 한마음으로 국가가 '요동을 얻어야 편하게 살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요동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더이상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어, 후계자문제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 지나간다. 통일사업이 빨리 진전됨에 따라, 그해 십월 다시 임시천도를 결정한다. 다이샨은 합법적인 칸의 후계자로서, 마음 속으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주택문제를 복잡하게 처리했다. 그는 그의 장남 웨퉈(岳托)의 저택이 자신의 것보다 넓은 것을 보고 거기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이것은 원래 그들 부자가 알아서 협의하면 될 일인데, 그는 오히려 칸인 부친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가진다. 그는 부친에게 자신이 지은 좁은 주택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올기라고 권한다. 누르하치는 아주 기뻐한다. 다이샨이 지은 집이 자신의 집보다 훨씬 넓었다. 그리하여, '대패륵은 내가 만든 거주지에 거주하고, 나는 대패륵이 만든 거주지에서 거주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다이샨은 누르하치가 고른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좁아서 수리해도 불편할 정도였다. 암중으로 웨퉈에게 자신의 집을 내놓도록 요구한다. 여러 패륵들도 그가 뭘 원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망구얼타이(莽古爾泰)는 여러 패륵과 상의하지도 않고, 누르하치에 청하여 일꾼 천여명을 보내어 다이산의 집을 새로 짓도록 처리한다. 새 집이 완공된 후, 다이샨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이 땅이 아주 뛰어나니, 칸께서 거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한다. 누르하치는 와서 보고는 거기에 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다이샨이 원래 누르하치에게 주었던 집은 제패륵회의대아문으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에 지었던 집을 다이샨에게 넘겨준다. 다이샨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아민(阿敏)을 시켜 다시 보고한다. 누르하치는 할 수 없이 새로 지은 '아주 뛰어난' 집에서 이사나와 자신이 처음에 지은 집으로 돌아간다.

 

다이샨은 누르하치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장수이다. 공훈이 혁혁하다. 그러나,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안목이 길지 못하고, 마음이 좁았다. 대국을 보지 못하고 상당히 이기적이었다. 동시에 그는 공처가였다. 새로맞이한 부인은 차남 슈퉈(碩托)를 학대하여 가축을 관리하도록 시키고 마구 대한다. 그리하여 슈퉈가 더 이상 살기 힘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쁜 영향이 나타난다. 아민, 망구얼타이, 홍타이시, 다르한샤등이 모두 그에게 권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고치지 못했다. 일찌기 조선의 사신은 다이샨이 마음이 넓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장래에 칸의 지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보통의 보잘 것없는 사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게 되었다. 천명5년(1620년, 만력48년) 오월 이십팔일, 그는 맹세하여 말한다: "나는 부친 칸이 잘 가르치는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세 명이 동생 그리고 한 샤아거의 말도 듣지 않았으며, 처의 말을 믿어서, 부친 칸이 나에게 맡겨 지휘하게 한 대정을 잃었다. 나는 나의 처를 죽여버리고, 나의 잘못을 속죄한다. 이후 잘잘못을 뒤집거나 악으로 선을 갚거나 원한과 적의를 품는다면 나는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을 것이고, 좋게 죽지 못할 것이다." 이 맹세문을 보면, 이는 죄를 인정하는 글이다. 이 사실을 보면, 누르하치의 마음에서 이미 다이샨은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형제상핍(兄弟相逼)

 

천명4년(1619년, 만력47년) 부터 천명6년(1621년, 만력49년)에 이르는 3년간, 후금정권은 조선문제를 놓고,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주로 두 가지 문제였다. 조선의 전쟁포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와 조선에 출병하는 문제였다. 사르후대전이 끝난 후,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은 3000명을 이끌고 투항한다. 다이샨과 강홍립은 전쟁터에서 공동으로 맹세하고 강화한다. 다이샨은 먼저 병력을 도성으로 옮기고자 한다. 강홍립이 누르하치를 알현한 후, 조선의 관병을 석방하여 귀국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이들 병력의 전투력이 강한 것을 보고는 후금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분산방법을 채택하여 일부를 시골마을로 나눠보내는 외에, 핑계를 잡아 수백명을 죽여버린다. 다이샨은 쌍방이 이미 강화했으므로, '전쟁시의 약속은 어겨서는 안된다(陣上之約不可負)"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는 후금이 사방에 적을 두고 있어 원한을 품은 자가 많았다. 이는 스스로를 보전하는 좋은 방책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에 대하여 극력 "주화(主和)"를 주장한다. 그리고 조선관병을 죽여 신용과 명예를 잃는 것에 극력 반대한다. 홍타이시와 망구얼타이등은 투항한 관병을 죽여버리고, 조선에 출병하자고 주장한다. 그후에 다시 요동으로 진격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문제에 있어서 두 대표인물인 다이샨과 홍타이시는 '화와 전으로 이견이 있었고, 견해가 서로 달랐다". 이들간의 논쟁은 상당히 격렬했다. 형제의 논쟁은 최종적으로 부친인 누르하치가 결정하게 된다. 정상인의 이치대로라면 진리는 다이샨의 편이다. 누르하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좋다, 좋다. 네 뜻에 다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홍타이시와 망구얼타이는 누르하치의 속뜻을 짐작한다. 그리하여, 이번 군사노선을 둘러싼 논쟁은 누르하치가 다이샨을 후계자로 삼은 것을 동요시킨 중요한 원인중 하나였다.

 

이년간의 논쟁이 지속되면서 순식간에 천명6년이 된다. 후계자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구월 초십일, 누르하치는 사촌형제인 아둔(阿敦)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둔은 "용맹하면서도 지혜가 많은" 인물이었다. 후금의 장수들 중 '여러 장수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예전에 여러 전투에서 모두 공을 세웠다. 지금은 상황기의 고산액진이며, 누르하치의 신변에 브레인이었다. 누르하치는 일이 닥치면 혼자서 결정하는 스타일이었지만, 후계자문제에서는 아둔의 말을 들었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 "여러 아들 중에서 누가 나를 대신할 만한가?" 머리가 좋은 아둔은 이런 민감한 이슈에 대하여 쉽게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교묘하게 둘러댄다: "아들을 가장 잘아는 것은 부친입니다. 누가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르하치는 그에게 말해도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한다. 아둔은 직접 이름은 말하지 않고,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고,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람(智勇雙全, 人皆稱道者)"이라고만 말한다. 누르하치는 그가 말하는 아들이 홍타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는 다이샨의 후계자 지위를 박탈하고, 이미 홍타이시에게 물려줄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인개칭도'라는 말에서 보면 당시 홍타이시는 백성들 사이에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둔은 이런 심각한 문제를 다루면서 심각하지 않은 태도를 취한다. 그는 누르하치와 나눈 대화내용을 다이샨에게 전한다. 다이샨은 마음이 불안해지고 원한도 갖게 된다. 홍타이시는 부친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망구얼타이, 아바타이(阿巴泰)등과 빈번하고 비밀리에 의논한다. 아둔은 이 사정을 눈치채고는 몰래 다이샨에게 말해준다. 홍타이시, 망구얼타이가 너를 도모하고 있고, 일이 긴박하다. 준비를 잘 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둔은 원래 좋은 마음에서 말해준 것이고, 그에게 대비하라고 해준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다이샨은 부친에게 달려가서 울면서 호소한다. 누르하치는 깜짝 놀라서 사정을 물어보니, 아둔이 중간에서 말을 전한 것을 알게 된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누르하치는 홍타이시등을 불러서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조리 입을 꼭 다물고 부인한다. 그 결과 아둔은 여러 아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한 죄로 유폐되고 가산은 몰수당한다. 비록 실질적으로는 다이샨이 여러가지 잘못을 저질러 후계자의 자리에서 기본적으로 밀려났지만, 홍타이시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고, 형인 다이샨에 대하여 낙정하석(落井下石,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한다. 당시 사회에는 이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조선의 사신도 이미 이를 알아차린다. 그들 형제가 서로를 공격한다(兄弟位次相逼).  그리고 홍타이시가, '부친의 편애를 믿고' '형을 죽일 생각을 몰래 품고 있다.' 당연히 아둔은 애신각라 집안내에서는 지능이 뛰어난 인물이다. 누르하치는 후계자 문제에서 그 누구의 의견도 무시했지만, 그에게만 의견을 구할 정도였다. 이는 그가 누르하치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부주의한 바람에 누르하치에게 약점이 잡혀 목숨을 잃게 된다. 누르하치는 그를 죽여서 이후 정치가 어지워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정치투쟁의 잔혹성이다. 조선의 사신은 이에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누르하치는 스스로 자신의 장성을 허문 것이다."

 

3. 팔가동리정(八家同理政)

 

츄잉(褚英)의 피살로부터 누르하치의 7년에 걸친 노력도 후계자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다. 여러 아들간의 싸움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남은 5년동안 어쩔 수 없이 여덟 화석패륵(和碩貝勒)이 공동으로 국정을 다스리는 방략을 쓴다. 이 방략의 제출과 실시에는 모두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라. 누르하치는 여러 왕들을 훈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이 생각은 조상육왕시대로부터 왔다고. "나의 조상 여섯명은 동궈(東郭, 棟鄂), 왕자(王佳, 完顔), 하다(哈達), 야헤이(夜黑), 우라(兀喇), 휘파(輝發), 몽골(蒙古)가 모두 재물을 탐했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공적인 이익은 무시했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여서 결국 패망에 이르렀다." 이 역사의 교훈에서 그는 '이전의 일을 귀감으로 삼아서 팔가(八家)를 정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역사교훈도 받아들였다. 그는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사익을 위하여 동새을 죽이고, 아들을 죽였다. 그가 64세에 이르러,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니 전율이 일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명6년 정월 십이일,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의 자손들 중에서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그를 멸할 것이고, 형벌로 처리하여 살륙을 시작하지 말 것이다." 실제로 살륙을 시작하고 나쁜 짓을 한 자는 그 자신이다. 이제 그가 여러 아들들에게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도록 요구한 것이다. 누르하치가 만년에 시행한 치국방략은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라 볼 수 있다.

 

둘째, 여덟 화석패륵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도록(重義輕財)" 요구했다. 모든 재물은 여덟 집이 똑같이 나누어 가지고, 정치적으로는 여러 패륵중 1사람을 군왕으로 뽑는 것이다. 군주는 선량하고 현명하며 능력있고, 간언을 받아주며, 재주있고, 덕망과 위신이 있어야 한다. '힘을 믿고 마음대로 하는' 자는 안된다; 큰 일이 있으면 8가가 공동으로 상의하고, 동의를 받지 않고 임의로 시행해서는 안된다. 여러 패륵은 군주를 만날 때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공동으로 국정을 논의하며, 현명하고 좋은 인재를 추천하고, 간신을 멀리해야 한다. 한 두 사람이 군주의 앞에 가서 말해서는 안된다; 군주가 만일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의 행동은 좋은 것이 아니다. 공동으로 논의하여 바꿀 수 있다; 만일 바꾼 것에 대하여 군주가 불쾌하게 생각하면 강제로 바꾸어야 한다, 동시에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고, 신상필벌하여야 하며, 법제관리를 강화한다.

 

셋째, 유가의 충효사상을 받든다. 사회의 조화를 중시하고,  '사람의 군주로서 들판에서 노숙하는 이치는 없다. 그래서 성을 쌓는다. 군주가 밝아야 나라가 이루어지고, 나라를 잘 다스려야 군주가 된다. 군주의 아래에 왕을 두며, 왕이 안정되어야 백성이 안정되며, 백성이 안정되어야 왕도 안정된다. 그래서 하늘이 군주를 만들고, 군주는 신하에게 은혜를 주며, 신하는 군주를 공경하여야 한다. 왕은 백성을 사랑해야 하고, 백성은 왕을 존경해야 한다; 주인된 자는 종을 불쌍히 여겨야 하며, 종은 주인을 위하여야 한다. 종이 농업에 종사하여 주인과 함께 먹고, 주인이 얻은 재물은 종과 같이 써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하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사랑한다(天欣人愛) . 어찌 모두가 즐겁지 아니하리요." 이를 보면 그는 군주에서 종까지 상하가 모두 서로 '돌봐주기'를 요구했고, 사회가 '천흔인애'의 경지에 이르기를 요구했다. 어떻게 이 목표에 도달할 것인가? 여기에는 통치사상이 필요한데 그것은 유가사상이었다. 천명10년(1625년, 천게5년) 사월 이십삼일, 그는 여러 패륵과의 연회에서 정식으로 <논어>를 인용하여 말한다: "사람됨에 효제(孝悌)하면서 난을 일으키는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나의 자손들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서로 돌봐주어야 한다. 예법에서도 공경한 뜻을 잃어서는 안된다. 쉴 때도 나이든 자가 그 자식이나 동생을 돌봐주어야 한다." 그리고, 군주는 "설날 전날 자손들과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먼저 국군이 친히 여러 숙부, 여러 형들에게 절을 하고, 그 후에 칸의 자리에 앉는다. 칸과 칸으로부터 절을 받은 여러 숙부, 형들은 모두 일렬로 앉아서 나랏사람들의 절을 받는다." 여러 아들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하여, 그해 정월 초칠일, 그는 과거의 통일전쟁에서 충격을 받고,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건주여진 본부의 숙부, 백부, 예허부의 제온(諸媪). 사위의 모친, 여기에는 우라부의 장모인 두두후등을 모두 집으로 모시고, 자신의 세 부인에게 며느리의 예를 행하게 하고, 자신은 술을 무릎을 꿇고 바친다. 동시에 민족정책측면에서, 유가사상을 따라, 이전의 정책을 바꾼다. "예전에 우리 만주는 망골, 한인과 나라도 다르고 풍속도 달랐다. 이제 한 성에서 함께 살아가니, 같은 집이나 다름이 없다. 화합을 위하여 각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한다."

 

넷째, 감독매커니즘을 추진한다. 천명8년(1623년, 천계3년), 이월 초칠일, 팔기에 도당 8명을 두기로 결정한다. 만주의 매 기마다 심사관 2명을 둔다. 몽골, 한인에는 각각 심사관 8인을 둔다. 각 패륵에 대하여는 특별히 '괘문계시자(卦文啓示者)"를 두어, 칸이 내리는 말로 수시로 패륵에게 따르도록 일깨워주고, 엄격하게 감독한다.

 

여덟명의 화석패륵이 공동으로 국정을 통치하는 것은 실제상 정치체제를 새로 확립한 것이다. 완비된 군주제로 넘어가던 과도기에서 다시 귀족공화제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일종이 퇴보된 정책이고, 전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일정한 의미에서 여러 소패륵의 지위를 향상시켰고, 권력을 다투던 대패륵에게는 강력한 견제가 된다. 일정한 정도로 격렬한 후계자다툼을 완화시킨 측면이 있다. 동시에,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소위 "구왕자를 세워야 하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다이샨에게 섭정을 하게 하고, 장래 다시 "구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했다는 소문은 절대로 이런 체제하에서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누르하치가 이 제도를 실시하기 전에 후계자에 대하여 임시로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4. 후계자의 수수께끼

 

조선의 사신이 말한 도르곤이 후계자여야 하고, 다이샨이 잠시 섭정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후세사가들은 한 마디로 구름잡는 헛소리라고 치부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네 가지 측면에서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도르곤은 패륵이지만, 팔가(八家)를 대표하지는 못한다. 누르하치가 살아있을 때, 그는 여러 패륵중 어떤 지위에 있었을까? 처음부터 한번 얘기해보자. 일찌기 천명4년(1619년, 만력47년) 조선의 관리인 이민환이 다이샨, 홍타이시, 망구얼타이 이후에 '나머지 세 아들은 어리다'고 얘기했는데, 당시 아지거는 15살, 도르곤이 8살, 도도가 6살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중시되고 지위가 있는 여섯 아들인데, 그중의 세 명은 어린 아들이다. 조선인의 붓끝에서도 '나머지'로 개괄될 정도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음해 구월이십팔일, 누르하치는 다이샨의 '과오악행'으로 그의 집정지위를 박탈하고, 팔가를 선포하는데,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아민 타이지, 망구얼타이 타이지, 홍타이지, 더거레이, 웨퉈, 지르하랑, 아지거 아거, 도도/도르곤의 여덟패륵을 화석액진'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9살의 도르곤은 놀고 먹는 패륵에서 정식 화석액진이 된다. 그러나, 8가중 7살된 동생 도도와 합쳐서 1가가 된다. 그리고 이름도 도도의 뒤에 나온다. 천명6년(1621년, 천계원년) 십이월 초하루, 팔가회의를 개최할 때, 다이샨, 아민, 망구얼타이, 홍타이시, 도도(8살), 웨퉈가 참가한다. 천명8년(1623년, 천계3년) 오월 초닷새에 팔리전에서 일을 심의할 때, 출석한 사람은 다이샨, 아민, 홍타이시, 도도(10살), 아지거등이다. 천명9년)1624년, 천계4년) 원단에 팔각전에 모여서 절을 한 사람은 다이샨, 아민, 망구얼타이, 홍타이시, 아지거, 도도등의 패륵이다. 초삼일 몽골 은거데르맹과의 서약에 참가한 사람은 다이샨, 아민, 망구얼타이, 홍타이시, 아바타이, 더거레이, 자이상구, 지르하랑, 아지거, 도도, 웨퉈, 슈퉈, 사하렌등이다. 이상이 상황을 보면, 누르하치시대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르곤이 8가의 구성원이기는 하지만 8가를 대표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정확한 직위는 놀고 먹는 패륵, 화석액진이다.

 

둘째, 도르곤은 팔기의 주인이 아니다. 누르하치가 세 명의 어린 아들에게 기를 나눠준 것은 천명5년(1620년, 만력48년) 구월이십팔일 8가를 분석할 때이다. 당시 양황기의 60우록을 넷으로 나누어 누르하치와 세 어린 아들이 각각 15우록씩 갖는다. 총책임자는 당연히 칸인 누르하치이다. 도도는 정황기를 장악하고, 도르곤이 거기에 붙어 있었다. 구체적인 관기대신은 다르한샤였다. 바크스어얼더니도 이 기에 있었다. 아지거는 상황기를 장악했다.칸의 15우록도 이 기에 속했다. 구체적인 장기대신은 아둔 아거였다. 도도는 기주패륵이어서 상술한 회의에 출석했을 뿐아니라, 군사행동에서도 그가 나섰다. 그래서 천명9년(1624년, 천계5년) 정월 초엿새, 노르하치가 팔기에 각각 10명의 갑병을 파견하도록 했을 때, 출병한 패륵은 다이샨, 아민, 망구얼타이, 사패륵(홍타이시), 아바타이, 웨퉈, 아지거, 자이상구, 지르하랑, 도도였다. 양황기를 대표하는 패륵은 아지거와 도도였다. 십일일, 출병하여 은거데르의 호구를 취하였을 때는 다이샨, 아민, 망구얼타이, 사패륵, 아바타이, 더거레이, 아지거, 자이상구, 지르하랑, 도도, 웨퉈였다. 양황기를 대표하는 사람은 아지거와 도도였다. 이러한 사실은 도르곤이 비록 정황기에 속해 있지만, 15우록을 가졌을 뿐 기의 주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셋째, 도르곤은 아직 분가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중 하나는 천명5년 오월 대푸진의 숨은 재산을 몰수할 때, 아지거의 집안에서 두개의 장을 찾아내고, 그 안에 비단 삼백필이 들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아지거는 그 전에 분가하여 따로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이유는 천명9년(1624년, 천계4년) 사월 이십이일, 누르하치는 도도아거에게 명령하여 니칸 아거의 재산을 너에게 합쳐라'고 말한다. 그리고 '너의 집'은 '팔가'로서 니칸의 재물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한다. 이를 보면 도도는 팔가로서 자신의 집이 있었다. 도르곤은 15우록을 가지고 정황기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형제간에는 동일한 가에 속하지 않았다. 1개월후인 오월 이십팔일, 도르곤이 처를 맞이한다. 여기서도 자신의 집이나 재산문제는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도르곤이 여전히 누르하치와 함께 거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르곤은 가산을 나눠갖지 못했다. 이 일은 선례로 증명된다. 일찌기 츄잉의 형제가 처음으로 재산을 나눌 때, 더거레이에게는 몫이 있었지만, 망구얼타이에게는 몫이 없었다. 아마도 막내아들을 중시하는 습속때문일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오르곤이 기주패륵이 아니어서 지위가 도도의 뒷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왜 조선에 그가 후계자라는 소문이 퍼졌을까? 이것은 도르곤과 부친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하나는 도르곤이 누르하치의 신변에 머물러 있었고, 분가하지 않았으며, 다른 하나는 도르곤이 거칠고 무지렁이인 아지거나 문아하지만 호색하고 놀기 좋아하는 도도와는 달리, 총명하고 지혜가 넘치며, 심계에 뛰어났고 시세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어 수시로 임기응변할 수 있으며, 일부 공개된 장소에서 부친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을 외부인들이 보았을 것이다. 동시에 누르히치가 아마도 사사로이 대비 아바하이의 부탁을 받아서 도르곤에게 후계를 맡기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적이 있을지모 모른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가 일지 않는다. 조선의 소식은 '육진번호(六鎭藩胡)"에서 받은 것이다. 소위 '육진번호'라 함은 조선의 회녕, 경성, 종성등 두만강 동쪽 6개성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의미한다. 만력23년(1595년) 대추장 나둔(羅屯)등이 모두 다시 투항하여, 많은 사람들이 건주로 돌아온다. 이들 소위 '번호'는 조선에 여전히 직책을 가지고 있고, 관직을 받고 있는 사람으오 조선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천명4년(1619년, 만력47넌) 삼월 초팔일, 인필(仁必)이라는 번호가 있었는데, 그가 후금의 시위를 지내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가 보고 들은 사실을 몰래 조선의 관리들에게 말해준다. 도르곤의 후계문제등은 아마도 이들이 알려준 소식일 것이다. 도르곤의 후계자설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권을 독점한 누르하치에 있어서, 사적으로 대비와 몰래 상의할 수도 있었다는 점은 배제하기 어렵다.

 

5. 평생의 한

 

누르하치가 생전에 후계자문제를 확정짓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청군이 북경으로 들어온 후, 도르곤이 홍타이시의 칸의 지위는 원래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던 점을 보면, 당시 15살된 도르곤은 이 일을 뼈에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모친인 대비와 홍타이시간에 벌어진 격렬한 투쟁도 그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칸인 누르하치가 죽기 전에 후계자와 관련하여서는 두 개의 암류(暗流)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대비의 어린아들들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홍타이시세력이다. 아래에서 분석해보기로 하자.

 

(1) 모친이 아들의 즉위를 도모하다.

 

아바하이가 폐위된 지 1년후, 팔기병은 일거에 요양, 심양등지를 점령한다. 천명6년(1621년, 천계원년) 사월 초삼일, 누르하치는 흥분한 심정으로 8명의 우록액진을 보내어, 200여명의 팔기전사를 데리고 푸진(福晋, 부인)을 맞이해오도록 보낸다. 초닷새, 여러 푸진들이 새로운 수도인 요양성에 도착한다. 여러 푸진들 중에서 '칸의 대푸진'은 칸과 여러 패륵, 대신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여러 병사들이 길거리의 양측에 서서 영접한다. 성안에서 칸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땅에는 백석(白席)을 깐다. 그 위에 빨간 카페트를 깔아서 여러 푸진들이 이를 밟고 칸을 알현한다. 이를 보면, 아바하이는 이미 대푸진의 지위를 회복하고, 칸과도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의 한동안, 아바하이는 계속하여 기주패륵인 도도와 함께 살았다. 천명9년(1624년) 사월 이십이일, 칸이 명을 내려, "도도 아거의 모친. 너는 원래의 예로 니칸 아거의 모친을 공양하라." 니칸아거의 모친은 바로 츄잉의 처이다. 평등하게 대우하도록 하고, 동시에  "도도 아거는 니칸 아거의 재산을 너의 곳에 합쳐라"고 한다. 즉, 추잉의 셋째아들 니칸은 그의 모친과 가산을 데리고 정황기 기주패륵인 도도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집안의 주요책임자는 아바하이이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와 아바하이는 여전히 별거하고 있었다. 아바하이이 명예회복은 세력형성의 전제이다. 동시에 도르곤이 칸인 누르하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바하이의 주요 참모는 그녀의 남동생인 아부타이(阿布泰)였다. 아부타이는 우라 패륵 만타이(滿泰)의 셋째아들이다. 천명4년(1619년) 예허부의 멸망 전날, 아부타이는 후금에 투항한다. 모친인 두두후등은 후금에서 가족이 함께 만난다. 이는 우라나라씨의 세력을 결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부타이는 누르하치의 외숙으로서, 칸으로부터 특수한 대우를 받는다. 그해 정월 망구얼타이의 인솔하에 외숙 아부타이는 총병관 파관리의 앞에서 6천명을 이끌고 여순을 함락시킨다. 천명6년, 십일월 이십팔일, 그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몽골 국경으로 가고, 전공이 혁혁했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입고 있는 수달피흰웃옷을 아부타이에게 준다. 천명10년(1625년, 천계5년) 팔월 십사일, 아부타이는 대장 양구리, 파관리등을 이끌고 과러차부를 취하고 돌아온다. 칸이 패륵들을 데리고 5리바깥까지 나가서 개선하는 아부타이에게 연회를 베풀고 영접한다. 이를 보면, 아부타이는 이미 후금의 고급장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부타이가 투항한 후, 관직이 날로 올라간다. 천명7년(1622년) 정월 십삼일 이미 16명의 도당총병관 탕구다이 아거등과 나란해진다. 그해 삼월 팔대도당중에서 지위가 하다부의 멍구보로의 아들인 누르하치 사위 우르구다이에 바로 다음가게 된다. 그 달에 우르구다이가 삭탈관직당해서, 아부타이 외숙은 도당중 1인자 겸 정황기의 고산이 된다.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양황기의 60우록은 그 실력이 다이샨의 양홍기와 비슷했다. 홍타이시, 아민, 망구얼타이보다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여기에 국모인 아바하이는 '기민'했다. 그리하여 일정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약점은 두 기주패륵인 아지거와 도도의 나이가 어려서 위신과 명망이 크지 못했다. 양황기 대신들의 응집력도 부족했다. 이때, 아마하이와 아부타이는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경쟁적수는 교활하고 지혜를 갖춘 홍타이시이다. 그리하여 누르하치가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기 전에, 그들은 일찌기 '공모'하여 홍타이시를 죽이고자 한다. 소위 "욕함태종(欲陷太宗), 음행간악(陰行奸惡)"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칼을 갈만큼 갈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공한 후 누구를 세우려고 했을까? 정친왕 지르하랑은 이렇게 회고한다: "무르건왕(墨爾根王)의 모친과 아부타이 부부는 태종을 모함하려고 여러가지 나쁜 짓을 행했는데, 신등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음모계획은 도르곤을 칸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아바하이는 이미 마음 속으로 생각을 굳혔다. 심지어 칸인 남편과도 얘기했을 것이다. 소위 칸은 "국사, 자손을 위하여 일찌감치 명백히 가르침을 내렸다는 것이다. 도르곤이 홍타이시의 칸의 지위는 원래 자신의 것을 빼앗아간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2) 누르하치의 뜻은 다른 아들에 있었다.

 

청나라때 사서는 누르하치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고, 그가 '국사, 자손을 위하여 일찌감치 명백히 가르침을 내렸고, 임종때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팔가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칸의 지위는 공동으로 추천해서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러 아들의 경쟁에 각자 생각이 달랐다. 홍타이시는 이 문제에 있어서, 계속 당겨진 화살꼴이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장점이 있었다. 하나는 그가 칸인 누르하치의 '편애'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를 마치 자신의 '눈알'처럼 아꼈다는 것이다. 총애가 지나치면 교만해지는 법이다. 후계자의 자리는 그에게 있어서 절대로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홍타이시가 용맹하고 힘이 넘치며, 전공이 뛰어났다" 이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소위 '인개칭도"라는 것은 바로 이를 증명한다. 여러 패륵들 중에서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천명6년(1621년), 구월 숙부 아둔이 칸의 마음 속을 알아낸 후, 그가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묵인된 사항이었다. 셋째로 아바하이의 재물절취하건이후, 칸은 주단 각 삼독을 홍타이시에게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는 홍타이시에 대하여 특별히 신뢰했던 것같다. 누르하치는 후계자문제에서, 홍타이지에게 마음을 둔 것같다는 것에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이샨의 후계자 지위가 실패한 후, 칸은 일찌기 홍타이시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두 가지 장애가 있어, 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나는 그가 팔패륵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국정사상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원래 장자계승제를 더 이상 견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념 속에서는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천명8년(1623년) 육월, 그는 홍타이시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 혼자서 다른 사람들을 넘어서서, 여려 형들조차 생각지 않고, 네가 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느냐?" 이는 그가 형들을 놔두고 동생인 홍타이시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넘겨주는데 주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누르하치는 홍타이시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는 '현덕하고 총명하지만, 도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천명6년(1621년) 아둔이 폭로한 동실조과(同室操戈) 사건은 비록 홍타이시등이 극력 부인했지만, 칸으로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에선포한 8가의 공동통치에 관한 담화에서 '나의 자손들 중에서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그를 멸할 것이고, 형벌로 처리하여 살륙을 시작하지 말 것이다; 만일 잔인한 자가 있으면 하늘이 주살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형제들끼리 창칼을 들이대려고 하면 하늘과 땅이 어찌 모르겠는가. 만일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직을 박탈해야 하다." 이 말은 명백히 겨냥하는 바가 있다. 동시에 계속하여 '강세인 자' '공평하고 너그럽지 않은 자'를 비판한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홍타이시에게 '우매'하다고 질책한다. 이는 한철불성강(恨鐵不成鋼)의 심정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칸은 결국 홍타이시를 후계자로 정하지 못하고죽지만 그런 뜻은 있었던 것같다. 이것이 아마도 도르곤으로 하여금 평생 한을 품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3) 평생 한을 간직하다.

 

천명11년(1626년, 천계6년), 도르곤이 15살이 되었을 때, 평생의 불행이 그에게 밀려온다. 칠월 이십삼일 누르하치의 몸이 좋지 않아 위병 3천을 이끌고 청하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반달후인 팔월 초십일 밤, 모문룡의 부하 관병이 구아령으로 와서 위협한다. 그리하여 십일일 새벽, 가벼운 배를 타고 대자하를 따라 도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바하이에게 마중나오라고 명한다. 부부는 심양에서 40리 떨어진 애계보에서 만난다. 그날 누르하치는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이다.

 

누르하치는 중요한 순간에 아민을 따르게 한 외에 단지 대비를 오라고 했을 뿐이다. 분명히 대사를 얘기하기 위함이었을 것인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후금의 정국에 역사적인 진동이 발생할 때였다. 이 진동은 4가지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첫째, 홍타이시는 장기간 여러 소패륵들을 구워삶았는데,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일찌기 다이샨이 폐위되고, 팔패륵이 공동으로 국정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홍타이시는 웨퉈, 지르하랑, 더거레이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매번 패륵회의가 끝나면, 이들 소패륵은 약속이나 한 듯이 홍타이시의 집까지 같이 갔다. 바로 이들 소패륵들이 홍타이시가 필요할 때 큰 도움을 준다. 누르하치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다이샨의 장남 웨퉈, 삼남 사하렌이 먼저 부친을 설득하여 홍타이시를 칸에 올리자고 말한다. 다이샨은 후계자에서 물러난 후, 홍타이시에 감탄한다. "너는 나보다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다. 너는 반드시 나를 대신하여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의미는 양홍기가 홍타이시편에 섰다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삼패륵 망구얼타이는 일지감치 생활에 필요한 것을 홍타이시로부터 도움받았다. 먼저 조선을 공격한 후 요동을 치자는 이슈에 있어서도 망구얼타이는 홍타이시의 편을 들었다. 자연히 정남기도 다이샨이 약간 설득하자 홍타이시의 편으로 왔다. 이패륵 아민은 조건부 지지를 한다. 이렇게 하여 홍타이시는 팔기중에서 절대적인 과반수의 지지를 차지한다.

 

둘째로 중요한 순간에 칸은 대비를 경성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리하여 양황기는 우두머리가 없는 꼴이 되었다. 홍타이지세력의 움직임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다. 홍타이시는 누르하치의 유언등을 착착 준비했다. 십일일 저녁, 아바하이는 비통한 심정을 안고 남편의 영구와 함께 심양왕궁으로 돌아온다. 아직 숨쉴 여지도 갖기 전에, 다음 날 새벽 다이샨등이 그에게 '유언'을 선포한다. 그녀가 '질투심에 휩싸여 매번 누르하치를 불쾌하게 하였으며, 변란을 꾀했지만, 누르하치가 현명하게 이를 막아냈다. 후일에 나라를 어지럽힐지도 모르겠다"라고 미리 여러 왕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순장하게 하라."고. 그리고 선제의 유명이 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핍박한다. 다이샨등 강대한 세력의 위협을 받자, 아바하이는 하늘에 호소해도 방법이 없고, 땅에 호소해도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저 애통하게 최소한의 요구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두 어린 아들 도르곤, 도도를 부탁하고, 여러 패륵들이 은혜를 베풀어 길러주길 바란가고 한다. 그리하여 그날 진시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향년 37세이다. 그녀가 남긴 최대의 수수께끼는 바로 애계보에서 누르하치가 임종시 무슨 말을 했을까이다. 도르곤이 홍타이시에게 '원래 내 것인 칸의 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소리친 것은 아마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조에게 전위에 관한 유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상의 사실에서 세 가지 문제를 파악해 낼 수 있다. 첫째, 16세기 90년대에서 17세기 30년대까지는 중국봉건사회의 대변혁기이다. 만주의 귀족들이 이 대변혁의 서막을 열어제킨다. 시대의 인물인 도르곤은 이 폭풍우의 세례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둘째, 애신각라는 소수민족의 신분으로 이 역사의 중임을 맡는다. 형제, 부자간에 서로 죽이는 것은 같이 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 중 가장 우수한 자를 골라서, 역사가 부여한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누르하치는 그 모범을 보인다. 홍타아시는 어떤 측면에서건 도르곤보다 우수하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올라선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셋째, 역사는 어떤 때는 불공평하다. 피냄새가 충만한 권력투쟁과정에서, 만15세의 도르곤은 고귀한 귀족자제로서 따스한 가정생활을 지내다가 ,졸지에 양친을 잃고마는 고아의 처지로 전락한다. 모친이 핍박을 받아 자살하는 광경도 당한다. 지혜있고 심계가 깊은 도르곤은 홍타이시등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을리 없다. 이로 인하여 나중에 도르곤은 일련의 풍파를 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