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금창(王金昌)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빨리 흐른다. 순식간에, 판자위앤골동시장은 2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북경의 골동품시장은 오랫동안 정처없이 떠돌다가 결국 판자위앤에 자리잡았다. ‘판자위앤’은 이미 국내외에 유명한 골동품시장의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북경의 골동품시장의 시작은 판자위앤이 아니었다. 푸창제(福長街)였다.
개혁개방후에 북경에서 골동품시장이 생겨난 것은 80년대초반이었다. 당시에 모든 일은 새로워지고, 광동, 심천의 개혁개방은 날로 새로워졌다. 계속하여 들려오는 소식에 사람들은 흥분하고, 홍콩 대만의 노래가 온 거리에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점점 철밥통과 평균주의를 버리고, 더 이상 가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남녀청년들은 청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결혼때는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옷장을 마련했다. 여름에 보통 식당에서는 한 꼭지에서는 맥주가 나오고 다른 꼭지에서는 수돗물이 나오며, 같이 팔곤 했다. 어른, 아이들이 세수대야나 밥솥을 들고가서 식당에서 받아가지고 집으로 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손님을 접대했다. 길거리에는 생맥주가 파이프를 통해서 나오는 것을 마시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북빙양 사이다보다 맛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맥주에는 말똥냄새 비슷한 서양냄새가 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에 팔지는 산문을 하나 쓴 적이 있는데, 제목이 <<이곳에는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분다>>였다.
시장경제가 막 시작되었을 때, 몰래 숨겨놓았거나 혼자서 보고 즐겼던 문화재도 가치있는 물건이 되었다. 골동, 서화는 점점 시장으로 밀려나왔다.
1980년, 푸창제 오가(五街)에 김(金)씨성의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었다.사람들은 그를 김마자(金麻子)라고 불렀다. 김마자는 황실후예이고, 거처하는 곳은 길거리에 붙은 사합원(四合院)이었다. 그는 집안의 물건을 처음에는 골목으로 가져나와 팔았다. 다른 사람들도 단속하는 사람이 없자, 골동품을 가져나와서 팔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루게 된다.
아마도 1980년경인 것같은데, <<북경일보>>에 자그마하게 뉴스가 나온다. 내용은 북경에 구화시장(舊貨市場)이 회복되었고, 가구 같은 것들을 팔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후 푸창제 오가의 100미터가 되지 않는 골목에는 모조리 옛날 물건을 팔았다. 옛날 물건들 속에 골동품도 섞여 있었다.
나와 함께 골동품을 사러 다니던 친구 우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푸창제 오가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한다. 그때, 그는 국가체육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월초에 급여를 받은 후, 푸창제에서 35위안에 청화릉구반을 샀다. 반의 바닥에는 원앙희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직경은 20센티미터 정도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 불안해했다. 그는 처음으로 이렇게 큰 돈을 들여서 쓸모없는(사용용도가 없는) 물건을 산 것이다. 부인에게 보여주니, 부인은 한번 쳐다보고는 놀라서 하루종일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35위안은 한달치 생활비였다. 노인도 모셔야 하고 아이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그래서 그는 다시 그 물건을 들고 주인에게 물리려고 갔는데, 이미 길거리에 물건을 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물으러 다녀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기가 죽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침 북경문물회사의 진선생을 만난다. 진선생은 물건을 보더니 그가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물건을 수도박물관에 팔았다. 지금도 수도박물관에 놓여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가격은 35만위안은 될 것이다.
골동품이 푸창제 오가에서 팔리는 것은 나는 그저 구경만 했다. 수십위안의 급여밖에 받지 못하는 본인은 집안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이런 쓸데없는 물건을 살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푸창제 오가에서 옛날가구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명청가구중에서 황화리, 자단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이 당시에 루마니아에서 수입한 양쪽문이 달린 옷장의 80위안을 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에 도금불상, 자기, 서화를 이들 옛 옷장이나 서가 속에 넣어 놓고 몰래 팔기도 했다.
푸창제의 이후에 상라이제(象來街), 허우하이(後海)..등이 생겨났다. 한번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문화재부서는 구화시장에서 문화재를 사고파는 혐의를 잡고 단속하고자 하여, 막 생겨나던 골동품시장은 큰 타격을 입는다. 골동품시장은 게릴라시장이 되어 단속반원이 추격하고, 도망치고 숨는 시장이 된다.
골동품시장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 허우하이가 처음인 것같다. 시기는 80년대 후반일 것이다. 아마도 1987년가량이 아닌가 싶다. 먼저 은정교 주변의 담장에서 시작하고, 나중에는 넓은 공지에서 열렸따.
필자는 기억한다. 덕승문에서 하차하여, 빈하후통을 지나면, 길이 하나 나타난다. 길의 왼쪽은 스차하이이고 오른쪽은 송칭링 고거이다. 고거는 허우하이 북하연46호에 있다.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저택이다. 주홍색의 대문은 물결이 찰랑이는 스차하이를 마주하고 있고, 대문에는 ‘중화인민공화국명예주석 송경령동지고거’라는 금색편액이 걸려 있었다. 고거의 맞은 편에는 스차하이이다. 봄에는 호숫가에 버드나무가 파랗게 싹을 틔운다. 버드나무가지는 호수의 수면까지 늘어지고, 맑은 향이 난다. 다시 동쪽으로 걸어가면, 멀지 않은 곳에 은정교가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남쪽이 바로 골동품노점거리이다. 허우하이때의 골동품노점은 진짜물건이 정말 많았다. 자신도 알아보지 못해서 가짜를 진짜처럼 파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처럼 새물건을 깨트리거나 낡게 만들어서 모방하거나, 곁에 바람잡이를 두고 손님을 끄는 비열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허우하이에서 자주요대관(磁州窯大罐)을 하나 수장했다. 관의 배는 항아리처럼 불룩하고, 통째로 갈색의 채색글씨로 원나라초기 하남포정사 진초암의 <<산파양>>사가 쓰여 있었다. 글씨도 힘이 있어서 당시 서예명가인 선우추, 풍자진의 기풍이 있었다.
이 풍수길지는 결국 골동품시장을 붙잡아두지 못했다. 얼마전에 필자는 개혁개방후 비교적 초기에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던 골동품노점시장의 옛자리를 가보았다. 이곳은 여전히 사람이 붐비었다. 다른 점이라면 후통의 양편에 현대적인 분위기의 술집, 커피숍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하화시장’이라는 붉은색의 패방만이 옛날을 기억하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이미 내가 옛날에 알던 것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오늘은 어제같지 않다. 젊은 사람들은 아마도 북경에서 일찍이 있었던 이 곳의 골동품시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 곳에서 느끼는 느낌은 북경의 유명한 술집거리라는 것일 것이다.
골동품의 족적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전했다. 차례로 징송백화점의 남쪽에 있는 건축부지에 있다가 나중에 화위교아래와 다리 동쪽의 길가로 길을 따라 이어진 넓은 공지에 있었다. 비가 내리면 화위교 아래로 가서 비를 피했다.
이들은 모두 담장이 둘러쳐진 공지였다. 내 생각에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같다. 하나는 어느 부서도 골동품판매를 하도록 허가할 수가 없었고, 둘째는 집법부서가 나타나면 쉽게 도망칠 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화위교의 동북쪽으로 지금의 골동서화성이 있는 곳이다. 당시에 아마도 그곳이 막 철거되어, 2,3무(1무는 200평)의 공한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은 아마도 1992년 겨울에서 1993년 초봄까지일 것이다.
최초의 골동품점포는 백교와 홍교의 두 곳에서 1980년대말에 나타난다. 점포는 간이의 철피방이다. 필자는 백교시장에서 <<추산행려도>>를 매입한 적이 있다. 그림에는 7명의 노인이 각각 나귀를 한 마리씩 타고 있는 유머스러운 것인데,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그들은 오후의 햇볕을 쬐면서, 작은 다리를 건넌다. 양쪽은 버드나무가 자라는 좁은 길이고 산촌으로 향하여 간다. 유종원체의 서예솜씨로 “사양수류계교로, 보작추산행려도’라고 썼다. 이 그림은 명인의 솜씨는 아니지만, 필자가 비교적 초기에 백교철피방골동시장에서 산 것이어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필자는 숭문문에 살았다. 필자는 판자위앤에서 물건을 구경하면서, 백교를 지날 때면, 당시의 철피방을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그때를 그리워한다.
같은 시간의 철피방점포는 허우하이의 노점상 곁에 있는 하화시장에도 있었다. 하화시장은 꽃, 새, 물고기, 곤충등을 파는 몇 개의 철피방이 있었다. 외지에서 허우하이에 와서 물건을 팔려다가 다 팔지 못하면, 물건을 하화시장의 철피방에 넘긴다. 원래 화조를 팔던 사람들이 곁의 노점상에게서 골동품을 사서 점포에 전시하고 팔기 시작한다. 이들 물건은 물고기나 새보다 잘 팔렸다. 가격도 괜찮고, 이익도 컸다. 그러다보니 꽃, 새, 물고기, 곤충을 팔던 곳이 골동품점으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하여 몇 개의 철피방이 골동품점포로 바뀌게 된다.
약간 늦어서 철피방식의 간이 골동품점은 징송중제의 한 곳에도 생긴다.
이때까지, 모든 골동품노점, 간이방점포는 모두 자발적인 것들이었다. 골동품을 파는 모든 가게는 당시에 골동품점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구화, 공예품시장이라고 불렀다.
판자위앤이 골동품시장이 된 것은 90년대초이다. 판자위앤에 자리잡게 된 것는 천시, 지리, 인화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천시라는 것은 시장경제의 물결과 홍콩골동품시장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 가치가 있는 골동품, 서화는 집안의 장 속에 넣어두고 썩히기 보다는 거래할 시기가 되었고; 소위 지리라는 것은 판자위앤지구는 2환로와 3환로에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했고, 외지주변지역의 물건판매자(예를 들어, 청나라말기의 골동품집산지는 하북 탄현, 숙년등지였고, 그곳에서 골동품상인이 많이 왔다)들이 오기 편했으며; 인화라는 것은 조양구정부는 안목이 있어, 골동품시장의 미래를 보고, 판자위앤이 형성되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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