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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남오(南澳) 1호: 중국의 해저유물

by 중은우시 2010. 5. 19.

글: 인민망

 

 

 

 

남오1호의 인양현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먼저 심천에서 고속버스틀 타고 고속도로로 4시간반을 달려 산두(汕頭)에 도착했다; 장산미 항구에서 배를 타고 40분만에 남오도(南澳島)에 도착한 후, 다시 어선을 타고 40분을 가서야 비로소 남오1호가 수장되어 있는 "삼점금(三點金)" 해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양선인 "남천순(南天順)"호는 조용히 푸른 바다위에 떠 있었다. 20여명의 국가수중문화유산보호센터 대원들은 '남천순'호에 상주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개략 400년전에 침몰된 명나라때의 남오1호가 있다. 2007년 5월에 어민이 발견한 후, 지금 인양작업이 진행되는 중이다. 2010년 국가수중문화유산보호센터의 '1호공정'인 이번 인양작업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오늘은 보기 드문 좋은 날씨입니다. 파도도 조용하고, 가시거리도 아주 좋습니다. 육지에서 10해리를 볼 수 있고, 물속에서도 3미터를 볼 수 있습니다." 국가수중문화유산보호센터의 범이연(范伊然)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돌았다. "조수간만표에 따르면, 오늘 수중작업시간은 각각 오전 7시에서 9시, 오후 1시에서 3시입니다. 사실 수중고고작업은 추운 것도 겁나지 않고, 비도 겁나지 않습니다. 단지 바람이 겁날 뿐이고, 가시거라가 좋지 않은 것이 겁날 뿐입니다."

 

곧 수중으로 들어갈 왕지걸(王志杰)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8명이 수중으로 들어갑니다. 1조에 2명씩. 잠수는 아주 위헙하고, 매 10미터마다 기압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두 사람이 1조로 하여 서로 잠수파트너가 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고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물속에서는 그저 손동작으로 의사소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고작업인 경우에는 더더욱 서로 협조가 잘 되어야 한다. 동료가 없다면 혼자서 시커먼 세계에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왕지걸은 산두징해박물관에서 왔고, 현지 사람이다. 오늘의 주요입무는 수중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수중문화재가 나오는 수중평면도, 기물위치를 표시한다. 그래서 잠수때 화판(畵板), 붓, 조명도구, 자(尺)등의 도구를 들고 들어갔다.

 

13시, 수중촬영을 책임진 이빈(李濱)은 처음으로 물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빈은 이 20명의 고고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1989년, 중국역사박물관과 오스트레일리아는 합작으로 제1기 수중고고전문인력훈련반을 만들었다. 수중고고전문가의 '황포1기'라고 불린다. 2009년 10월까지 이미 5기가 배출되었다. 목적은 잠수능력이 뛰어난 고고학자를 수중고고전문가로 키우는 것이다.

 

남오1호의 고고팀에는 황포5기까지 매기마다 모두 사람이 있다. 이빈은 제1기의 선배이다. 현재 수중촬영분야에서 최고전문가이다. 고고팀의 두 대장인 국가수중문화유산보호센터의 손건(孫健)과 광동성문물고고연구소의 최용(崔勇)도 모두 1기의 동창이다. 1989년, 전국에는 겨우 11명의 수중고고대원이 있었다. 10여년간 배양하여, 지금은 수중고고대원이 10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매번 잠수하기 전마다, 2명이 대원이 등에 짊어지는 것을 도와준다. 한 쌍의 고압산소통은 무게가 30킬로그램이다. 기록요원은 곁에서 잠수인원의 이름, 입수시간, 출수시간, 주요임무 및 입수시의 기압, 출수시의 기압을 기록한다.

 

27살된 김도(金濤)는 오늘의 기록요원이며, 북경대학 고고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남해1호" 수중고고발굴 때,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루었다. 그는 '황포5기'이다. 수중고고전문가증서가 있을 뿐아니라, 출수(出水, 出土가 아니라)문화재보호와 회복의 교욕증서도 가지고 있는 다방면의 인재이다.

 

13:47 제1차 잠수인원이 출수했다. 잠수시간은 이미 39분에 이르렀다. 그후 매 1분마다 사람들이 차례로 나왔다. "눈앞에 왔다갔다 하는 것은 모두 너희들의 발이다" 침몰선박의 표면에 있는 문화재를 수집하던 석준회(石俊會)가 웃으면서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는 광동성박물관에서 왔다. 남오1호의 안방살림을 맡고 있다. 자기, 철기를 포함한 모든 출수문화재의 정리, 분류, 등기는 모두 그의 담당이다.

 

아마도 성과가 있었는데, 출수하는 인원들은 모두 흥분되어 있었다. 조금도 피로해보이지 않았다. 손건은 오전에 물속에 들어간 바 있고, 오후에는 사람들의 수중작업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표정으로 걸어와서 사람들과 물속의 상황을 얘기했다.

 

14시경, 잠수복을 갈아입기도 전에, 사람들은 인양해낸 제1차 자기를 살펴보았다. 비록 요며칠 출수된 자기는 모두 동일한 칸에서 나왔지만, 매번 새로운 물건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흥분하는 것이다. 문화재는 6개의 파란색 플라스틱보관상자에 담겨서, 회전상자에 넣어져서 거꾸로 매달린다. 회전상자는 그물모양의 밧줄로 덮여 있다. 이렇게 해야 문화재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고궁박물원의 도자기전문가 진화사(陳華莎)는 아주 기뻐했다. 왜냐하면 이번에 인양된 것에서 '미불배석(米巿拜石)"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접시와 '세한삼우(歲寒三友)' 그릇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오1호가 한문화권국가로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추가로 증명하는 것이다.

 

물속에서 있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많은 자기들의 유면(釉面)은 손괴되어 있었다. 일부 자기는 파손되었다. 석준회는 말한다: "수중고고는 보물캐기가 아니다. 이들 자기의 가치는 그 가격이 얼마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