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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황제와 영국마차 (II)

by 중은우시 2009. 8. 15.

 

중국황제가 영국을 중시하게 하기 위하여 영국인들은 고심을 거듭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건륭제가 서양물건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들은 유럽의 기술진보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제품을 골랐고,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준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물건을 가져간다. 천체운행의(天體運行儀), 지구의(地球儀), 허셀망원경, 파크투명거울, 기압계등의 과학기기; 그리고 증기엔진, 면방기, 소리기, 직포기등의 공업기기; 그리고 샹들리에, 시계, 기직포료, 웨지우드도자기, 진동방지장치가 된 마차, 특수강철로 제작된 도검등 생활용품; 그리고 유탄대포, 박격포, 카빈소총, 기관총, 연발권총등 선진무기와 110문의 화포를 장비한 대형전함 '군왕호'의 함정모형도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열기구조종사까지 데려왔다. 만일 황제가 흥미를 보이면, 영국의 열기구에 태워 하늘로 띄워 한바퀴 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동반구에서 하늘을 나는 첫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

 

영국인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건륭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 선물에 흥미를 충분히 나타냈다. 일찌감치 영국인이 도착하기 몇개월전에 황제는 이미 직예, 산동, 강소, 절강, 복건등의 옃개 성의 지방최고장관에게 사전에 준비를 충분히 하라고 지시했다. 언제 영국선박을 보게 되면, 바로 북경으로 호송하고 절대 시간을 끌지 말라고.

 

9개월의 항해를 거쳐, 영국사절단은 마침내 중국에 도착한다. 이때 황제는 승덕에 있었다. 그의 83세 생일축하행사가 이곳에서 벌어졌따. 선물이 너무 많아서, 승덕까지 운송하자면 파괴되는 것이 있을 수 있을 것같았다. 황제는 특별히 지시를 내려, 비교적 큰 8개의 선물은 북경에 설치하고 나머지는 '조공사신'과 더불어 승덕으로 운송하여 그것들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

 

다만, 승덕에 도착한 후, 영국인은 중국황제에게 삼궤구고의 예를 취하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이는 중국조정의 안색을 졸지에 바꾼 사건이었다. 영국인이 보기에, 그들이 중국에 대하여 평등한 우호방문을 한 것이었다. 중국인이 보기에 국제관계에 평등이라는 것은 없었다. 중국에 오는 자는 모두 중국에 순종하러 온 것이다. 영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왜 이렇게 삼궤구고의 예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이 왜 그다지 배우기 어렵지도 않은 동작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국인들의 오만불손도 황제의 영국예물에 대한 관심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황제가 먼저 본 것은 승덕까지 운송되어 온 크기가 비교적 작은 선물이었다. 그는 이들 '공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약간 실망감을 느꼈다. 황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교묘한 완구였다. 그는 옷감은 필요없었다. 그가 보기에 영국의 옷감은 모자를 만드는데 유용한 외에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많은 모자는 필요없었다. 총기는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노인은 비록 영국의 총이 아주 정교하다는 것은 발견했지만, 그는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물며 생일날 칼과 총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험사용도 해보지 않는다. '천리경'은 강희연간에 이미 중국에 전해졌다. 대형망원경 2개를 그는 하루종일 바라보았지만, 다른 망원경은 정면에서 보는데, 이 망원경은 측면에서 본다는 것만 달랐지,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같았다. 사실상, 전문가만이 허셀망원경과 보통망원경의 본질적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영국인은 선물리스트를 쓰면서, 이 망원경의 특수한 점을 아주 강조했다. 그리고 특별히 그것이 대과학자인 뉴튼이 발명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영국인의 이런 마음씀씀이는 헛고생이었따. 번역할 때, 통역은 일을 줄이기 위하여, 아예 번역하지 않았던 것이다. 뉴튼의 이름은 아예 빠져버린다.

 

비록 이들 소형선물에 대하여는 약간 실망했지만, 북경에 남겨둔 대형선물들이 있지 않은가. 황제는 그래도 기대에 충만했따. 어쨌든 이들은 삼천명이 몽ㄹ긴 것이고, 설치와 시운전에 20여일이나 소요되었으니, 신기하교 교묘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하루빨리 이들 선물을 보기 위하여, 황제는 매년 생일후에 거행하던 사냥활동도 취소하고, 앞당겨 북경으로 되돌아간다. 북경에 되돌아온 후 황제는 북경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직접 원명원으로 가서 공품을 본다.

 

그러나, 황제의 반응은 영국인들에게 아주 의외였다. 영국인들은 "천체운행기"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입체적이고 분명하게 태양계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은 이것을 절기를 계산하는 대형 시계 정도로 생각했다. 황제는 이 커다란 시계가 도대체 뭐하는데 쓰는 건지는 흥미가 없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안에 있는 기관이 이전에 본 시계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기술자가 보고한 바로는 신기한 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양인들에게 배우라고 보내어진 태감, 장인등은 모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쳐다봤지만, 시계안의 기어와 축이 운전되는 데 무슨 기묘한 점이 없었고, 시계와 다른 점이 없다고 말했다.

 

황제는 그리하여 천체운행의에는 관심이 없어진다.

 

지구의에 대하여는, 황제가 더더욱 눈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강희때 중국에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지구의를 통하여 그들의 지리지식과 항해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지구의는 영국여왕폐하의 명을 받아 세계각지의 장거리항해에서 발견한 새로운 땅과 모든 항해노선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괴한 지명과 부호에 대하여 황제는 아예 봐서 알 수가 없었다.

 

선물중에서 영국인들이 가장 희망을 건 것은 '군왕호'이 축소모형이었다. 이는 110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함이다. 영국해군에서 가장 뛰어난 전함이다. 영국인이 원하는대로 황제가 조금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번역상의 곤란에 처한다. 황제의 통역인 덕천사(德天賜) 신부는 시계전문가였따. 그는 선박측면의 지식이 부족했다. 전체적으로 황제는 영국인들이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느낀다. 처음에 아주 크고 아주 좋은 공물이라고 하더니, 알고보니 그저 뻥에 불과했다. 많은 것들이 중국인들이 스스로 만든 것보다 정교하지 못했다. 황제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현재 내부에서 만드는 기기로 정교하고 큰 것들이 모두 다 있다. 기이하다고 말했던 물건들을 보니 그냥 평범한 것들이었다."

 

영국사절단은 또 하나의 필살기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무슨 하아테크제품은 아니지만, 사절단들은 그것이 중국에서 판매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영국마차였다.

 

중국마차는 수천년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바퀴를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앉은 자리는 바퀴축의 위에 있고, 사람은 바로 중심에 앉는다. 그리고 스프링과 같은 진동감소장치가 없으므로, 승객은 마차가 덜컹거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따. 수십리길을 앉아서 가자면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이다.

 

영국인은 이 점을 눈치챘다. 그들은 심지어 황제가 앉는 마차도 그다지 편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의 가마는 바퀴 두개 달린 마차였다. 모양이 무겁고 스프링좌석과 같은 것이 없었다. 중국의 보통마차와 차이가 크지 않았다. 영국에서 보낸 편안하고 가볍고 화려한 마차와 비교하자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영국마차를 탄 후의 느낌도 그들의 자신감을 배가시켰다. 스탠튼은 이렇게 썼다: "특사가 이 길을 가는 동안 영국에서 가져온 마차를 탔다. 북경에서 달단의 지역으로 가는 길에서 이런 규모의 대마차는 아마도 처음 만났다. 특사는 어떤 때는 동행하는 중국관리를 차안으로 불러 같이 타고 갔다. 중국관리는 처음에는 마차높이가 너무 높아도 두려워했고, 쉽게 뒤집어질 줄 알았다. 특사는 그들에게 절대로 안전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마차에 탄 후에 각종 교묘한 설계를 보고, 편안한 스프링의자를 맛본다. 언제든지 열 수 있는 유리창과 백엽창도 있고, 차는 안정되면서도 빨리 달렸다 .그들은 아주 기뻐했다."

 

만일 황제의 과학기술측면의 지식이 부족하여 영국의 과학기술기기의 뛰어난 점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의 엉덩이는 서양마차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이렇게 판단했고, 그것은 영국인들에게 차(茶)와 교환하는 좋은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의 민족감정은 편안하고 편리한 실질적인 감각을 부인하거나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시계나 베와 같이 영국마차도 앞으로 중국의 대량상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것은 그저 가소로운 일방적인 바램에 불과하게 끝난다. 영국인이 '진공'한 두 대의 스프링진동방지장치가 된 마차는 아예 건륭이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마차의 규격이 중국의 규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모든 예물 가운데, 특별제작한 두 대의 마차는 중국인들을 가장 골치아프게 했다. 북경에서는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마차안의 어느 부분이 황제가 앉아야 할 곳인지를 놓고 그들은 논쟁을 계속했다. 겨울용 마차를 끄는 마차꾼이 앉는 자리는 예쁜 꽃장식이 주변에 새겨져 있고, 장미문양의 늘어뜨린 장식도 있었다. 화려한 외관과 높은 위치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은 그 곳이 황제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칸내에는 누가 앉아야할 것인지를 놓고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그들은 창문도 살펴보고, 백엽창, 커튼도 살펴보고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비빈들이 앉기에 적합하다. 늙은 환관은 나에게 달려와서 물었다. 듣기로 예쁘고 높은 자리는 마부가 앉는 자리라는데, 황제의 자리는 차칸 안레 있다는데, 황제가 다른 사람이 그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등을 보이고 앉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조소했다. 그러면서 마차의 구조를 바꾸어서 마부의 자리를 차칸의 뒤로 보낼 수 없겠는지 물었다."

 

원래, 서양식 마차의 마부는 자리가 차칸의 앞에 높이 위치한다. 마부는 황제를 등지게 되는데, 이것이 중국의 예법에 어긋났다. 할 수 없이 이 마차 두 대는 그저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건륭의 중손자며느리인 서태후때 발생한 또 다른 사건을 연상케 한다. 1898년, 외국인이 서태후에게 독일의 자동차회사가 생산한 1세대 벤츠승용차를 선물한다. 보통사람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 벤츠는 말이 끄튼 가마보다 자리도 푹신하고 흔들림도 ㅇ벗다. 사람이 드는 가마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서태후는 이 벤츠차량에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이 차에는 운전사가 서태후의 앞에 앉기 때문이다. 이는 서태후의 흥을 깨트렸다. 그리하여 딱 한번만 앉고는 이 호화로운 벤츠는 서태후가 버리고 쓰지 않게 된다. 그때부터 이 벤츠는 이화원내에 서 있기만 한다. 문혁때 쓰레기더미에 던져졌다고 전해진다.

 

선물에 대한 실망은 황제의 영국인에 대한 반감을 가중시켰다. 그는 자신이 큰소리만 치는 영국인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매카트니가 이때 화신을 통해서 황제에게 몇 가지 영국의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그는 황제가 영국의 선물을 자세히 살펴본 후 분명히 영국에 대하여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카트니의 이 서신을 보고서, 황제는 비로소 영국사절단의 진실한 목적을 알았다.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분한 요구를 제출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영국인의 모든 요구를 거절한다. 영국인은 중국과 상호 사절을 파견하기를 원하고, 중국이 주산, 닝보, 천진을 개방하고, 북경에 양행을 설치하기를 원했다.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천조의 체제와 맞지 않는다. 어찌 너희국왕 한 사람의 요청때문에 천조의 백여년 법도를 바꿀 수 있겠는가?"

 

영국인은 성내에 거주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이 광주에 머무는 동안 말을 탈 수 있게 해주고, 좋아하는 체육활동도 할 수 있게 해주며, 건강을 위하여 단련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했다. 영국인은 또한 그들이 허가를 받더라도 절대 중국인의 생활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보증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 문제는 일찌감치 정해진 것이므로 다시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매카트니의 모든 요구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거부된다.

 

그렇다면 이들 선물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몇 개의 가장 크고 가장 정교한 예물 예를 들어, 대형시계는 황제의 장식품이 되어, 원명원과 대내에 전시된다. 영국인의 예물중에서 금속공구는 '강철완성품'은 황제폐하가 중국의 동일한 물건과 비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고, 영국금속가공공업의 발전수준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그해 십월 이십구일, 황제는 이것들을 쇳덩이로 취급하여 조반처의 장인들에게 주어 사용하게 한다.

 

당시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군수물자와 마차는 창고에 넣고 잠궈버린다. 다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67년후 영국이들이 원명원을 약탈할 때, 수십년전에 그들이 진공한 물건을 보게 된다. "금고의 곁에 비교적 큰 창고방이 있었다. 안에는 마차와 대량의 기물이 놓여 있었다. 이들 기물은 모두 세트였고, 거의 도금 아니면 도은된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몽탁방(蒙托邦)장군이 한눈에 이것으 차마창고라고 알아차렸고, 놓여진 것은 유럽물건이라고 알아차렸다. 호화대마차도 있고, 영국 오르비치 활실군사학원이 만든 살상력이 아주 높고, 정교하게 만든 유탄포와 포탄, 포가(砲架) 그리고 견인마차등이 세트로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들 진공품이 모조리 원래 모습 그대로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도 만진 흔적이 없었다. 위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영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이렇게 좋은 무기를 왜 쓰지않고 놓아두기만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신들이 중세기에나 썼던 무거운 화승총으로 그들과 싸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포장해서 그들은 이 물건은 다시 런던으로 되가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