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계진(丁啓陣)
고서중에는 봇을 몽염(蒙恬)이 발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태평어람>>에서 인용한 진(晋)나라 장화가 쓴 <<박물기>>이다: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蒙恬造筆)”. 당나라 한유의 <<모영전(毛穎傳)>>에도 몽염이 중산을 토벌하다가 모영을 포로로 잡는데, 지시황이 그를 아주 총애하고, 모영을 ‘관성자(管城子)’에 봉한다. 후세에는 이로 인하여 ‘모영’을 붓의 대칭으로 사용한다. 절강 호주시 선련촌 일대는 몽염을 붓제조의 비조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몽염이 붓의 창시자는 아니다. 청나라 학자 조익은 <<해여총고>> 권19에서, “붓을 만드는 것은 몽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몽염이전의 <<시경>> <<상서>> <<이아>> <<설문해자>>등의 고서에 ‘필(筆)’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는 증거를 내놓고, <<장자>>의 “송원군장화도, 중사개지필화묵(宋元君將畵圖, 衆史皆舐筆和墨)”이라는 글을 보면, 고서에 나타난 ‘필’이 대나무로 만든 딱딱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묻혀서 쓰는 붓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그는 몽염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한비자.식령편>>에 “삼촌지관(三寸之管)”이라는 말이 나오고, 진나라의 최표가 지은 <<고금주>>에서 말하는 몽염이 만들었다는 붓은 토끼털과 대나무관으로 만든 붓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몽염이 붓의 발명자가 아니라고 증명했다. 증거는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익은 그래도 민간전설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추측했다: “아마도 몽염은 이전 사람들이 만든 것을 더욱 종교하게 만들고, 아주 잘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이 난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보기에, 역사적으로 몽염은 붓을 만드는 방면에서 무슨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같지는 않다. 그가 붓제조의 비조로 모셔지게 된 것은 우연한 일 혹은 와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사마천의 <<사기.몽염열전>>에는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다.
둘째, 지금 전해지는 장화의 <<박물지>>에는 ‘몽염조필’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지 않다.
셋째, 장화의 <<박물지>>와 시간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 최표의 <<고금주>>(권하.’잡주제칠’)에는 명확히 적고 있다, 몽염이 만든 것은 붓의 일종으로 바로 진필(秦筆)이라는 것을. 봇의 제조방법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고목을 관(管)으로 하고 녹모(鹿毛)를 기둥(柱)으로 하고, 양모(羊毛)를 껍질(被)로 한다.” 몽염은 아마도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그자리에서 있는 것들을 모아서 각종 붓을 만들었던 것같고, 응급용으로 사용했던 것같다. 이런 붓은 당시 이미 나타나서 사용되던 대나무관에 토끼털을 붙인 봇보다 사용하기 편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붓은 도대체 언제 발명된 것일까?
어떤 사람은 중국인이 붓을 사용하기 시작한 역사는 6,7천년전의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서안 반팡적지에서 출토된 도기의 인면문, 어문, 파절문등은 붓으로 그린 것이다; 하남 안양에서 출토된 상나라때 갑골문상에는 새긴 글자흔적이 없다, 이것은 붓으로 쓴 흔적이다; 이 설의 근거는 주로 도화와 글자의 필획을 보면, 부드러운 붓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선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굵고 가는 변화가 있다는 것등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갑골문에 여러 차례 “율(聿)”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글자의 형태는 모두 손으로 붓자루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동한의 허신이 <<설문해자>>에 써놓은 것과 일치한다. <<설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율(聿, 붓 율)은 글을 쓰는 것이다. 초나라에서는 율이라고 불렀고, 오나라에서는 불율이라고 불렀다. 연나라에서는 불(弗)이라고 하였다” “필(筆), 진나라때 ‘필’이라고 부른다. 율(聿)과 대나무(竹)에서 따왔다.”
그러나, 출토된 실물 붓은 이 기간보다 약간 늦은 편이다. 1954년, 고고발굴팀은 호남 장사시 좌가공산의 전국시대 무덤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길이 약 21센티미터, 직경 약 0.4센티미터의 붓실물을 발견한다. 이 붓의 끝은 아주 우수한 토끼의 전모(箭毛)로 이루어졌고, 털의 길이는 2.5센티미터, 붓자루는 죽관으로 되어 있다. 다른 점이라면, 붓끝을 붓자루에 끼워넣은 것이 아니라, 붓자루 끝부분을 자르고, 붓머리를 그 사이에 넣었으며, 바깥은 실로 싼 다음 다시 기름칠을 했다는 것이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에 하남성 문물공작대는 신양 장태관에서 춘추시대말기에서 전국시대에 이르는 전국시대무덤을 발굴하는데, 거기서 소형 공구상자내에 죽간에 글을 쓰기 위한 붓을 발견했다. 죽간의 토끼 전모로 만들었고, 붓자루는 가늘고 정교했으며, 길이는 15센티미터이며, 대나무로 만든 붓갑이 있다.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되면서, 붓을 포함한 많은 고대문명은 발명시간이 계속 앞당겨진다. 최소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인 춘추시대말기에는 이미 진정한 의미의 붓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형태도 합리적이고, 품질도 우수하며, 글을 쓰기도 편리했다. 현대에 만드는 붓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여기에 은상시대의 갑골문 글자흔적, 반파 도기의 도화를 보면, 우리는 중국인이 붓을 제작사용한데에는 이미 3천년의 역사가 흘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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