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 도자기무역의 역사

중은우시 2010. 10. 10. 15:18

: 왕뢰석(王磊石)

 

 

 

 

1602, 설립된지 `1년도 되지 않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는 중국에서 화물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상선 캐슬리나호를 빼앗고, 이 상선에 실려있던 수십만점의 중국도자기를 암스테르담으로 운송하여 경매했다. 네덜란드인들이 놀란 것은 이번 경매에 많은 부자귀족들의 관심이 쏠렸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군주도 있었다. 프랑스국왕 앙리4세는 아주 아름다운 식기를 구입했다. 영국국왕 제임스1세도 도자기를 앞다투어 구매했다. 며칠내로, 모든 화물은 다 팔려버렸다. 칸 테베스의 <<유럽도자기사>>에는 이 배의 도자기를 경매한 것으로 상인들은 순이익 오백만둔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네덜란드인들의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전 유럽을 흥분시켰다. 전유럽에서 가장 실력있는 군주, 귀족, 상인들은 속속 극동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중국에 관심을 집중시켰고, 도자기에 관심을 쏟았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모델을 본떠서 17세기 후반 프랑스수상 마자는 루이14세의 명령으로 무역회사를 하나 설립한다. 그들은 깊은 뜻을 담아서 이를 중국회사라고 명명한다. 중국회사의 첫번째 사업은 바로 광저우에서 도자기를 구매하는 것이다. 프랑스 중국회사의 상선은 먼 바닷길을 건너 태평양 서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무역의 가장 좋은 시기를 맞이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얼마전에, 중국대륙을 통치한 청나라정권이 대만에 웅거하고 있던 정씨일족을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철저히 통일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연안의 해적들도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특히 1673년 중국최고통치자 강희제는 해상금지령을 취소했다. 이 명령에는강남, 절강, 복건, 광동연한의 백성들이 500석이상의 상선을 가지고 바다로 나가서 무역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 인하여, 외국상선은 지정된 항구에서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중국화물수입은 정상궤도에 접어든다.

 

그후 한동안, 유럽의 각 주요국가들은 광저우에 자신의 상업거점을 연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유롭게 생사, 차를 거래하고, 도자기도 대량거래물품의 하나였다. 가장 먼저 이 권리를 취득한 것은 영국의 동인도회사(1713)이고, 곧이어 프랑스(1728), 네덜란드(1729), 덴마크(1731), 스웨덴(1732)이었다. 이들은 광저우에 무역거점을 설립했다. 거래의 편의를 위하여 서양상인들을 상대할 때, 1720년 광저우상인들은 자발조직으로 도자기전문협회를 만든다. 거기 규칙에는 도자기에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스스로 무역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프랑스 중국회사의 안페트리호가 광저우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중국상인들에게 기괴한문양의 도면을 건네주며 중국상인들에게 이 도면에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하면 이익을 충분히 주겠다고 한다. 몇 달 후, 경덕진에서 만든 도자기가 계약대로 교부된다.

 

프랑스 중국회사는 이 도자기를 유럽에 운송한 후, 프랑스 루이14세의 칭찬을 받는다. 원래 이 도안은 프랑스의 갑옷, 휘장, 황실문양등이었던 것이다.

 

사실, 휘장을 중국도자기에 그려넣는 것은 프랑스인들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명나라 중후반에, 포르투갈왕이 말라카의 중국상인을 통하여 만노르1세의 휘장을 새긴 청화집호를 하나 주문해서 만든 적이 있다. 당시의 안료에는 한계가 있고, 중국의 해상금지령이 엄격히 집행되고 있어서, 그 도자기는 유럽왕실의 흥취를 유발시키지 못했다. 다만 이들 프랑스 문장이 새겨진 도자기는 정교한 공법으로 만들어, 색채가 화려하고 선명했다. 중국은 해상금지령이 풀렸고, 기회는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이처럼 좋은 기회를 보고, 유럽의 귀족들은 속속 이를 본받았다. 그리하여, 문장도자기가 유럽에서 성행하기 시작한다. 그후 수십년간 영국의 삼사(三獅) 러시아의 쌍두응(雙頭鷹)이 중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에 나타난다. 스웨덴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중국의 명청교체기에 약 300개의 귀족가문이 중국에서 문장도자기를 주문제작했었다고 한다.

 

유럽상선이 도래하면서 중국에 밀려온 것은 재물만이 아니었다. 중국도자기제작사상의 변혁이 이루어진다.

 

프랑스인이 주문제작한 문장도자기를 광저우에서 샘플대로 제작하여 무역을 한 것은 중국도자기제작역사의 변혁이 시작된 것이다. 기민한 광동상인들은 큰 비즈니스기회가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 변화에 순응한다.

 

유럽에서의 주문이 속속 들어왔다. 광저우 주강연안에는 유럽으로부터 주문제작받는 점포들이 나타난다. 여기의 서양상인들은 광동상인들과 계약하고, 서양상인이 지정한 종류, 형태, 양식, 공기를 상세히 약정한다. 그후 광동상인은 다시 주문을 천리멀리 떨어진 경덕진에 맡긴다. 외국상인들의 요구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주문제작양식은 각양각색이었다. 이는 내지의 도자기장인들의 호기심도 유발시켰다.

 

<<경덕진도록>>에는 이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 책에서 양기, 외국서양인에게 파는 것이다. 활양기와 니양기의 구분이 있다. 상인은 광동사람이 많았고, 서양인들과 거래했다. 양식이 기교하고, 매번 달랐다.

 

그러나, 경덕진과 광저우간에는 길이 멀었다. 산과 물이 가로막혀 있다. 유럽인들의 주문이 강서까지 가서, 도자기를 굽고, 색을 입힌 후 다시 광저우로 가져와서 건네주려면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다. 여기에서 폐단이 나타난다. 도중에 파손이 생기는 것도 불가히파고, 양식이나 품격이 틀리게 되는 경우도 속속 나타났다. 이는 상인들의 경제이익에 영향을 줄 뿐아니라, 광동상인들의 신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해외판매도자기의 생산중심이 남쪽으로 이전하게 된다.

 

청나라때의 유자분은 자신의 저술 <<죽국도설>>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바다가 열린 후에 서양상인들중 중국에 오는 자들은 먼저 마카오를 오고 나중에 광저우로 왔다유럽의 귀족들이 중국도자기를 귀하게 여겨서, 우리나라 상인들은 그들의 기호를 맞추었다. 그리하여 경덕진에서 백자를 만들고, 광동으로 운반하여, 장인을 고용하여, 서양화법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채색도자기로 만들어, 서양상인에게 팔았다

 

광동상인들은 판매채널의 장점을 살려 생산영역에 간여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그림훈련을 시키고, 경덕진에서 만든 백자를 주강입구까지 운송한 후, 여기서 그들은 서양상인들의 주문을 받는다. 주문을 받은 후에 채색등 2차가공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니 물건교부일자를 앞당길 수 있었고, 파손이나 그림의 질이 훨씬 올라가게 된다. 이런 생산모델은 곧 유행하기 시작하고, 일시에 광동의 주강연안에는 도자기공장이 늘어서게 된다. 공장에서는 기술혁신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변혁은 먼저 설계부터 시작된다. 이때 광동에서 수출되는 도자기 도안의 주제는 더 이상 전통적인 오복방수, 태평유상, 마상봉후가 아니었다. 길거리 상점에서 진열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군주의 두상, 서양의 풍경등이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유럽상인들이 제공한 도안에서 왔을 뿐아니라, 중국상인들이 유럽인의 소비심리에 맞춘 경우도 많았다. 광주의 중국인들중에서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고, 스페인왕실의 색깔이 흑색인지 황색인지도 잘 모르지만, 대부분 중국화공은 그럴듯하게 서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기법에서도 전통적인 직선을 가급적 적게 사용했다. 서방인들에게 익숙한 곡선으로 문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회화문양의 변혁이후에, 대외판매용 도자기는 모양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해상봉쇄가 풀린 후에, 도자기는 정상적인 무역경로를 거치게 된다. 많은 우수한 민요(民窯)의 제품이 계속하여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유럽시장에서, 도자기는 더 이상 왕공귀족이 수장하는 사치품이 아니게 되었다.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 일반백성들의 집에도 공급되어 생활용품으로 쓰이게 되었다.

 

유럽인들의 수요는 다시 한번 중국제조업의 변혁을 가져온다. 유럽인들의 수요에 맞추기 위하여, 더 많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의 도자기장인들은 스프그릇, 덮개있는 찻잔, 샐러드접시, 커피주전자, 머그잔등 순수한 서양의 생활용구도 생산하게 된다. 심지어 그들은 유럽인들의 수염이 많다는 특징을 고려하여, 활모양으로 비워둔 접시도 만들어, 유럽인들이 수염을 깎을 때 턱 밑에 놓고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서방 소비시장 때문에 중국의 민요는 계속하여 연구개발하고 혁신을 했다. 그들은 중국의 규산염기술이 점차 유럽의 원래 주석기, 목기 심지어 금은기의 시장을 빼앗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중국의 도자기장인은 이미 자체적인 기술혁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세계시장을 바라보고 제품생산을 조정했다. 국제시장은 중국의 도자기업계를 어쩔 수 없이 발전변화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도안설계의 변화, 기형연구개발의 개선은 그저 간단하게 서방 소비자의 습관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따면, 생산요소의 결집은 광주의 대외도자기가공이 진정으로 굴기한 표지이다.

 

1769 William Hickey라는 미국여행자가 광주 주강남안의 광주채색도자기가공공장을 참관한다. 그의 여행기에는 놀라운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한 길다란 방안에 약 200명이 도자기에 도안을 그리고, 각종 장식을 하느라고 바빴다. 노인도 있고, 6,7세된 어린아이도 있다. 그리고 이런 공장은 광주에만 100여개가 있다.

 

광주에는 2만명이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이 숫자는 농업을 근본으로 하던 시대에 놀랄만한 숫자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미 이들이 어떻게 왔는지는 모른다. 다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들의 업무성격이다. 그들은 경덕진의 관요에서 대대로 도자기를 굽는데 종사하는 장인들과는 달랐다. 장인들은 장적(匠籍)이 있고, 그들의 노동은 의무복무의 성격을 지닌다. 주강입구의 이들 그림그리는 노동자들은 완전히 고용형식이었다. 상인들이 돈을 내고, 장인들은 일을 한다.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권도 있고, 유동성도 있다. 완전한 의미의 고용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광주는 아주 많은 인력자원을 보유하게 된다.

 

충분한 인력과 편리한 판매채널이외에 상인들이 집단적으로 생산에 개입한 것도 광주도자기제조업의 생산요소의 변화를 더욱 완비되게 해준다. 당시 사회조건에서 진정한 자본가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가장 자금력과 경영마인드를 지닌 사람은 행상이었다. 인력, 토지, 자본, 자본가의 4요소가 갖추어지 후 광주의 도자기제조업은 발흥하기 시작한다.

 

많은 도자기공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광주의 도자기업계는 날로 군집효과를 내게 된다. 한편으로 생산원가가 저렴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브랜드와 지명도가 올라간다. 정교한 수공도자기제조기술, 유럽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춘 도안, 여기에 충분한 노동력자원을 더하여 광주는 금방 중국 내지 세계의 도자기가공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다. 광채자(廣彩瓷)는 제품의 품질이 뛰어나고, 가격으은 싸서 국제시장에서 잘 팔렸다. 일시에 중국도자기는 유럽인들이 보기에 가장 좋은 브랜드가 된다.

 

1759, 스웨덴회사는 그들의 광주대리인에게 지시하여, 무겁고 오래쓸 수 있는 중국도자기를 구매하라고 한다. 1830년에 발간된<<섬라.교지사행기>>에서는 유럽인들의 견해를 더욱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서방인)은 가정에서 쓰는 거친 도기는 섬라인들이 만든다. 그러나 보통 및 고급의 각종 자기는 중국에서 대량으로 나온다.

 

명성이 올라가면서, 브랜드가치도 오르고, 시장점유율도 오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바타비아에서 기록한 통계숫자를 보면, 그곳에서 매년 중국에서 유럽으로 보내는 도자기의 수량이 300만건에 이르렀다.

 

숫자만으로는 많은 문제를 설명하기 힘들다. 고급소비품의 진정한 성공은 그것이 상류사회의 심미관을 바꾸었다는데 있다. 이때는 유럽에서 로코코양식이 유행할 때였는데, 광채자는 세밀하고 매끄러운 외관, 단정한 형체 및 깨끗한 품격으로 유럽의 여러 왕궁과 귀족의 집에 들어간다. 실용가치로 보나 예술풍격으로 보나 유럽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해외수출 도자기가 귀부인처럼 유럽왕실에서 추앙받을 때, 경쟁적수가 소리없이 나타난다.

 

1644,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과 유럽간의 해상무역이 중단된다. 네덜란드인들은 극동에서 대체품을 찾았다. 그들은 중국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일본으로 눈을 돌린다.

 

1649, 그들은 일본에서 모두 65000건의 도자기주문을 낸다. 비록 이 숫자는 많지는 않지만, 도자기제조기술을 확보한지 겨우 49년밖에 되지 않은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장인들은 밤낮으로 일을 해서 2년만에 임무를 완성한다. 일본도자기는 이렇게 세계시장에 소리없이 등장한 것이다.

 

일본도자기는 시작이 늦었지만, 1680년대에 가키에몬(右衛門)이라는 가문에서 유백색탁자(乳白色濁瓷)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도자기에 정교한 채색그림을 그려서, 아주 독특한 품격을 나타낸다. 이런 도자기가 유럽에 등장하고, 유럽인들의 심미관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인정을 받는다. 일본도자기는 광채자로부터 시장을 일부 떼어가게 된다.

 

이와 동시에, 유럽인들이 스스로 만든 도자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은 그들의 모방대상은 이천년 도자기역사를 지닌 중국이 아니라, 모방해서 금방 만들기 시작한 일본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인인 Bottger는 고령토를 이용하여 일본 카키에몬도자기를 모방해서 내놓는다. 이제 중국도자기의 재료에 있어서의 기술장벽은 없어지게 된다. 유럽국가에서 중국도자기를 모방해서 만드는 붐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독일이고, 다음에는 프랑스였다. 곧이어 이탈리아,잉글랜드 및 오스트리아도 속속 중국도자기를 모방해서 만드는 대열에 합류한다. 유럽인들의 생산기술이 날로 성숙됨에 따라, 각국은 자신의 국민도자기공업체계를 건립한다. 그리하여 보통백성도 중국의 일용도자기에 대한 의존도가 많이 떨어진다. 유럽장인들은 화학의 각도에서 공법혁신을 이룬다. 그리하여 도자기제작기술이 더욱 정교해진다. 외관은 더욱 세밀해진다. 중국의 고급도자기가 천년동안 독점해온 국면은 드디어 타파되었다. 유럽에서의 수요가 줄기는 했지만, 저렴한 생산원가 및 강력한 생산능력으로 중국의 수출도자기는 여전히 생존공간이 있었다.

 

유럽시장에서 밀려남과 동시에, 더욱 무서운 일이 동방에서 벌어진다. 중국과 유럽간의 물류라인에 변화가 적지 않게 발생한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앞장서서 중국에 새로운 수요를 발굴한다. 바로 아편이다. 아편무역으로 인한 큰 이익은 상인들로 하여금 도자기를 운송하는 흥미를 반감시켰다. 이때의 유럽상인중 유한한 운송능력과 자본을 기나긴 중국-유럽항로에 투입하지 않고, 인도-중국의 아편무역라인에 집중하여 폭리를 도모하게 된다.

 

장기간 본국상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었기 때문에, 중국상선은 직접 화물을 유럽까지 운송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의 물류라인이 단절되자, 중국상품의 수출길도 막히게 된다. 광주는 시장이 무한한 생산기지에서 졸지에 경덕진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지리적인 우세는 모조리 사라졌다.

 

외부의 변화는 중국의 도자기업을 고사시키게 된다. 내부에서는 변혁을 아직 완성하지도 못했다. 기술측면에서 보자면, 유럽이건 일본이건 근대에 들어선 후에 화학, 기계등 현대기술을 충분히 도자기제작에 운용했다. 일본과 유럽의 도자기업은 과학기술에 힘입어 기술이 제고되었다. 그러나 중국에 있어서 도자기제조업은 여전히 예로부터 내려온 수공업이었다. 운영상에 있어서, 중국도자기업은 여전히 수공업공방수준에 머물러있었다. 오랫동안 효과적인 현대기업제도를 만들지 못한다. 자본은 완전히 주인의 돈에만 의존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회사를 만들어 자본시장에서 충분한 운영자금을 획득했다. 이외에, 사회배경하에서 전란과 사회불안정은 중국도자기업으로 하여금 이 화려한 변신을 이룰 수 없게 하였다. 그저 미완성의 변혁만 남겨놓는다.

 

결론적으로, 여러 병폐가 중국도자기제조업이 진정한 혁신을 이루는 것을 방해했다. 그리하여 중국도자기의 쇠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