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비범(鄭非凡)
서사시(Epic)는 서방에서 유래한 개념이고, 전통적인 정의와 기준은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유래한다. 말 그대로 ‘서사의 시’이다. 일반적으로는 영웅의 전설이나 중대한 역사소설을 서술하는 장편시를 말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길이가 28000행에 달하며, 유럽 서사시의 최초버전이라고 일컬어진다. 중국도 서사시가 존재한다. 티벳족의 <<거사르(格薩爾)>>, 몽골족의 <<장거르(江格爾)>>, 카르카스족의 <<마나스(瑪納斯)>>라는 3대 영웅서사시가 있다. 서남의 소수민족들 사이에서도 ‘신화서사시’와 ‘창세서사시’가 전해져 내려온다.
서사시는 일종의 운문체의 신화작품이며, 중국의 소수민족들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한족에게는 엄격한 의미의 서사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일까?
첫째, 종족기억의 각도에서 보자면,
종족의 집단기억은 당해 종족 전체구성원의 장기간 과거생활에 대한 집단적인 공동의 표상이다. 종족기억과 서사시기억간에는 모종의 관련이 있다. 한족은 다원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말하는 소위 ‘한족이 집단기억’은 역사상 존재하였던 여러 종족의 기억의 종합체이다.
다원일체의 종족기억의 특징은 서사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사시는 과거의 규모가 컸던 종족의 서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사시기억의 형성에는 비교적 긴 기간이 필요하다. 조상의 사적이 한세대 또 한세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을 주어야 한다. 머나먼 종족역사가 후손들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흐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서사시가 된다. 만일 종족의 형성과정에서 새로운 종족이 유입해 들어오게 되면, 원래의 종족기억과 새로운 종족기억이 서로 혼합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원래의 기억이 새로이 조정되는 것이다. 장기간의 기억조정과정을 거쳐, 원래의 단일한 종족기억은 계속하여 동질감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종족의 최초역사의 거대하고 신성한 서사시가 나오기 힘든 것이다.
둘째, 철학사상과 종교정서에서 보면,
서사시는 서정시와 다르다. 서정시는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서의 주관적인 정취를 위주로 한다. 그저 인생의 편린을 다루면 된다. 서사시는 여러 각도에서 보고 전체 인생, 전체 사회, 시지어 전체 민족의 철학사상과 종교신앙을 다루게 된다. 서사시의 작가는 넓게 관조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복잡하고 변화가 심한 인간세상에서 맥락을 잡을 수 있다; 동시에 심후한 감정과 장기간 견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감정과 환경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고, 완벽하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넓은 관조는 자주 철학에 의존하게 되고, 심후한 정감과 견지하는 노력은 종교에 의존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바로 한족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들이다.
서방의 서사시는 신화에서 발원한다. 신화는 원시민족사상과 신앙의 구체화이다. 서사시는 신화의 예술화이기도 하다. <<좌전>>, <<열자>>, <<초사>>, <<사기>>등 여러 책을 보면, 한족은 머나먼 과거에 신화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상나라 주나라 시대에 접어들면 신화시대는 이미 과거형이 되어 버린다. 신화시대는 민족의 영아시대이다. 한족은 일찌감치 ‘개화’하여 영아시대의 사상과 신앙을 버릴 수 있었고, 성인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공자는 괴력난신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일반인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의 서사시가 쓴 것은 바로 ‘괴력난신’이다. 유교화된 ‘괴력난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한족 종족에서 서사시가 발달하지 못하고, 심지어 서사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셋째, 민족성격에서 보면,
서방민족은 활동적이고, 이상적인 인물이 영웅이다; 중국민족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이상적인 인물이 성인이다. 서방이 숭배하는 영웅은 모두 기세가 세상을 덮을 사람이고 일생을 고난 속에서 생활하며, 맹수와 싸워서 이긴다. 그가 없으면, 민족이 멸망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족이 숭배하는 성인은 대부분 면류관을 쓰고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외에, 다른 일은 할 필요가 없다. 성인들 중에서 치수에 공이 있는 하나라의 우임금은 서방의 영웅과 흡사하다. 그러나, 공자가 그를 칭찬하기는 하였지만, 그 칭찬은 “그는 음식은 조촐하게 먹으면서도 귀신에 대한 공경을 다했고,그는 평소에 의복을 수수하게 입으면서도 제사는 화려하게 지냈으며, 그가 거주하는 궁궐은 소박했지만, 수리공사에는 온 힘을 다했다”는 세 가지를 꼽았다. 이것들은 모두 ‘태평천자’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한족사회는 일찌감치 안정되었으므로, 필요한 인물은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태평천자였다. 서방민족은 문학의 맹아기에 아직도 천재지변과 싸우고 있었다. 당시에 필요한 인물은 용사와 영웅이었다. 극도로 긴장되어야 하고, 그 중심에는 주인공이 있어야 했으며, 주인공은 반드시 비분강개한 영웅이어야 했다. 그래야 격렬한 긴장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래서 서방에서 숭배하는 영웅은 바로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기에 가장 적당했다. ‘무위이치’의 성인은 서사시나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무슨 ‘행동’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문학상 주관과 객관에 대한 치중이 다르다는 각도에서 보면,
민족과 개인의 심리원형은 ‘내향’ ‘외향’의 두 가지이다. ‘외향’성인 경우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과 행동을 모두 외부의 환경변화에 주력하고, 문학에서 주로 객관적인데 치중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마음을 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성찰에 두고, 문학에서 주로 주관적인데 치중한다. 서방민족은 외향적인 유형이다. 한족은 내향적인 유형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서방문학은 객관에 치중하고, 비극적인 서사시에 능하다. 한족의 문학은 주관에 치중하고, 서정적인 짧은 글에 능하다.
한족은 서사시를 만드는데 필요한 객관적인 상상력이 부족하다. 한족의 유선파시인들이 본 선경은 서방의 시에서 묘사한 천국과 비교하자면, 객관적인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사시가 중국에서 발달하지 못한 이유이다. 왜 한족에게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가? 이것도 사회가 일찌감치 개화된 것과 관련있다. 한족은 일찌감치 문명시대로 접어들었고, 서방은 아직도 원시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역사학의 발전정도에서 보면,
동일한 시기의 각민족을 비교해보면, 한족은 역사학이 고도로 발달한 민족이다. 진나라이전에,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고, 동시에 구전으로 전해져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것은 역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상나라때 혹은 상나라이전에 이미 문자가 나타난다. 이것으로 기록을 남겼다. 상나라때 최초의 사관(史官)이 등장한다.
그후 사마천은 ‘궁천인지제(窮天人之際),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성일가지언(成一家之言)”의 저술목표를 세우고, 본기, 표, 서, 세가, 열전등을 한권의 책에 묶는 기전체통사의 체계를 확립한다. <<사기>>130권, 52만자는 전설시대의 황제로부터 한무제 유철에 이르기까지 3천여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많은 민족들이 아직도 신화와 상상으로 역사를 기록할 때, 한족의 역사학은 이미 고도로 발달된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춘추>> <<좌전>> <<국어>> <<전국책>>등등부터 시작하여, 한족은 이미 산문으로 사건을 기록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좌전>> <<사기>>같은데 쓰여진 자료는 모두 서방의 서사시의 자료이다. 한족은 여기서 산문작품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서사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모범으로 삼을만한 서사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한족에게 서사시가 없는 것은, ‘상상’과 ‘과장’의 서사시를 맛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이고 엄격한 역사산문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서사시가 설 자리를 막아버렸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시어가 민중화될 수 있는지의 각도에서 보자면,
고대한어의 시가는 문어체이다. 문어체로 쓴 시가는 중국어를 말한다고 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초 누군가가 고대신화와 전설에 근거하여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같은 것을 쓰고 싶어했다고 하더라도, 힘에 부쳤을 것이다. 그리고 썼다고 하더라도 저속하다는 등의 이유로 일찌감치 실전되었을 것이다. 다른 민족에게는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가언어와 생활언어가 한족처럼 엄격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가언어의 비민중화도 한족에게 서사시가 발달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중 하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한족에게는 서사시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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