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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귀비)

마외병변(馬嵬兵變): 양귀비의 최후

by 중은우시 2010. 12. 29.

 작자:미상

 

 

 

천보14(755)은 당현종에 있어서 남다른 1년이었다. 이 해에 모두가 아는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일어난다. 다음 해인 천보15(756) 유월, 안록산은 동관(潼關)을 함락시킨다. 유월 십삼일 여명, 당황한 당현종 이융기는 가솔, 심복을 이끌고 장안을 빠져나간다: 양귀비 자매, 황자, 후궁, 공주, 황손, 양국충, 위견소, 위방진, 진현례등. 사람이름을 보면 아주 많은 것같지만, 사실 몇 명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환관들이었다. 그들을 보호하는 금군은 합쳐서 3천명가량이었다.

 

당현종 일행이 연추문으로 빠져나갔는데, 가는 길에 먹을 거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현령들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이다. 정오가 되도록 당현종은 하나도 먹지를 못했다. 양국충은 떡을 사와서 그에게 가져다주어 배를 채웠다. 이 순간에 백성들은 그래도 사랑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쌀밥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은 보리를 바치고, 어떤 사람은 콩을 바쳤다. 황자, 황손들은 양식을 보자 손으로 집어서 마구 삼켰다. 금방 바닥이 났지만, 모두 배는 부르지 않았다.

 

이 광경은 아주 참혹했다. 모두가 울고 말았다. 당현종도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곽종근(郭從謹)이 당현종에게 아뢴다: 안록산이 천하를 해치려는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예전에 이미 누군가가 그를 고발한 적이 있는데, 폐하께서는 고발한 자를 죽여버렸다. 그래서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만든 것이고, 폐하를 도망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송당이 재상을 맡을 때, 자주 폐하에게 충언을 진언하고, 천하는 이로 인하여 태평하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대신들이 진언을 드리는 것을 꺼리고, 대부분 아부만 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보니 폐하께서 궁중이외의 일은 거의 알지 못하게 되었다. 궁밖에 있는 신하로서, 일찌감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지만, 누가 감히 이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날에 이르니, 신이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곽종근의 말은 틀린 데가 없다. 그러나 사후약방문이다. 시급한 것은 배를 채우는 일이다. 반성하는게 아니다. 당현종은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이는 짐이 총명하지 못한 탓이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후에 군사들에게 각 마을로 가서 먹을 거리를 찾아오도록 시킨다. 미시 즉 오후1시에서 3시사이에 돌아오도록 약정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출발하기로 한다.

 

유월십사일, 당현종일행은 마외역에 도착한다. 이 곳은 오늘날 섬서성 흥평션 서북쪽 23리 떨어진 곳에 있다. 연일 길을 재촉하다보니 모든 병사들이 피로하기도 하고 배도 고팠다. 군사들은 스스로 밥을 했고, 식사를 마친 후에 잠이 들었다. 역참에는 등불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몸을 베고 잠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래위가 있을 수 없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마외병변에 대하여, 옛 역사기록에 따르면, 진정한 발동자, 기획자는 용무대장군 진현례(陳玄禮)라고 하였다. 그가 태자의 곁에 있는 환관 이보국(李輔國)을 통하여 태자 이향(李享)이 행동에 나서도록 종용했다는 것이다. 태자 이향은 수동적이었고, 이보국은 그저 중간의 중개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 역사기록은 윗사람을 위하여 숨겨준 것이고, 역사의 진상은 아니다.

 

진실한 상황은 바로, 이번 정변이 오래전부터 기획되었던 것이며 일찌감치 장안에 있을 때부터 정변행동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자 이향은 심복들과 비밀리에 모의한 후, 이보국을 보내어 진현례를 포섭한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서 양국충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보국은 여기서도 중개인이다.

 

유월 십삼일, 당현종이 경사에서 도망친다. 전체 인원은 3천명에 불과하다. 태자 이향은 후방을 막기 위하여 2천여명을 이끌었다. 여기에는 금군의 정예부대가 포함된다. 비룡금군(飛龍禁軍)이라는 정예부대이다. 이향의 두 아들 광평왕과 건녕왕이 부대를 이끌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정변기회이다. 당나라의 궁중은 여러 번 정변을 겪었는데,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현무문을 함락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봐야 승산은 50%가량이다. 이번은 달랐다. 군신이 궁중을 벗어나서, 황야로 나와 있으니, 금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킨다면, 성공은 보장받은 것이다.

 

좋은 기회가 나타나면 더 좋은 기회가 뒤를 잇는 법이다. 나쁜 일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나쁜 일이나는 것은 없다. 그저 더 나쁜 일이 있을 뿐이다. 피로한 금군의 인심이 불안해할 때, 양국충은 말을 타고 마외역을 나왔다. 그런데 토번의 사신들에게 길이 막혔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으니 토번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바로 이때 금군의 인물이 소리를 쳤다: 양국충이 오랑캐와 모반하려고 공모한다.

 

양국충은 깜짝 놀랐고, 자신이 제대로 해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한다. 그때 화살이 날아왔고, 양국충은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칼로 내리쳐서 죽여버린다. 양국충의 아들과 한국부인도 이때 군사들에게 살해당한다.

 

곧이어 진현례는 당현종에게 아뢴다: “양국충은 모반을 일으켜 이미 주살되었다. 귀비는 모시기 어려우니, 폐하께서 법대로 처리해주시기 바란다.”

 

이 일련의 행동은 아주 빨랐다. 순식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잘쓴 글처럼 앞뒤가 딱 들어맞았다. 양국충이 피살되자마자, 진현례는 금군장병을 대표하여 그들의 우려사항을 전달한다. 만일 양귀비가 여전히 황제의 곁에 있다면, 양국충을 주살한 장병들이 불안해 할 것이고, 군심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협박이었다. 한쪽은 강산이고 다른 한쪽은 미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당현종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양귀비는 오랫동안 깊은 궁중에 있어, 양국충이 모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이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무고하다. 그녀를 죽이는 것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군심이 흐트러질 것이고, 강산을 잃을 뿐아니라. 당현종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고력사는 이때 당현종에게 보고한다: 귀비는 확실히 무죄이다. 그러나 장병들이 이미 재상을 죽였는데, 귀비를 여전히 곁에 두고 있으면, 장병들이 안심하지 못할 것이다. 폐하가 상황을 잘 판단해서, 평안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당현종은 무력감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고력사에게 양귀비를 죽이도록 명한다.

 

이 해에 양귀비는 38살이었다. 그녀는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는다. 죽은 후 시신을 천정에 놓아두어, 금군병사들이 양귀비가 확실히 죽었음을 확인하도록 했다. 장병들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당현종을 호송하여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서에 기록된 양귀비의 행방에 대한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구 사서의 기재는 정확하고 진실한가? 사실상 양귀비의 행방에 대하여는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주장과 기록이 남아 있다.

 

첫번째 견해: 양귀비는 죽지 않고, 니고암에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현종은 마외역을 떠난 후, 사천으로 도망쳤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 양귀비의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서 매장한다. 그러나, 사람을 보내어 마외역의 무덤을 파니,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시체는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당현종과 금군이 사천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1년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약간의 의학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단기간내에 시신이 부패하더라도 뼈는 남아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무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양귀비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이것도 이상하다. 분명히 죽음을 내렸고, 시신을 천정에 매달아두었는데, 그녀가 어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미스터리영화와 비슷하다. 만일 양귀비가 죽지 않았다면, 그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다. 첫째, 당시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을 때, 완전히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쇼크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금군장병들이 본 시신은 확실히 양귀비였으나 죽지는 않았다. 둘째, 당시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은 것은 양귀비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라는 것이다. 죽은 후에 양귀비의 옷과 바꿔치기했고, 금군병사들도 가까운 거리에서 양귀비의 용모를 볼 수 없었기에 속았다는 것이다.

 

다만, 양귀비가 마외역을 도망친 후, 도대에 어디로 갔는가, 어디서 죽었는가는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양귀비가 여도사를 지낸 경력이 있으므로, 그녀가 어떤 도관에 은거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추론중 절반은 근거가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추측이다. 왜냐하면 절반의 근거가 있으므로, 완전히 날조라고는 할 수가 없다. 절반의 근거는 양귀비가 확실히 여도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양귀비의 경력을 보자. 그녀의 이름은 양옥환이고, 당현종 개원6년에 태어났다. 718년에 촉주에서 태어난 것이다. 어려서부터 동도 낙양에서 자란다. 원래는 당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였다. 하루는 양옥환이 화청지에서 피서하는데, 우연히 당현종을 만난다. 당현종은 양옥환을 보고는 첫눈에 반한다. 그리하여 밤에는 잠도 못이룬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이렁나서, 고력사에게 피로에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미인이 있다니, 정말로 포기하기 아깝구나.” 고력사는 그 뜻을 바로 헤아려서, 양씨를 입궁시켜 당현종과 만나게 하겠다고 말한다. 당현종은 자신과 양옥환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관계인데, 만나서는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고력사는 당현종에 잘보이기 위하여, 한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당현종에게 귓속말로 얘기한다. 당현종은 그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서 고력사에게 그대로 진행하라고 분부한다.

 

그리하여, 고력사는 양옥환에게 가서 권유한다. 수왕을 버리고, 입궁하여 황상을 모시라고. 양옥환은 원래 눈이 아주 높은 여인이었다. 부귀영화의 앞에서, 수왕과 4년간 부부로 지냈지만, 수왕의 애정은 점점 식어갔었다. 그녀는 수왕을 떠나서, 고력사가 준비한대로, 먼저 내궁의 태경관에서 여도사로 있는다. 이때 도명은 양태진이다. 한참이 지난 후, 당현종의 궁중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에게서 난륜이라는 오명을 피하고, 정정당당하게 미인을 취하는 것이다.

 

다른 절반은 추측이라는 것은, 만일 양귀비가 마외역을 도망쳤다면, 정말로 도관에 은거하여 여도사로 있었겠는가? 당현종이 피난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운 후에 그녀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양귀비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분석해보면, 그를 죽인 사람이 고의로 죽지 않게 처리했거나, 다른 궁녀와 바꿔치기 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는 당현종이 명령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다시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학자 대진군의 <<군지>>에 당현종과 양귀비가 옛정을 잊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하한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만일 양귀비의 죽음을 집행한 사람에게 그녀를 살릴 뜻이 없었다면, 양귀비는 묻힌 후에 어떻게 무덤을 빠져나왔을까? 누군가가 파주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무덤을 파내고 걸어나왔을까? 이것들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기록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녀가 행방과 그녀가 여도사가 되었다는 견해는 근거가 없으므로 성립되기 힘들다.

 

일본학자 대진군의 <<군지>>를 보자. 이 책에서는 양귀비의 행방에 대한 두번째 견해를 담고 있다. 이 견해는 일본의 민간과 학술계에 널리 퍼져 있다. 즉 양옥환이 죽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다른 궁녀라는 것이다. 양옥환 본인은 일본으로 도망왔다느 것이다. 어떻게 도망쳤는가? 그 내용은 더욱 신비롭다. 당현종이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그녀를 호송해서 바다를 표류하게 했다는 것이고, 결국, 상구현 향진구반도 유곡정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일본 현지에는 이존원에 양귀비 무덤이 있다.

 

일단 이 주장이 진실이라고 본다면, 양귀비가 일본으로 도망친 후 어떻게 생활했을까?

 

<<군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현종은 양귀비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알고는 옛정을 잊지 못하여, 계속 그리워했다. 바다를 건너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하여 특사를 파견하여 불상 2개를 양귀비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녀에게 귀국을 종용한다. 다시 예전의 부귀영화를 이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양귀비는 이미 그럴 마음이 없었다. 예전에 당현종은 본인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속세의 인연은 모두 끊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에서 옥비녀를 하나 꺼내어, 특사에게 주어 당현종에게 바치도록 한다. 이를 통하여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다. 수년후, 양귀비가 병도 없이 사망한다. 소위 이존원은 바로 그 두 개의 불상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이 주장은 진실인가 허위인가? 이존원 오십오세 장로인 혜학은 두 가지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하나는 천보15 7, 당현종의 애비 양옥환이 공로주(空櫓舟)를 타고 구진당도구에 도착했다. 도착후 얼마 지나지않아서 죽었다. 동네사람들이 서로 도와서 묘의 뒤에 묻어준다.”

 

다른 하나는 육군이 이미 출발한 후, 귀비의 숨이 약간 남아 있었다. 사람을 시켜서 구하게 했고, 공로주를 만들어, 수개월치 양식을 배 안에 넣고, 바다로 보내어, 흘러가게 했다.”

 

이 두 가지 기록은 한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 양옥환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숨이 돌아와서, 누군가 구해주었다.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공로주(노가 없는 배)를 만들었고, 배 안에 수개월치 양식을 넣어서 바다로 떠나보냈다. 양옥환은 배를 타고 표류하였다.

 

먼저,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다.

 

첫째는 공로주이다. 무엇이 공로인가. 즉 노가 없다는 말이다. 노가 없는 배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표류해 간다는 것은 거의 신화수준이다.

 

둘째는 마음대로 흘러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배 안에 양식을 넣었는데, 이는 도망중에 목숨을 부지할 양식이다. 이는 도망가는 목적지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저 아무데나 배를 풀어놓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었다면, 설마 바다로 보내어 안락사시킨다는 뜻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양옥환의 생명을 살려놓고는 다시 죽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이외에 장로 혜학의 기록은 <<군지>>와 모순된다. <<군지>>에는 양옥환이 부상(일본)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혜학의 기록에는 양옥환이 상륙한 후 바로 죽었다고 적었다. 이존원은 그저 양옥환이 묻힌 곳일 뿐이다. 나중에 당현종이 양옥환이 이 곳에 묻힌 것을 알고는 두 개의 불상을 보내온 것이다.

 

당연히, 양옥환이 도망해서 일본으로 왔다는 두 가지 기록은 모두 공동의 전제를 깔고 있다. 즉 양옥환이 마외역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전제가 성립되어야, 일본의 민간과 학계에 전해지는 주장이 신뢰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천보15년 유월의 안개로 가리워진 마외역으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당현종은 협박을 받았고, 양옥환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을까? 구사서의 기록이외에, 일부 당시에도 약간의 정보가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이익의 칠절시 <<과마역>>와 칠률 <<과마역이수>> 및 유우석의 <<마외행>>에는 양옥환의 행방에 대한 세번째 견해를 담고 있다.

 

이익의 시에서는 혈세탁군연화혈(血洗托君蓮花血)”, “태진혈염마제진(太眞血染馬蹄盡)”이라고 적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피가 말발굽을 가득 적셨다니. 그 뜻은 양귀비가 군인들의 칼에 맞아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는 말이다.

 

두보도 그의 시 <<애강두>>에서 명모호치금하재(明眸皓齒今何在), 혈오유혼귀부득(血汚遊魂歸不得)”이라고 적었다. 여기서 혈오(血汚)”라는 두 글자가 관건이다. 만일 양귀비가 목을 매어 죽었다면, 분명히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양귀비를 죽인 방식이 목을 매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칼 같은 것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우석의 <<마외행>>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귀인견제의(貴人牽帝衣) 저회전미목(低回轉美目) 풍일위천휘(風日爲天暉) 귀인음금설(貴人飮金屑)” 여기서는 음금설에 주목해야 한다. 그 뜻은 귀비가 금속을 삼켜서 자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는 서정과 과장이 섞여있기 마련이다. 정확한 사료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시에서는 공동의 정보를 나타낸다. ,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양귀비의 행방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이다. 어느 하나를 택하더라도 최종행방은 결국 정변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정변은 태자 이형이 기획한 것이다. 그와 진현례는 양귀비를 주살하도록 선동했지만, 실제로 창끝은 당현종을 향했다. 당시의 혼란한 국면을 보자면, 당현종 한 사람이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안전조차 보장받기 힘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양귀비를 도망치도록 정교한 계획을 세웠겠는가? 소위 목을 매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이나 바꿔치기계략은 모두 양귀비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생겨난 것이다. 당시에 극도로 위급한 상황을 고려하면, 양귀비가 죽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죽은 후, 태자 이형과 진현례등은 병사들을 선동하여 양귀비의 시신을 검사하도록 선동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만일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양귀비 본인이 아니라면, 혹은 양귀비에게 숨이 남아 있었다면, 태자등은 이를 구실로 당현종을 죽일 수도 있었다.

 

태자등은 아주 잘 알았다. 당현종에게 있어서, 양국충을 죽이는 것은 용인할 수 있지만, 양귀비를 죽이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고통스럽고 격렬한 내심의 투쟁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여러 사람의 분노를 거스릴 수 없었다”. 협박을 받고 있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하에서 당현종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양귀비를 죽일 수 밖에는.

 

대당제국을 40년간 통치해온 천자가, 마지막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귀비의 목숨마저도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그날 저녁, 양귀비의 시신은 역정 서쪽 1리 떨어진 길가의 언덕배기에 묻었다. 그제서야 병사들의 분노가 가라앉았고, 모든 사람이 만세를 소리쳐 외쳤다. 당현종은 그렇지만 조금도 위안이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진현례등 장병들과 얘기할 때도 양국충은 언급했지만, 양귀비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슬픔은 이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마외병변의 결말이다. 처량하고 애처롭지만, 방법이 없다. 역사는 쇳덩이처럼 차가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