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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귀비)

양귀비와 안록산의 사통설

by 중은우시 2010. 11. 24.

 

: 월초(越楚)

 

후세인들에 의하여 중국고대 ‘4대미녀중 하나로 꼽히는 양귀비는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난 용모를 지녔을 뿐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으며, 음률에도 능통했으니, 당나라 연예계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의 최고 스타로서, 스캔들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양귀비는 야사, 패기, 희극등에서, 그녀의 최대정적인 매비(梅妃)’를 만들어 냈을 뿐아니라, 그녀로 하여금 바람을 피우게까지 만들어졌다. 그녀가 안록산과 사통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스타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바르게 행동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오물을 뿌릴 수 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당현종 천보14(755), 삼진절도사인 안록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동관을 함락시키고 장안이 위기에 처한다. 당현종은 양귀비와 조정대신을 이끌고 사천으로 황급히 도망친다.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금군의 장병들이 정변을 일으켜, 양국충을 죽이고, 당현종에게 양귀비를 사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후 당나라는 8년이 걸려 역사상 유명한 안사의 난을 평정한다.

 

안사의 난은 양귀비와 관련은 있다. 최소한 안록산은 청군측(淸君側, 임금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을 내세웠는데, <<신당서. 측천무후.양귀비전>>에 따르면, “()록산이 반란을 일으켜서, ()국충을 주살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고, 또한 (양귀)비와 그녀의 여러 언니들의 죄를 지적했다그러나, 신구당서를 뒤져보아도, 양옥환(양귀비)과 안록산이 애매한 관계라는 기록이나 암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신당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현종이 안록산을 총애하며, 그에게 양씨집안의 여러 언니들과 형제의 결의를 맺도록 하였는데, 안록산은 양귀비를 모친으로 모셨다. 매번 천자를 배알하러 올 때면 양씨집안사람들이 연회를 베풀어주었다그런데, 여기의 양씨집안사람들에는 양귀비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귀비는 이미 황실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귀비와 안록산의 염문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것은 그저 순전히 유언비어수준의 항간소식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파파라치가 궁중에 숨어들어 몰래 사진이라도 찍어놓은 것일까?

 

<<개원천보유사>>, <<양태진외전>>, <<녹산사적>>등의 야사패기이건 아니면 <<당사연의>>, <<오동우>>등 소설잡극이건, 우리는 모두 양귀비와 안록산의 사랑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서 오늘날의 사진집과 비슷할 정도여서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중에는 귀비삼일세녹아(貴妃三日洗祿兒)”라는 스캔들도 있다. 양귀비가 양아들인 안록산을 위하여 몸을 씻겨주는 이벤트를 했다는 것이다. “세삼(洗三)”은 고대의 풍습으로 어린아이가 출생한 후 3일째 되는 날, 목욕의식을 거행하는데, 친구들을 불러서 영아를 축복하는 것이며, “삼조세아(三朝洗兒)”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앞으로는 복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양귀비가 궁궐안에서 그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안록산을 씻겨주었다니, 이는 정말 헛웃음을 금치 못할 일이다.

 

원나라때 백박의 잡극 <<오동우>>를 보면, 안록산이 궁궐에 들어온 후, 양귀비와 애매한 관계였는데, 양국충에게 발견되었고, 양국충은 당현종에게 이를 밀고한다. 안록산은 궁에서 쫓겨나고, 어양절도사로 임지가 바뀌어 변방을 지키도록 한다. 안록산이 떠난 후, 양귀비는 밤낮으로 안록산을 그리워했고, 마음에 번뇌가 생겨난다. 안록산이 거병한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양귀비를 빼앗기 위함도 포함되고, 강산을 얻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사연의>>에는 이렇게 묘사한다: “안록산과 양귀비는 1년간이나 함께 뒹굴었다. 심지어 양귀비의 유방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양귀비는 당현종에게 발각될까봐, ‘하자(河子)’를 만들어 가슴을 가렸다여기서 하자는 당나라때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일종의 내의이다. 이것까지도 양귀비가 가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다.

 

가장 대단한 것은 이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 216귀비세녹아(貴妃洗祿兒)’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 양귀비가 비단으로 만든 강보로 안록산을 싸고, 궁녀로 하여금 채색가마로 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당현종도 친히 참석하여 세아를 보고 상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안록산은 궁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귀비와 함께 식사를 하고, 밤늦도록 궁을 나오지 않아서, 바깥에 추문이 무성했지만, 황상은 의심하지 않았다당현종은 양귀비와 안록산이 밤새도록 같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의심하지 않았다니, 당당한 당명황을 백치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사실, 양귀비와 안록산의 사통설은 항간의 소문일뿐이고, 여러가지를 따져보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첫째, 정사에 아무런 기록이 없다. 암시조차도 남겨놓지 않았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야사의 기록에 의존했으므로 믿기 어렵다. <<자치통감>>은 원래 황제를 교육시키기 위한 자료이다. 사마광은 양귀비와 안록산의 이야기는 써먹을 거리가 된다고 보고 이를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얼굴 두껍게도 자치통감의 안에 넣어버렸다. 다시말해서, 사마강이 쓴 귀비세녹아의 시간은 천보10년인데, 이때는 바로 양귀비가 당현종의 총애를 한껏 받고 있는 때였다. 두 사람은 같은 가마를 타고, 같은 방에 머물며, 두 사람을 위한 연회자리를 만들고, 두 사람을 위한 침실을 만들었을때였다. 거의 두 사람은 붙어다녔다. 안록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둘째, 양귀비가 안록산을 좋아할 동기가 없다. 양귀비는 실질적인 황후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였다. 조정의 재상은 자신의 오빠인 양국충이다. 안록산은 겨우 변방을 지키는 지방관리에 불과했다. 그녀가 의탁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만일 양옥환이 개인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굳이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많고 아주 뚱뚱하고 용모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며, 언어도 저속했다. 어찌 우아한 귀부인인 양귀비가 그를 좋아할 리 있겠는가?

 

양귀비와 안록산의 사통설은 연예찌라시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당나라왕조의 추종자들은 안사의 난에서 희생양을 찾아야 했다. 양귀비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그래서 양귀비에게 안사의 난의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또 하나의 홍안화수(紅顔禍水, 예쁜 여자가 화를 불러온다)’이다.

 

양귀비를 홍안화수로 만들려다보니, 그녀의 정적도 하나 만들고, 그녀의 정부도 하나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야 그녀갸 마외역에서 죽은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양귀비는 죽어 마땅하고, 현종이 이처럼 부녀자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여인에 빠진 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