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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황혜란(黃蕙蘭): 민국시대의 패션리더

by 중은우시 2010. 12. 29.

 

: 장방주(蔣方舟)

 

 

 

무책임한 소문들에 따르면, 1920년대 송경령과 손중산이 광주를 떠나 북평(북경)으로 왔을 때, 송경령은 자신이 입고 있는 의상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마침 외교관인 고유균(顧維鈞)의 집에 머무는 기회에, 그녀는 고유균부인의 옷장을 훔쳐보았다. 왜냐하면 고유균부인이 입는 옷은 분명히 최첨단유행의 옷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후 그녀는 북평에 있는 동안 치파오(旗袍)를 입었는데, 이는 고유균 부인에게서 패션의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고유균의 당시 부인은 세번째 부인으로 황혜란이었다. 송경령이 그녀에게서 최신 유행의 경향을 알아보려한 것도 이해가 된다. 황혜란은 명문집안규수로 사교계의 명사였고, 당시 동방패션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여인이었다. 어느해인지 Vogue지에서 최고의상상에 뽑힌 중국여성이기도 하다.

 

황혜란의 부친은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사탕대왕 황중함(黃仲涵)이다 그는 부인이 18명이었고, 자식이 42명이었다. 황혜란은 그 중 그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다.

 

그녀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이 3살도 되지 않았을 때, 모친은 그녀에게 80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었다. 목걸이는 어린아이 주먹만했다. 그녀가 목걸이를 차면, 큰 보석이 그녀의 가슴을 쳐서, 가슴에 아주 보기 흉한 상처가 남기도 했다. 그제서야 모친은 이 다이아몬드가 너무 크다고 깨닫고는 보모에게 목걸이를 벗겨서 잘 보관토록 했다. 나중에 더 크면 목에 찰 수 있도록. 황혜란에 다르면, “그렇지만, 내가 컸을 때도 그것을 자주 차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항상 새로운 것이 손에 들어왔고, 더 잘 다듬었고, 더욱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황혜란의 소녀시기는 유럽에서 보낸다. 거기서 많은 황실의 인물과 명사들을 만난다. 그러나 정확한 남편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파리에서 당시 32살된 고유균을 만날 때까지는. 그들의 결합은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결합한 합리적인 한 쌍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때부터 황혜란을 고귀한 부인으로 보기 시작한다. 고유균은 그녀의 돈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당시의 정부는 고유균과 황혜란을 위하여 북경에서 집을 빌려준다. 그 집은 오삼계가 진원원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성안에 있고, 10아르에 200간의 방이 있었다. 황혜란은 빌려서 사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부친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예 사버린다. 집에는 40명의 고용인이 황혜란이 수시로 개최하는 파티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일했다.

 

황혜란의 또 하나의 취미는 바로 새로운 패션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시내의 여성들이 따라하는 것을 보고는 즐거워했다. 민국시대에는 과시(過時, 시대에 뒤떨어지다)’에 대한 공포감이 현대여성들보다 심했다. 그녀들은 최신 유행이라면 뭐든지 따라하려 했다. 이것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다. 모든 관심을 의복의 최신유행에 두었었다.

 

황혜란의 패션생에서서, 가장 뛰어난 성과라면 그녀의 옷감재질에 대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아한 중국부녀들은 중국비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프랑스옷감을 좋아했다. 그러나 황혜란은 옛날식 꽃을 수놓은 비단을 쓰기 시작한다. 이를 가지고 수화단삼 이나 금사연단장고를 만들었다. 이는 외국영화에 나오는 신비한 중국풍이고, 황혜란의 공이 컸다.

 

홍콩의 어떤 사람들은 옛날식의 꽃을 수놓은 치마를 피아노에 덮어두어 장식하곤 했다. 이것은 먼지를 막기 위하여 덮어두는 것이니, 가격이 아주 쌌다. 황혜란은 이런 적지 않은 옛날 치마를 사모아서, 자주 저녁에 입곤 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인기를 끈다. 그리하여 이 치마들은 가격이 수백배 오르게 된다.

 

황혜란은 스스로를 패션리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하는 사람들을 드러내고 무시했다. 그녀는 이런 일을 조소했다. “한해 겨울 나는 피부병으로 양말을 신을 수가 없어서 맨발로 상해를 돌아다녔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런지 얘기하질 않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상해의 부녀들이 하나둘 추운 겨울에 양말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나중에 피부병이 나아서, 다시 양말을 신었는데, 그녀들이 나를 이상하게 봤다.”

 

그녀는 일생동안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이렇게 부를 자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쁘게 보았다. 장학량의 말에 따르면, 황혜란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여인이라는 것이다. 장학량에 따르면 그녀는 하는 일도 없이 결혼후에 다른 남자를 빼앗고, 마작이나 하고, 자신의 나이도 속이고, 성깔도 나쁘다는 것이다. 한번은 고유균이 바람을 피우다가 들켰는데, 그녀는 마작을 하다가 찻물을 고유균의 머리부터 부어버렸다. 다 붓고나서도 고유균은 전혀 끄덕도 하지 않고 그냥 마작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들은 결혼한지 36년후에 이혼한다. 고유균은 민국정부 주필리핀총영사였던 양광생의 미망인 엄유운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죽을 때까지 그는 네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부인인 그녀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황혜란은 자서전에서 남편에 대한 나쁜 말은 적지 않았다. 원망하는 말도 적지 않았다. 그녀가 책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옛날에 얼마나 호사스러웠는지, 얼마나 잘나갔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생활방식, 그녀의 취향, 담량은 유행을 따르거나 유행을 따르지 않거나 여인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국내외의 명사들이 그녀에 대하여 얘기하곤 했는데, 프랑스의 마리왕후, 모나코왕비, 미국의 트루먼의 부인등이 있다.

 

말년이 되어, 그녀는 뉴욕에 은거한다. 신화와 같은 세계는 사라졌다. 그녀의 부동산은 하나하나 정부에서 몰수한다. ‘가정주부로서 그녀는 아무런 장점도 없었다. 부친이 죽은 후에는 그저 은행이자로 살아갔다. 그녀는 할머니가 되어서야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는 법을 배웠다. 생활은 그녀에게 매번 탐험의 연속이었다.

 

실망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한번은 황혜란이 집으로 돌아올 때, 한 여인이 그녀를 알아봤다: “내 기억에 당신은 당시에 내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옷은 자주 바뀌었고…..” 황혜란은 자신의 안색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황급히 뒷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신은 지금도 아름답습니다. 다만…”

 

말하지 못한 뒷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황혜란의 자서전은 <<끝나지 않는 파티>>이다. 황혜란은 1993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