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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세 황후: 허서리씨(赫舍里氏)

by 중은우시 2010. 8. 15.

글: 양진(楊珍)

 

강희4년(1665년) 칠월, 효장태후는 사대보신(四大輔臣)의 하나인 소니(索尼)의 아들인 영시위내대신 갈포라()의 딸인 허서리씨(赫舍里氏)를 황후로 정하고, 예물을 보냈다. 같은 해 구월 초여드레, 현엽(玄燁, 강희제)은 조모의 명을 받아, 허서리씨와 대혼예식을 거행했다. 신랑의 실제연령은 11살 6개월이었고, 신부는 11세 9개월이었다.

 

허서리씨가 입궁한 후 태황태후, 황태후와 계속 잘 지냈고, 두 사람의 호감과 환심을 얻었다. 나이어린 여자로서, 이렇게 복잡한 환경속에서 잘 처신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치에 밝고, 온유하고, 현숙하며 대가집 규수의 풍모를 지닌 소녀를 자신의 황후로 삼았으니 현엽도 아주 만족해 했다. 그는 조모가 선택해준 여인에 만족했고, 조모의 안목에 감탄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듦에 따라, 그는 황후와의 애정이 깊어갔다.

 

강희8년(1669년) 십이월말, 허서리씨는 사내아이를 하나 낳는다. 그는 현엽의 적장자이다. 현엽은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승호(承祜)라고 지었다. 이름 그대로 이 아이가 하늘의 보우를 받아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대했다. 적장자의 탄생은 허서리씨의 중궁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대청왕조의 승계에 공헌을 했고, 이를 통하여 태황태후,황태후로부터 더욱 환심을 얻어냈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졌다.

 

어린 승호는 총명하고 귀여웠으며, 활발했다. 현엽은 그를 아주 아낀다. 그런데, 이 아이는 부친이 바라던대로 신명의 보호를 받지를 못하고 이년반만에 병사한다. 강희11연 이월초엿새, 적성탕천(赤城湯泉)로 조모를 따라갔던 현엽은 이 나쁜 소식을 듣고, 여러날동안 우울해 하였다. 그의 곁에 있던 신하들도 그가 침울해하는 것을 보고는 계속하여 절애(節哀)를 권했다. 현엽은 아주 이성적이고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승호의 앞에 이미 몇몇의 황자, 공주가 차례로 병으로 요절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승호가 그의 유일한 적자라는 것 외에 허서리씨가 낳았다는 것도 관련될 것이다. 현엽은 황후와 애정이 깊었고, 자식의 죽음은 그의 슬픔을 더하게 만들었다.

 

승호의 죽음은 허서리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녀의 신체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점차 쇠약하며, 병이 많아졌다.

 

강희12년(1673년)말, 평서왕 오삼계가 운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삼태자(朱三太子)" 양기륭(楊起隆)이 경성에서 방화를 저지르며 사건을 일으켰다. 일시에 인심이 흉흉하게 되었고, 어떤 북경백성들은 서산으로 도피했다. 강희13년 삼월, 정남왕 경정충(耿精忠)이 복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월, 청나라조정은 북경에 있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을 죽였다. 바로 이 때 허서리씨는 둘째를 낳으려고 하였다.

 

마음이 평온한지 여부는 임산부에 아주 중요하다. 출산조건이 비교적 낙후되었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다. 허서리씨는 아직 21세도 되지 않았고, 자식을 낳기에 가장 좋은 연령대였다. 여러해전에 이미 순조롭게 한차례 분만한 적이 있다. 이번 출산에 의외의 사고가 발생한 것은 그녀가 당시의 국면이 긴장되고 우려하였다는 것과 관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오월 초사흘 오전 사시, 허서리씨는 바라던대로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그녀는 출산으로 기가 빠져서 오후 신시에 곤녕궁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청나라때 황후중에서 가장 젊어서 죽은 사람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난산으로 사망한 황후이다.

 

새로 적자를 얻는 기쁨과 황후를 잃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단지 2시진을 사이에 두고 현엽은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다. 그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이로 인하여 조회를 5일이나 취소하고, 허서리씨에게 "인효황후(仁孝皇后)"라는 시호를 내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갈포라는 1등공에 봉해지고, 대대로 세습되도록 한다.

 

허서리씨가 죽은 후, 삼년동안 현엽은 새로 황후를 세우지 않는다. 십육년 팔월, 그는 조모의 명을 받아 두번째 황후를 책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