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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는 왜 양양(襄陽)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09. 7. 15.

작자: 미상

 

양양(襄陽)을 지나면서, 제갈량(諸葛亮)이 선주(先主, 유비)에게 종(琮, 劉琮)을 공격하면 형주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선주는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조조는 형주를 공격했다. 유표(劉表)의 아들이자, 형주의 새로운 후계자인 유종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당시 유비는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이 일에 대하여 하나도 알지 못했다. 조조의 부대가 완성(宛城)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적군의 종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유비는 그저 황급히 물건을 챙겨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양양을 차지하라고 권했고, 그렇게 하면 형주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유비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손을 쓰지 않았다.

 

사실, 일찌기 그 전에도 어떤 사람이 유비에게 유종과 형주의 신하들을 붙잡아서 강릉(江陵)으로 데려가면 국면을 통제하는데 편리하다고 말했지만, 유비는 유표가 죽기 전에 나에게 자식을 부탁했는데, 내가 어찌 신의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유형주(유표)와 만나겠는가?

 

유비는 정말 차마 양양을 빼앗을 수 없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유표와 유비는 비록 친척이라고는 하나, '차마 빼앗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유비는 한번도 무슨 일에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잘 참아왔지만, 그것은 그가 남의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싶지 않아도 참아야 했다. 참는 것은 성격이지 마음이 아니다. 성공을 거둔 효웅이라면 그가 '불인지심(不忍之心,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만 가져서는 삼국의 난세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안희현에서 만일 '불인지심'을 지녔더라면, 유지는 독우(督郵)를 채찍으로 치지 않았을 것이다.  장판파에서 만일 '불인지심'을 지녔더라면,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촉중으로 들어가면서, 만일 '불인지심'이 있었다면 유비는 그에게 양식과 병사를 보내주었던 유장의 땅인 익주(益州)의 땅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일을 보면, 유비가 말한 '불인지심'이라는 것이 그저 입으로만 떠드는 것일 뿐이고, 그가 참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하필 이때 차마 하지 못했는가?

그저 한 가지 해석뿐이다.

양양은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공격할 수 없는가? 공격해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무너뜨려도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답안은

공격해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공격해서 무너뜨려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먼저 공격해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래의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양양성은 견고하다.

 

양양은 형주의 중요도시이다. 역대이래로 중요한 방어기지였따. 성의 견고한 정도는 다른 성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몇대에 걸쳐 힘들게 노력해서, 방어능력은 더욱 강해졌다. 아무리 대군이 포위를 하고, 중무기의 도움을 받더라도, 절대로 단기간내에는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다. 대량의 인력 물력을 쓰더라도, 예견한 효과를 거둔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상상속의 일은 항상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하다.

 

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절대로 민심에 부응하는 몇 가지 정치구호를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절대로 오합지중이 성아래에서 함성을 몇번 지른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맹강녀처럼, 하늘을 향해서 곡을 몇번 한다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비록 전설상의 유비가 곡하는데 재주가 있었지만.

 

둘째, 유비는 실력이 없었다.

 

이때 양양성의 아래에 있는 유비는 수만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중 많은 사람은 일반백성과 군인가족이었다. 진정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2,3천명이다. 그리고 전투력도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도망치는 중이었으므로 투지가 왕성하지도 않고, 실력도 강하지 못했다. 이는 그후 당양전투에서 조조의 정예부대 5천 호표기를 만나자마자 바로 궤멸해버렸던 것에서 유비의 부대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엉터리부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부대를 가지고 양양성을 함락시키려고 하여도 그냥 곤란한 것이 아니라 아주 곤란했을 것이다.

 

셋째, 양양은 병력이 많았다.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당시 양양에 주둔하던 부대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이 있는 중요도시의 방어문제이므로 유표가 절대로 소홀히 했을 리가 없다. 양양병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무리 약하다고 하더라도, 견고한 성벽을 근거로 어느 정도 시간을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양양의 병력은 성을 지키면서 편안히 힘들게 공격해오는 부대를 대적한다는 것이다. 유비의 부대는 이미 많은 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두 부대를 비교해보면 실력에서나, 인원수에서나, 장비에서나, 전력에서나 어느 한 분야에서도 같은 반열에 놓고 얘기하기 힘든 것이다.

 

넷째, 유비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조조의 선두부대는 이미 완성에 도착했다. 양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만일 1일에 삼백리를 간다고 계산하면, 당일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유비가 만일 이때 양양성과의 전투에 매달린다면, 시간을 길게 끌어야 하고,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조의 군대가 곧 도착할 것인데, 앞뒤에서 협공을 받는다면 단순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부도 말하기 어렵다.

 

행군하고 전투하는 것은 시각을 다투는 일이다. 시기를 잃게 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총명한 장수들이라면 일반적으로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유비도 그렇다.

 

다섯째, 양양은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 기록되어 있는,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니, 유종은 두려워 일어나지 못했다. 유종의 좌우와 형주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선주에게 마음이 돌아섰다" 즉, 당시 양양의 인심이 어찌할 바를 몰랐고, 사대부들은 대부분이 유비에게 마음이 돌아섰다는 것이다. 유종이 지키기 힘들기때문에 쉽게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양양의 대권은 채모, 괴월과도 같은 강경파인물, 강경파 가족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바로 유표가 살아있을 때에도 이들을 뒤흔들기는 힘들었다. 하물며 어린 유종은 그저 명목상의 우두머리일 뿐인데, 채모, 붕월이 적극적인 투항파였다. 그런데 어찌 양양성내에 유비가 창궐하는 것을 놔둘 수 있겠는가? 유비를 따르는 형주인사는 발언권이 있고, 실권을 장악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시국에 대하여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이는 나중에 조조가 상을 내리는 형주인사의 명단에서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공격해서 함락시켜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얘기해보자.

 

이때의 형주는 이미 뜨거운 감자였다. 공격하여 함락시켜도, 평정할 수가 없었다. 양양의 내부요소는 아주 불안정했다. 조조가 온 후에 다시 파이를 나누고 싶어하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준동하고 있으므로 안정시키기가 어렵다. 가장 주요한 것은 조조의 대군이 곁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다. 유비가 어찌 짧은 기간내에 유효한 부대를 조직해서 방어와 반격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미지수이다.

 

생각해보면 싸워도 싸워서 이길 수가 없고,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다. 유비는 그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명목을 내걸고 양양성의 아래에서 멀어져 가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