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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공자(孔子)에 대한 역사상 10가지 이미지 (II)

by 중은우시 2008. 10. 5.

 

여섯째 이미지는 "유신화(維新化)"이다.

 

청나라말기의 강유위는 "무술변법"을 시행했다. 그는 고대사상자원을 발굴하여 변법의 이론근거로 삼으려 했다. 강유위는 <<공자개제고>>에서 공자를 유신운동의 조사로 만들었다. "육경(六經)"은 공자가 "탁고개제(托古改制)"하려는 것이며, 자기의 정치이상에 따라, 고대의 요, 순의 말로 친히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탁고개제"하였는가? 강유위는 공자가 "포의로서 제도를 바꾸자면 일이 커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니, 선왕에 의탁하여 사람들을 놀라지 않게 하고, 스스로 화를 피하는 것만 같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의미는 공자는 일반 백성으로서 국가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니, 이는 놀라운 일이다. 아예 고대의 제왕인 요, 순의 명의로 진행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지 않게 할 뿐아니라, 자신도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강유위가 스스로 한 말이다. 강유위는 변법을 하고자 했으며,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청왕조를 구하고자 했다. 청왕조의 구제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는 개조후의 "유신화"된 공자의 이미지로 이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유위는 <<춘추필삭대의미언고서>>에서 "공자의 도는 그 근본이 인(仁)에 있다. 그 이(理)는 공(公)에 있고, 그 법은 평(平)에 있으며, 그 제(制)는 문(文)에 있다. 그 체(體)는 각자에게 각자의 분수를 명확히 하는데 있고, 그 용(用)은 시대의 조류와 함께 하는데 있다...그러므로 공자는 '성지시자(聖之時者)"이다." 강유위의 해석에 따르면, 공자의 도리는 "여시진화(與時進化, 시대와 함께 진화한다)"하는 것이다. 이는 공자사상의 본질이 계속적인 개혁, 계속적인 유신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시대와 함께 진화할 수 있을 것인가? 강유위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공자는 시대와 함께한다는 색채를 강조했고, "유신화"된 공자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일곱째 이미지는 "추화(醜化)"이다.

 

청나라말기이래로 공자의 이미지는 날로 떨어졌다. 혹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고도 할 수 있고, 혹은 무정하게 타격을 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태평천국의 홍수전은 농민의거를 일으키면서, 청왕조의 통치계층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소위 "역대제왕전제의 호신부"인 공자본인 및 그의 사상에 대하여도 전혀 호감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공자가 사람을 가르친 책으 잘못을 추궁해야 한다"고 했고 <<태평천일>>이라는 책에서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냈다: 천부상제가 공자를 심판했고, 천사로 하여금 그를 묶어서 채찍질하도록 하였다. 공자는 천형 그리스도에게 애원했다. 상제가 채찍질을 멈추게 하고, 그를 영원히 인간세상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 태평천국의 군대가 도달한 곳에는 공묘를 불태우고, 공자상을 훼손시켰다. <<사서>> <<오경>>을 요서(妖書)라고 불렀다. "일체의 요서를 만일 읽고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일률적으로 모두 참한다" 태평군은 공자와 그 사상을 반대한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괴, 력, 난, 신(怪力亂神)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겠다"고 하였고, "귀신은 경원한다"고 하였다. 귀신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홍수전은 상제교를 창립하였는데, 귀신을 믿지 않는 공자는 자연히 추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정견 및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추악화시킨 것이다.

 

나중에 원세개가 나라를 훔친 후, 민국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공교(孔敎)를 국교로 삼고, 공자를 존중하고, 경전을 읽도록 제창했다. 장태염의 <<타공(打孔)>>이라는 글에서 유학은 중국의 화의 근본(禍本)이라고 하였다. 공자의 "가장 큰 오점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귀이록(富貴利祿)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오늘 혁명을 실행하고자 하고, 민권을 제창하고자 하는데, 공교는 절대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5.4"신문화운동의 창도자인 진독수는 청년들에게 "철저한 각오와 용맹한 결심으로 신사회, 신국가, 신신앙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공교와 단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손만으로 공자점(孔子店)을 타도한 노영웅"이라는 오우(吳虞)는 공자의 충(忠), 효(孝)관념은 종법전제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유가의 주장은 헛되이 종법사회가 군국사회를 견제하도록 하여, 완전히 발달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가 남긴 독은 홍수나 맹수보다 못하지 않다" 오우는 공자를 "도구(盜丘, 구는 공자의 이름)"라고 욕하였다. "도척의 해악은 일시적이지만, 도구가 남긴 화는 만세에 미쳤다" 이러한 비판은 당시에는 전혀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고 여겨졌다. 다만 감정화, 과장화된 언론색채는 공자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추화'시켰다.

 

수백년동안 관찰자의 각도가 다름에 따라, 공자는 서방역사상 몇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로 형성되었다.

 

첫번째 이미지는 "철인(哲人)"이고, 두번째 이미지는 "지자(智者)"이고, 세번째 이미지는 "완인(完人)"이다. 공자의 사상은 개략 16세기부터 주로 서방선교사를 통하여 서방에 전파되었다. 수백년동안 관찰자의 각도가 다름에 따라 공자의 서방역사상의 이미지는 여러가지 서로 다른 것으로 형성되었다.

 

첫번째 이미지는"철인"이다.

 

명나라말기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중국선교사>>라는 책에서, "중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공자이다" 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것은 그의 생활태도가 절대 서양고대의 철학자에 손색이 없다고 하였다; 많은 서방철학자들은 그와 함께 논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거나 쓴 것은 모두 중국인들이 금과옥조로 지키고 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든 제왕도 공자를 존경하고, 그가 남긴 유산에 감격한다고 하였다. "비록 중국철학자가 바로 국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왕은 철학자에 견제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독서인들이 입고 있는 것이 유복(儒服)이라는 것을 알았고, 읽는 것은 "사서오경"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토론하는 것이 '공맹지도'라는 것을 알았으며,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황제도 유학자를 신봉하고 그의 말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알았다. 그가 서방에 전달한 결론은 바로 "중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공자"라고 말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두번째 이미지는 "지자"이다.

 

독일의 헤겔은 비록 "공자의 철학은 바로 국가철학이다. 중국인의 교육, 문화와 실천활동의 기초를 구성한다"고 하였지만, "공자는 그저 한 실질적인 세상의 지자이다"라고 하고, 철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헤겔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공자는 그저 상식과 도덕을 중시했다. 그가 말한 것은 일부 선량하고 노련하며 도덕적인 교훈이다. 2. 공자는 사변철학을 몰랐다. 그러므로, 공자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책이 종래 번역된 적이 없는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이다.

 

헤겔 본인은 중국어를 몰랐다. 그는 공자사상을 그저 선교사의 번역본으로 이해했다. 그가 접촉한 것은 구체적인 언어환경이 결핍된 몇 가지 공자어록이었다. 그는 공자사상의 전모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공자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는 없다. 헤겔은 유럽중심주의자였고, 동방문화를 경시했다. 그는 심지어 중국어는 사변에 적합하지 않다고 편견을 가지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은 전종서 선생의 <<관추편>>에서 신랄하게 반박되어 있다.

 

세번째 이미지는 "완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일부학자는 공자를 고도로 찬양했다. 공자를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볼테르는 공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라는 말은 그리스도도 한 적이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저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을 뿐이지만, 공자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공자의 "이직보원, 이덕보덕(以直報怨, 以德報德)"의 격언을 찬미했다. "서방민족은 어떤 격언이건 어떤 교리이건 이 순수도덕과 비교할 것이 없다. 공자는 자주 인의를 말했고, 사람들이 이런 도덕을 실행한다면 지상에는 무슨 전쟁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볼테르는 자기의 예배당에 공자의 화상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예배했다.

 

프랑소와 케네(Francois Quenay, 1694-1774)는 프랑스 중농주의학파의 창시자이다. 마르크스는 그를 "현대경제학의 시조"라고 칭했다. 또한 그를 "정치경제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시켰다"고 하였다. 1758년, 케네가 발표한 <<경제표>>라는 책에서, 그의 제자는 "유사이레 단지 3대발명이 있다: 첫번째 발명은 편지의 발명이고, 두번째 발명은 화폐의 발명이며, 세번째는 이 둘의 결과인 <<경세표>>의 발명이다"라고 하였다. <<경세표>>라는 책은 유가의 <<주역>>의 64괘를 모방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케네를 "유럽의 공자"라고 하였다. 이 일파는 공자를 높이 평가했다: "공자가 유교를 세운 목적은 인류의 천성을 회복하자는 것이고, 더 이상 우매와 정욕에 가리워지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다....이성을 표준으로 모든 불합리성에 대하여 그들은 물동(勿動), 물사(勿思), 물언(勿言)하도록 하였다. 종교도덕의 아름다움이 이 수준에 이르렀다니 더이상 더할 것이 없다. 다만, 또 하나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일은 바로 이런 도덕교훈을 전세계에 보급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