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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장형(張衡)의 지동의(地動儀)는 쓸모있었는가?

by 중은우시 2010. 12. 3.

 

: 방주자(方舟子)

 

 

 

중국의 고대과학자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금방 동한시대에 다재다능했던 대학자 장형을 떠올린다. 그리고 장형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바로 그가 발명했다는 지동의를 떠올린다. 8마리의 하마와 8마리의 용이 마주보고 입을 벌리고 있는 복원모형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예술품이다. 이를 통하여 장형의 발명품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최근 들어서 지진이 빈발하면서, 사람들이 지진국을 이렇게 비난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장형의 지동의도 지진의 예보할 수 있는데, 너희들 지진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찌해서 이렇게도 무능한가?” 당연히 장형의 지동의는 지진예보를 할 수도 없고, 지진예보를 위하여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멀리서 발생한 지진을 감측하기 위한 것이다. 진앙지를 확정할 수도 없고, 지진의 등급을 계산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지진계와는 비교할 수보차 없는 것이다.

 

지동의는 일찌감치 실전되었다. 그것이 지진을 감측할 수 있었는지 여부도 지금은 수수께끼이다. 백여년동안, 국내외의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범엽의 <<후한서.장형전>>에 기록된 간단한 묘사에 근거하여, 각종 모형을 설계했고, 지동의를 복원하고자 애썼다. 중국의 중학교과서에 실린 모형도는 그중에서 가장 유행한 것으로 1951년 왕진택이 설계했다. 그러나, 이들 복원모형은 어느 하나도 지진검측에 쓸 수가 없다. 그저 예술품으로 장식할 수 있을 뿐이다.

 

2005, 중국지진국의 전문가는 그들이 3년간의 연구를 거쳐, 새로운 지동의 복원모형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지진검측기능을 실현했고, 전문가의 감정과 국가의 검수를 거쳤다. 그들은 매체에 지동의의 새로운 모형으로 하북 당산, 운남 노서, 월남 멍이에서 발생한 3번의 진짜 지진을 검측했다고 하였다. 듣기에 믿을만 해 보였다. 그러나, 이 세번의 지진은 각각 1976 2000, 2001년에 있었다. 지동의의 신모형은 그러나 2005년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이 신모형으로 옛날 지진을 검측할 수 있었을까? 원래 지동의가 검측한 것은 실제 지진의 발생이 아니었다. 실험실에서 모의지진을 일으켰다. 실험할 때 이 지진이 수백, 수천미터 바깥에서 일어난 것으로 가정했다. 이 지동의 모형을 만든 후에, 중국국내에는 매년 5급이상의 지진이 여러 번 발생하고 있고, 모두 이 지동의의 검측범위내이지만(월남 멍이의 지진은 4.9급이다), 이 지동의 모형이 지진을 검측해냈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2008년 문천대지진때는 북경에서도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북경에서 전시한 그 지동의모형이 검측해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만일 검측해냈다면 이렇게 큰 사건을 설계자가 2010년에 발표한 지동의와 관련한 논문에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지동의 모형의 지진검측능력은 실제로 진정한 지진을 검측해내는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장형이 가지지 못했던 물리학, 지진학의 지식과 현대공법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인력, 물력, 정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지동의의 지진감측능력을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장형이 만든 지동의가 정말 쓸모있었는지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후한서.장형전>>은 그것이 유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번은 지동의의 기관이 발동하였는데, 사람들은 아직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경사(낙양)의 학자들은 모두 지진의가 엉터리라고 얘기했는데, 며칠 후 사자가 왔는데, 과연 농서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동의가 교묘하다고 감탄했고, 황제도 사관에게 지동이 발생한 방위를 기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문제가 있다. <<후한서.장형전>>에서 지동의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시기는 양가원년(132)이다. 장형은 영화4(139)에 사망한다. 이 기간동안 <<후한서>>에는 단 1번의 농서지진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2(138)의 지진이다. 일반적으로 지동의가 검측한 것은 바로 이 지진이라고 본다. 그러나, <<후한서.오행지>>에는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번 농서지진은 경사(낙양)에서도 진동을 느낄 수 있었고, 파괴가 심각했다고. “성곽이 갈라지고, 가옥이 부서지고, 사람이 눌려죽었다경사의 학자들이 지동의에 대하여 기이하다고 감탄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형전>>의 이야기와는 모순된다. 이를 보면 지동의가 검측한 것이 이번 지진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지동의 모형의 설계자는 새로운 학설을 내세웠다. 지동의가 검측한 것은 더욱 이전의 또 한번의 농서지진이었다고. 그리고, 시간과 장소도 아주 구체적으로 밝혔다. 양가3년 십일월 임인(134 12 13)의 한양(현재의 천수)지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진에 대하여 <<후한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다. 설계자는 몇 개의 문헌에서 자료를 끌어모아 견강부회적으로 추리한 것이다. <<후한서.순제기>>에는 양가3년 십일월 임인일에 사도인 유기, 사공인 공부가 면직되었다고 되어 있다. 원굉의 <<후한기>>에는 더욱 상세하개 재난으로 인하여 면직되었다고 적었다. 청나라의 학자인 혜동은 <<후한서보주>>에서 <<노국선현전>>을 인용하면서, 사공 공중연이 양가3년에 지진으로 면직되었다고 적었다. 그리하여, 설계자는 양가3년 십일월 임인에 정사에서 빠진 지진으로 두 명의 고관이 면직되었다고 본다. 지진이라고 명확히 언급한 <<노국선현전>>은 진()나라때 쓴 야사이고, 믿을만한 자료가 아니다. 사실상, <<후한서.주거전>>에는 사도 유기가 한재(旱災, 가뭄)로 면직되었지, 지진으로 면직된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이를 보면 <<노국선현전>>의 기록이 잘못임을 알 수 있다.

 

한걸음 양보하여, <<노국선현전>>의 기록을 믿을만 하다고 하더라도, 지진의 발생지를 기록하지는 않고 있다. 이를 가지고 어떻게 그것이 바로 <<장형전>>에 나오는 농서지진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지동의 신모형의 설계자는 장형의 <<사수시(四愁詩)>>에서 근거를 찾았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다: “아소사혜재한양(我所思兮在漢陽), 욕왕종지농판장(欲往從之隴坂長)”. 그리고 이것을 한양에서 발생한 지진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수시>>는 그리움을 쓴 시이고, 정치적인 우의가 있는 것이다. 지진과 관계있는 교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소사혜재한양뿐아니라, “아소사혜재태산” “아소사혜재계림”, “아소사혜재안문도 있는데, 왜 하필 그것을 지진에 관한 시라고 읽는가? 태산, 계림, 안문에도 지진이 발생했었는가? 사실 장형은 그저 태산, 계림, 한양, 안문을 가지고 동서남북을 상징했을 뿐이다.

 

지동의의 제작에서 장형의 죽음까지, <<후한서>>에는 모두 8번의 지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진은 모두 경사(낙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두 <<장형전>>에 나오는 지진이 아니다. 사서에서 누락된 외지의 지진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다만, <<장형전>>에서 말하는 농서지진은 경사의 학계를 뒤흔든 큰 사회적 사건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가능한 설명은, 그것은 그저 지동의가 신기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날조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다. 중국고대의 사서는 원래 사실, 전설 및 신화를 혼재하여 싣고 있다. 장형이후에 그 지동의가 작용을 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장형이 후풍지동의(候風地動儀)라는 이름의 기기를 만들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지동의가 지진을 검측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도 없고, 믿을만한 이유도 없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이 복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쓸모없는 장식품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