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나침반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11. 6. 10.

글: 양동효(梁東曉)

 

 

 

나침반은 지남철 혹은 사남(司南)으로 불린다.

 

2006년 9월 27일, 중국의 도로 O킬로미터표지가 북경의 중심지인 정양문(正陽門) 앞에 세워져서 공중에 개방되었다. 청화대학 왕베이보(王培波) 교수의 설계방안의 전국에서 온 1024개방안중 선정되었다. 이 표지의 전체 모양은 중국전통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는 개념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중간에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사령(四靈)'의 도안을 새겼다. 그전에 민간에서 요구해온 나침반모형을 두는 방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일찌기, "중국0Km표지"도안을 모집할 때, 어떤 사람이 '나침반'의 도안을 O킬로미터표지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은 문화적인 의미도 있고, 공중이 알아보기도 쉽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금방 부정된다. 당시 외부에서는 확실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그 나침반모형, 즉 구리판위에 자석숟가락을 놓아둔 '나침반' 모형은 확실히 1940년대말에 나타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형이 역사상 진정한 나침반인지는 중국국가박물관 내부에서도 일찌감치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2년,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의 금속물리연구를 하던 전임조(錢臨照)는 특수한 임무 하나를 받는다. 중국과학원 원장 곽말약(郭沫若)이 소련을 방문하는데, 중화문명을 상징하는 선물을 소련에 주려고 하며, 선물은 중국고대과학성과를 대표하는 '나침반'으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물리연구소의 전임조는 가장 좋은 자석을 찾아내고, 전 북경에서 옥을 가장 잘 다듬는 유리창의 옥기술자에게 이를 갈게 했다. 중앙문화부 문물국 박물관처의 왕진탁(王振鐸) 처장이 제공한 방안에 따라, 유리창의 기술자는 한나라때 숟가락 모양으로 조형이 아름다운 천연자석기물을 조각해 낸다.

 

이 자석숟가락은 장교하고 아름다운 청동반의 중앙에 놓였다. 청동반은 동한때의 점을 치는 도구였다. 사방에 사유, 팔간, 십이지지 합계 24개 방위를 새겼다. 청동반의 중앙은 매끄럽게 갈았다. 그러나, 반복실허을 해도, 이 천연자석으로 만든 '사남'은 남북방향을 가리키지 못했다. 그러나, 곽말약이 떠나야 하는 날짜는 가까워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자석숟가락에 자력(磁力)을 충전하여, 그 자체의 자력이 충분히 커서, 숟가락이 회전하는 마찰력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연자석으로 만든 '사남'이 남쪽을 가리키지 못하는 것은, 전임조가 1952년에 겪은 문제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왕진탁은 1945년에 반복하여 무수히 실험을 했다. 역시 같은 문제에 부닥쳤다. 1947년, 왕진탁은 논문 하나에 이렇게 썼다. 그는 최종적으로 옥기술자를 시켜서 천연자석으로 자석숟가락을 만들게 했고, '사남을 만든 후 지반에 놓고 돌리니, 여전히 강한 자성을 나타냈다. 그것이 여전히 극을 가리키는 성질을 지녔다. 그 손잡이는 남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 지남의 천연 자석숟가락은 논문에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국가박물관 고고학자인 손기도 국가박물관의 연구자들도 지금까지 이 천연자석숟가락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신중국이래로, 중국역사박물관시기이건, 중국국가박물관시대이건, 수장하고 전시한 진열품 중에서 '사남'은 모두 인조로 자력을 충전한 것들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인들은 이런 방법을 알 수가 없엇을 것이다. 만일 고대인들이 정말 천연자석으로 '사남'을 만들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여 남쪽을 가리키게 한 것일까?

 

1937년, 나이 37세의 영국 생화학자 조셉 니담(李約瑟)은 3명의 중국유학생 심시장, 왕응래, 노계정의 영향을 받아, 중국고대문명에 깊은 흥미를 나타낸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매주 체코의 한학교수 구스타프 하롱에게 두 시간씩 중국어과목을 배운다. 교과서는 하롱이 번역하고 있던 <관자>였다.

 

1942년 9월, 니담은 영국왕립학회의 명을 받아, 중국의 배도 중경으로 가서, "영국문화위원회주중대표기구"의 대표를 맡는다. 1943년 봄, 그는 먼저 중국 곤명으로 간다. 전쟁의 와중에도 여전히 비범한 창조력을 보여주고 있는 학교와 실험실을 돌아본다. 그후 중경으로 가서 부임한다. 니담은 중국에 있는 4년동안, 사천, 운남, 하남, 섬서, 호북, 감숙등지를 고찰한다. 실험실에서 과학자들과 들판에서는 촌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많은 전통과학기술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한다. 그는 1946년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미 많은 진귀한 문헌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파리유네스코에서의 강연에서, 중국고대의 과학성과를 크게 찬양한다. "중국인의 가장 위대한 세 가지 발명은 제지및인쇄술, 나침반 및 흑화약이다."

 

삼대발명이건 사대발명이건, 나침반은 항상 포함된다. 그렇다면 나침반은 도대체 무엇인가? 당시의 서방인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중국인도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니담이 중경, 돈황, 북경등지의 중국고대문명을 고찰할 때, 왕진탁은 막 서른을 넘겨, 항일전쟁으로 사천에 가 있었다.

 

항전전에 연경대학 고고학전공인 대학원생인 그는 이미 '장형지동의'외형과 내부구조도를 그린 바 있고, 그 동작원리에 관한 논문도 썼다. 사천, 운남등 후방을 힘들게 옮겨다니면서, 그는 여전히 고고와 고문화재복원업무를 멈추지 않았다.

 

왕진탁이 1947년 12월 15일에 완성한 논문을 보면 "삼십사년 십월(1947년 10월)" 그는 이미 사천 남계현 이장진에서 인공자석과 천연자석숟가락 사남으로 동반에서 극성을 정확히 가리키는지 실험을 했다. 이전에 그는 이미 사남의 형상에 대한 설계와 옥상탁세(玉床琢洗)의 과정을 마쳤다.

 

이 복원과 실험의 과정에서 그는 사남을 '숟가락' 모양으로 설계한다. 이 '숟가락(勺)'모양으로 하게 된 유래는 바로 명나라 가정 통진초당본으로 전해지는 동한 왕충의 <논형.시응편>에 근거한 것이다. 왕진탁의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개 글자는 바로, "사남지표(司南之杓), 투지어지(投之於地), 기저지남(其柢指南)"(사남의 손잡이는 바닥에 놓으면 그 뿌리가 남쪽을 가리킨다).

 

이 열두글자의 인도하에, 자석숟가락을 네모난 지반에 놓은 모형이 탄생한 것이다. 이 조형은 나중에 중국인들이 새롭게 나침반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다만, 이 조형으로 만들어낸 자석숟가락이 어떻게 남쪽을 가리킬 것인지는 수대의 문화재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난제였다.

 

중국국가박물관의 고고학자 손기는 2005년 제4기 <중국역사문물>에서 <간론'사남'겸급'사남패'>라는 글에서 더욱 오래된 <논형.시응편> 판본을 언급한다. 북평역사박물관 구장잔송본 존권14 내지 17이다. 송나라때 판본에 상응하는 몇 개 글자는 "사남지작(司南之酌)"이다. "작"이라는 글자는 원나라때까지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작"과 "표"는 고문에서 의미가 전혀 다르다.

 

한 글자의 차이는 사남의 원형에도 문제될 뿐아니라, 사남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핵심문제에도 관련된다. 이외에 '기저지남'의 '저(柢)'는 <집운> <광운>을 보면 모두 '대형(碓衡)'이라고 하고 있다. 대형은 '횡목(橫木)'이다. 이는 사남거(司南車)의 목인(木人)의 방향을 가리키는 엉덩이부분에 해당한다.

 

손기는 또 다시 지적한다. 사남은 사실 지남거(指南車)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남지작, 투지어지, 지저지남"의 해석은 "지남거를 사용하여, 그것을 땅 위에 놓아두면, 그 횡간은 남방을 가리킨다."는 것이 된다.

 

송나라판본의 <논형.시응편>의 "사남지작'이건, 현존 중국국가도서관의 청나라 판본 함분루 성명통진초당본의 송각원명보수본 <논형.시응편>에서 쓰이는 것은 모두 "사남지작"이다. 이 판본은 비록 청나라때의 것이지만, "송각원명보수본"이므로 송나라때의 "작"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남거는 송나라이전 문헌에서 '사남'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일종의 나무로 만들어, 기계구조의 운도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물건이다. 손기의 논점이 정확하다면, 이는 천연자성재료의 남쪽을 가리키는 것과는 무관하다.

 

현존하는 문헌에 따르면, 중국인이 자석의 성능이 남북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 것은 북송때부터이다. 사남의 출현은 북송때보다 훨씬 이르다. <논형>은 동한시대의 저작이다. 만일 사나믈 천연자성물질인 자석숟가락으로 이해한다면 중국인들이 자석이 남북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를 개략 천년 앞당길 수 있다.

 

중국인이 자석이 남쪽을 가리킨다는 성질을 발견한 것이 북송때 나타나지만, 이것도 인류에게는 최초이다. 그러나, 1940년대말에서 1950년대초의 그 특수시기에는 중국고대과학성과를 복원하고 전시하는 것이 과학문제만이 아니었다. 이는 민족감정과 민족자부심에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 '숟가락모양'의 복제품은 천연자성으로 남쪽을 가리킬 수 없었지만, 여전히 국제적인 우의의 중임을 맡았다. 1952년, 그것은 중화고대문명의 상징으로 소련에 보내어진다. 다음 해, 중국우정은 특별우표 '위대한 발명'을 발생하는데 모두 4장이고, 그중 제1장이 바로 숟가락 모양의 '사남'이다. 이렇게 하여 이런 '사남'의 모양은 삼척동자도 아는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1952년 여름, 니담은 북경에서 그가 서남시기에 만났던 중국과학계의 옛친구들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새로 왕진탁과도 알게 된다. 북해단성 옥불사의 정자에서 왕진탁은 니담에게 그의 '사남'을 설명한다. 니담의 기억에 그들은 '그의 결론을 체현한 아름다운 모형을 같이 토론했다.'

 

왕진탁과의 이번 만남은 니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니담은 <중국고대과학>이라는 책에서, "18세기이전의 중국이 서방에 전한 기계와 기타기술"에 '자라반(磁羅盤)"이 서방의 11세기보다 앞선다고 적었다. 이것은 중국고대의 수라반(水羅盤)이나 한라반(旱羅盤)과는 다르다. 그는 '천연자석으로 만든 숟가락'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사대발명'은 역사교과서에 들어갔고, 대대로 중국학생들이 이러한 숟가락모양이 '사남'을 배우고 있다. 이 '사남'은 계속하여 외국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해지고 있다. 선물로 주면서 오늘날 복제한 모형이라고 덧붙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 진귀한 모형선물이 현대과학기술로 자성을 강화한 것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중국고대문명이 아니라, 현대과학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계는 1956년부터 이미 이 숟가락형의 사남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고한 동북사범대학 물리학원 유병정 교수는 사남에 대하여 1956년부터 의문을 나타냈다. 그는 7가지의 서로 다른 천연자석을 찾아내어, 대량의 물리학 시험을 하여 천연자석은 사남처럼 남쪽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그리고 2006년에 이 분야의 논문을 발표한다. 사남은 숟가락형의 자석이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다.

 

사실상 1952년에 인조자장으로 자석에 충전한 일이 당시의 중국역사박물관내부에서 무슨 비밀도 아니었다. 1980년대가 되어, 사회혼란이 지나가고, 정상적인 연구가 시작된다. 손기는 각종 고서적판본을 찾아서, 사남에 대한 기재를 면밀히 고찰한다. 그리고 왕진탁의 명나라본보다 이른 송나라본에서 '사남지작, 투지어지, 기저지남'이라는 기록을 찾아낸다. 그리고 문자의 각도에서, 사남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자 했다.

 

2002년, 숟가락형 '사남'의 모형은 남극에 놓인다. 2008년에는 숟가락형 '사남'이 올림픽 개막식에 출현한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역사박물관은 1980년대말에 이미 '사남의 모형은 잘못된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1990년대말부터 더 이상 공중에 전시하지 않고 있다.

 

'사남'의 복제와 연구는 과학실험과 고고복원업무과정에 있다. 계속 잘못을 저지르고, 수정하고, 다시 잘못을 저지르고, 다시 수정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숟가락'형의 물건이 원래 지지 말아야할 내룡을 지고 있다. 시대의 조류 속에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상징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