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백수흑(知白守黑)
2010년 8월 1일, 유네스코 제34회 세계유산회의에서 하남 등봉의 "천지지중(天地之中)"역사건축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여기에는 소림사(少林寺), 탑림(塔林) 및 초조암(初祖庵)을 포함한 11개의 고대건축물이 포함되어, 새로운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하남은 문화대성이고, 등봉이 '천지지중' 문화유산등록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은 기쁜 일이고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하남의 또다른 지방의 사람들은 '천지지중'이라는 말에 아마 마음 속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등봉을 빼고도 하남에는 최소한 1개의 "천지지중"이 있기 때문이다.
등봉이 세계문화유산등록한 역사건축군은 중화문화의 정수이고,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천지지중"이라는 얘기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사기.주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토규(土圭)의 길이가 1척5촌이며, 하지(夏至)의 날이 되면, 팔척의 표(表)를 세우면 그것이 토규와 같다. 그리하여 지중(地中)이라 부른다. 지금의 영천양성(潁川陽城)이 그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천양성은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현재의 등봉시 고성진(告成鎭)이다. 이를 보면 등봉이 "천지지중"이라고 신청한 것도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0년전, 하남성 남부에 위치한 주마점(駐馬店)이 시로 승격할 때, 소문에 따르면, 당시의 관리들은 이 기회에 비교적 속된 이름인 주마점을 버리고 '천중시(天中市)'로 개칭하려 했다고 한다. 나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명칭을 고치지 못했다. 그러나, "천중"이라는 단어는 주마점의 대명사로서 지금도 여전히 매체와 도시에 나타난다. 지금 등봉에서 갑자기 '천지지중'이라고 나타나니 주마점의 사람들로서는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등봉은 '천지지중'이라고 부르는데 역사적 근거가 있다. 주마점은 그렇다면 무슨 역사적 근거라도 있는 것일까? 사마천의 <<사기>>보다 더욱 먼저 만들어진 <<우공(禹貢)>>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禹)임금은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었는데, 예주(豫州)가 구주의 가운데 있고, 여(汝)가 예주의 가운데 있다. 그리하여 천중(天中)이라 한다". 여기서 "여"는 고대의 채주(蔡州)이고, 지금의 여남(汝南)이다. 여남은 바로 주마점의 관할지역내에 있다. 그러므로, 주마점이 '천중'이라고 하는 것도 전혀 근거없는 헛소리는 아니다.
여남은 역사가 유구하고 명성을 떨친 곳이다. <<자치통감>>에서 전형적인 전투사례로 꼽은 <<이소설야입채주(李塑雪夜入蔡州)>>는 바로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남에는 이런 민요가 유행한다: "천중산(天中山), 삼척삼(三尺三), 내도천중산(來到天中山), 일보가등천(一步可登天)". 여기서 말하는 천중산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고적이자 관광지이다. 이것은 여남이 '천중'이라는 설의 유력한 역사적 근거이다.
<<중수여남부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임금이 천하를 구주로 나누고, 예주는 구주의 가운데이다. 여는 다시 예주의 가운데이다. 그래서 흙을 모으고 돌을 쌓아 천중을 표시하였으니, 이름이 천중산이다." <<독사방여기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천중산은 부성의 북쪽 3리쯤에 있다. 예로부터 해의 그림자를 가지고 분수를 측정했는데, 이곳이 정(正)이다." 이를 보면, 등봉의 사료기재와 마찬가지로, 여남의 천중산도 고대천문측량이 남긴 역사유적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천중산은 여전히 여남성의 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점유면적은 약 800평방미터이고, 3미터가량의 높이이다. 위에는 흙을 쌓았고, 아래는 돌을 쌓았다. '산'이라고 부르는 이 자그마한 흙무더기는 주무왕(周武王)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산은 아니다. 그러나 볼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유적임은 분명하다. 여남인들이 스스로 '천중'이라고 주장하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이다.
여남인들이 더욱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이 곳에 당나라때 대서예가 안진경이 친히 쓴 "천중산"이라는 비문이 있다는 것이다. 당덕종 건중3년, 회서절도사 이희열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다음 해, 안진경이 하창으로 이희열의 군대를 위문하러 간다. 이희열은 안진경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강경,유화책을 모두 쓰며, 투항하여 같이 조정에 대항하자고 한다. 안진경은 끝까지 따르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그를 채주(지금의 여남)으로 보낸다. 그때 안진경은 "천중산"이라는 힘있는 3글자를 썼고, 지금도 남아있다.
이를 보면, 여남의 '천중설'은 사료기재도 빠르고, 민간전설도 있고, 현재실물도 있다. 그저 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짝퉁도 아니다. 여남이 '천지지중"이라고 신청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된 명제이다. 등봉과 여남은 모두 하남에 있다. 하나는 북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다. 책에도 모두 기록이 있다. 증거도 모두 확실하다. 모두 '중앙'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천하에 어찌 두 개의 중앙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확실히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역사상 '천지지중'은 등봉과 여남의 두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자료를 살펴보면,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문헌에는 각각 '천지지중'의 장소를 다르게 표시하고 있다. 여남과 등봉의 '천지지중'은 고대인들의 천문측량의 산물이다. 이외에 천지지중에 대하여는 각양각색의 주장이 있다. 역사상 영향이 가장 큰 것은 "낙읍지중설(洛邑地中說)"이다.
불가사의한 점은, 낙읍과 등봉의 "천지지중설"은 모두 <<사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주공(周公)이 7년간 정사를 돌보다가, 성왕(成王)이 자라자, 주공은 정치권력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신하의 위치로 내려간다. 성왕은 풍에서 소공에게 낙읍을 다시 건설하게 한다. 이는 무왕의 뜻이다. 주공은 다시 점을 치고 살펴서 마침내 건축하고, 구정에 거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곳은 천하의 가운데이다. 사방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는 길이다' 그리고는 <<소곡>>, <<낙곡>>을 지었다." 이를 보면, 주무왕이 일찌감치 낙양을 수도로 정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공으로 하여금 이를 살펴보게 하였고, 주공은 낙양이 천하의 중앙이라고 보고, 도성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의 경학가 만사대(萬斯大)의 저작인 <<주관변비(周官辨非)>>에서 이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선유는 양성이 땅의 중앙이라고 하여 중표를 설치했다. 그렇다면 주공은 왜 양성을 도읍으로 정하지 않고,낙읍을 건설했는가? 낙읍은 양성에서 멀다. 땅의 중앙이라고 하여 도성으로 삼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선유(先儒)의 견강부회때문이라고 한다. 주공이 낙읍을 건설한 후, 주성왕이 즉시 천도하지 않았다. 주평왕의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낙읍으로 천도한다. 고대학자는 주성왕이 '땅의 중앙을 구했지만, 거주하지 않은' 점을 통하여 '천하지중'은 실제로는 가설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하남의 3 곳이 '천지지중'이라고 하는데, 이를 보면 고대인들이 '천지지중'이 어디인지에 대하여 임의로 정했던 것같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고대인들의 천문학적 지식의 한계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필요때문이었다. 만일 당초 주성왕이 낙읍을 수도로 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곳을 수도로 정하려고 했으면, 마찬가지로 그 곳이 천하의 중앙이라고 했을 것이다. 당연히, 천문학의 각도에서 보거나, 정치적인 필요에서 보거나, 당시의 현실과 괴리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해되지 않는 점이라면, 고대인들은 종교신화의 각도에서 천지의 중앙을 찾은 경우인데. 더더욱 이해가 힘들게 된다.
<<여씨춘추.유시람>>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백민(白民)의 남쪽, 건목(建木)의 아래, 해가 중천에 뜨면 그림자가 없고, 소리쳐도 울리지 않는 곳이 천지의 중앙이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백민부락은 중국의 동북지방에 거주하였고, 여기의 '건목'은 황제가 심은 하늘로 통하는 큰 나무라고 한다. <<회남자.지형훈>>에서는 '건목은 도광(都廣)에 있고, 여러 황제가 오르내리는 곳이다" 도광은 현재의 성도(成都)지역이다. 이곳의 큰 나무가 바로 천지의 중앙이며, 그렇게 인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천지의 사이에있는 여러 신들이 오르내리는 통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화는 과학적인 근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일중무영(日中無影, 해가 중천에 뜨면 그림자가 없다)"의 주장은, 나중에 종교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당나라때의 승려 도선(道宣)이 쓴 <<석가방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천축국은 하지의 날이 그림자가 없다. 소위 천지의 가운데이다. 우리나라 중원은 그림자를 측정하면, 약간 남는 부분이 있다. 삼대를 거치면, 크기가 약간 증가감소한다. 계산할 때 오차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보면 중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지의 가운데는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 있던 중국이 아니라,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로 바뀌었다. 이런 주장은 확실히 불국의 지위를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외에 <<박물지>>에서 인용한 <<하도.괄지상>>의 기록에 따르면: "땅은 남북으로 삼억삼만오천오백리이다. 땅의 자리가 높이 솟은 곳이 곤륜산이다. 너비가 만리이고, 높이가 만일천리이다. 신물이 소생하고, 성인선인이 모여있는 곳이다. 오색의 구름이 나오고, 오색의 물이 나온다. 그중 백수는 남으로 흘러 중국으로 들어오는데, 이름이 하(河)이다. 그 산의 가운데에는 하늘에 닿으니, 가장 가운데 있는 것이다." 여기는 곤륜산에 성인,선인이 거주하는 것과 연결시키고, 천제(天帝)의 하도(下都)라는 것이다. 이렇게 천지의 가운데를 확정하는 방법은 신화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근거가 박약하다
혜시(惠施)는 전국시대 송(宋)나라(하남 상구) 사람이다. 당시에 저명한 정치가, 변객(辯客)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우주만물이 구성된 원리를 연구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내놓는다. 그의 학설은 <<장자.천하편>>에 수록된 10개의 명제로 알 수 있다. "중(中)"에 관하여, 혜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안다. 연(燕)의 북쪽이며, 월(越)의 남쪽이다." 연나라는 당시 가장 북쪽에 있는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남부이다. 월국은 당시 가장 남쪽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절강일대이다.
혜시가 말한 '천하의 가운데'는 어느 특정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원지역이 아니다. 이 관점은 어느 정도 중국고대인들의 중국중심관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우주의 무한성을 설명하였다. 무한하므로 중앙은 없다. 반대로 어느 누구이든지, 어느 곳이 천지의 중앙이라고 생각하면, 그곳이 천지의 중앙이라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천문지식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천문지리에는 정치와 종교의 색채가 가미되었다. 고대인들이 보기에 천하의 중앙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주장들은 괴이하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천하의 중앙은 실제로 한나라때의 혼천설(混天說)과 개천설(蓋天說)의 논쟁에서 시작된 것이다.
개천설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고, 형체가 서로 비슷하며, 천지가 서로 덮고 있다고 주장한다. <<진서.천문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하늘은 삿갓과 비슷하고, 땅은 엎어놓은 쟁반같다. 천지는 각각 중앙이 높고 주변이 낮다. 북극의 아래가 천지의 중앙이다. 그 곳이 가장 높다." 개천설은 사람의 상상과 육안의 관찰을 기초로 생성된 학설이다. 여기에는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고, 종교와 정치에 이용당한다.
혼천설은 하늘은 하나의 원구이고, 지구가 그 가운데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계란의 노른자가 그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천구(天球)"는 우주의 끝이 아니고, "천구"의 밖에도 하늘이 있다고 한다. 장형(張衡)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곳을 지나서 계속 가면 미지의 세계이다. 미지의 세계는 우주를 일컬음이다. 우의 겉은 무극이고, 주의 끝은 무궁이다." 혼천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의 무한성이다. 현대과학과 아주 가깝다. 혼천설은 혼천의를 통하여 정확하게 관측했고, 이를 통하여 천체의 운용을 설명했다. 그렇게 하여 역법의 정확성을 높였고, 인류의 우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이를 보면, 역사적으로 '천지지중'은 진나라이전에 자주 등장했다. 개천설을 기초로 나타난 우주학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가짜과학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천문지식이 유한하여, 사람들은 등봉, 여남, 낙양, 곤륜산등을 천지의 중앙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해가 된다. 나중에 혼천설이 나타난 후, 우주는 무한하다고 말해지며, 점차 천하의 중앙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만일 현대인들이 다시 고대의 낡아빠진 학설을 가지고 천지의 중앙을 따진다면 그것은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다.
'중국과 사회 > 중국의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형(張衡)의 지동의(地動儀)는 쓸모있었는가? (0) | 2010.12.03 |
---|---|
신학(神學), 현학(玄學)과 과학(科學) (0) | 2010.11.22 |
중국고대에는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나누었는가? (0) | 2010.03.27 |
단정학(丹頂鶴): 역사가 남긴 명칭문제 (0) | 2009.09.01 |
동방의 음양오행과 서방의 사원소설 (0) | 2009.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