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고대 비단길인 하서주랑에 위치한 막고굴(莫高窟)의 여러 동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제17굴 즉 장경동이다. 돈황 장경동에서 출토된 문헌은 오호십육국때부터 시작하여 오대십국, 송초까지 근 7세기에 걸쳐 있다. 그러므로, 돈황의 이들 문헌은 그 자체가 중국서법을 연구하는 살아있는 자료이다. 문헌에는 한문문헌을 제외하고도 상당한 수량의 비한문문헌이 있다. 예를 들어 고대티벳어, 회흘문, 우전(于闐)문자, 소고드문자, 쿠차문자, 범문, 돌궐문자등이 있다. 이들 여러 민족언어문헌이 발견된 것은 고대 서역중아시아역사와 중국과 외국간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보물로 가득찬 장경동이 아주 우연하게 발견될 줄은. 청나라 광서26년 오월 이십육일 즉 1900년 6월 22일, 이 날은 중국수천년의 문명발전사에게 아주 적은 한 부분이다.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이날, 한 도사의 우연한 거동은 막고굴의 운명을 뒤바꿔놓는다. 왕원록(1849-1931)은 도호가 법진이고, 호북 마성 사람이다. 1897년 혹은 1898년에 그는 돈황 막고굴을 유람하다가, 막고굴 앞의 나무로된 잔도가 대부분 망가진 것을 발견한다. 산처럼 쌓인 유사를 오랫동안 아무도 치우지 않아서, 아래층의 많은 동굴들이 묻혀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양씨를 고용하여 쌓인 모래를 치우게 된다. 이날, 양모는 쉬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피우고 남은 급급초(芨芨草)를 아무 생각없이 북벽의 빈 틈으로 집어넣는다. 그런데, 집어넣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 양모는 아주 놀라서, 손으로 벽을 두드려본다. 느낌으로는 안이 비어있는 것같았다. 그래서 즉시 왕도사에게 이를 알린다. 한밤중에 아무도 없을 때, 왕, 양 두 사람은 벽을 열고, 막은 진흙을 거두어내고 동굴입구를 찾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사람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높이 약 2미터, 너비 약 2.7미터의 동굴안에는 불교경전, 사회문서, 자수, 비단그림, 종이그림, 법기등 문물 5만여건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한 돈황 장경동은 이렇게 하여 왕도사와 양씨 두 사람에 의하여 발견된다.
자그마한 동굴의 앞에 서면 의문이 떠오른다. 이 돈황석굴내에는 일찍이 5만권의 경전, 문서가 쌓여있었던 적이 있어 국내외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도대체 언제, 누가 쌓아둔 것일까? 그리고 언제 동굴은 봉쇄되고 바깥을 진흙으로 발라서 벽화를 그렸던 것일까?
돈황학전문가, 학자들은 산더미처럼 많은 돈황문서들에 파묻혀 자세히 살펴본다. 그래도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문자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른 방법으로 알아볼 수 밖에 없다. 다른 역사자료를 통해서 추단해보면, 여러가지 가설을 내놓을 수 있다. 주요한 가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동굴안의 문서는 돈황의 각 사원에서 모아버린 폐기물이라는 것이다. 즉, “폐기설”이다. 다른 하나는 동굴안의 문서는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고의로 묻어둔 것이라는 것이다. 소위 “피난설”이다.
“폐기설”을 주장하는 대표인물은 스타인이다. 그는 이 보물을 약탈하러 왔던 첫번째 외국인이다. 스타인은 헝가리사람으로, 당시 영국에 속한 인도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고고학자이다. 장경동이 발견되기 전에 3번이나 중앙아시아를 탐험했다. 당시에 돈황에서 골동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돈황으로 간다.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그는 왕도사를 매수한다. 그는 그중 좋은 문서, 비단그림들을 골라서, 24개 상자의 서적과 5개상자의 예술품을 담아서, 1909년 영국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보물들은 런던대영박물관에 소장된다. 그는 이 책자와 비단그림을 연구하는데, 그는 이들 경전문서는 모두 돈황의 승려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폐기품이라고 본다. 불경이 많고, 불법과 경전을 존중하는 뜻에서, 한번 쓴 물건은 버릴 수도 없고, 태워버리지도 못해서 석실에 넣고 봉쇄해버린 것이라는 것이다. 장경동내에 전체 대장경이나 진귀한 물품이 없고, 대부분은 잔권단편(殘卷斷篇)이라는 점, 중간에 경전이 아닌 것 같은 것이 끼워들어가 있는 점, 심지어 잘못 베껴쓴 버린 문서도 있고, 덧칠을 한 것, 버린 문서와 기간이 지난 계약등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장경동을 봉쇄할 때는 조종수가 집권한 시기(1002-1014년)였다. 돈황의 승려는 이미 내지의 요구에 따라 대장경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정에 금은자대장경을 요구해서 받았고, 비단보자기에 황금으로 글자를 쓴 <<대반야경>>에 있었다. 그런데, 전체 대장경도 수장되어 있지 않고, 수장된 것은 잔경파권(殘經破卷)뿐이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린 것일 것이다.
일복학자 후지에다 아키라(藤枝晃)도 “폐기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폐기원인을 중국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인쇄된 불경이 권축장(卷軸裝)의 불경을 대체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도사관에 새로 인쇄본을 가져다 두면서, 권축불경은 버림받았다는 것이며, 시간은 1002년후 얼마지나지 않아서라고 본다.
“피난설”을 주장하는 대표인물은 프랑스인 Paul Pelliot(伯希和)이다. 그는 한학자로 한어에 정통할 뿐아니라, 중앙아시아의 몇몇 언어에도 정통하다. 그는 돈황막고굴에 고대의 필사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08년 막고굴로 간다. 비록 동굴내의 보물을 이미 스타인이 일부분 거두어갔지만, 그도 남은 진품중에서 적지 않은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간다. Paul Pelliot는 그가 약취한 문서에 근거하여, 이들 문서는 당시의 전란을 피하여 봉쇄시킨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당나라때 “안사의 난”이 발생한 이후, 돈황에 주둔하던 군대는 내지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떠난다. 경전과 문서는 석실에 보관하고 봉쇄한다. 이는 막고굴의 승려들이 전란을 피하고 경전문서를 전화에서 구해내기 위한 조치였다.
중국의 어떤 학자들도 피난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봉쇄시기는 서로 다르게 주장한다.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견해는 송나라초기 서하인들이 돈황을 점령하기 전에 천불동하사의 승려는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임시로 경전, 불상, 잡서등을 장경동에 넣고 봉쇄했다고 본다. 전란이 끝난 후에 다시 꺼내서 쓸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승려들은 한번 떠난 후 되돌아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동굴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비밀이 된다.
또 하나의 주장은 봉쇄시간을 송나라 소성연간(1094-1098)으로 보는 것이다. 장경동의 봉쇄는 이슬람의 전파와 관련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슬람교를 믿는 하라칸왕조가 송나라에 병사를 출동하여 서하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한다. 송나라는 이에 동의한다. 이 소식이 돈황에 전해지자, 불교도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하여 보호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천불동의 경전, 불상, 문서를 모조리 석실에 모아서 넣고는 봉쇄하는 것이다. 이외에 송황(1049년)이후설, 조씨봉쇄설, 원초설, 원명교체기설등이 있다. 이것은 모두 전란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상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장경동의 봉쇄에 관련하여 여러가지 주장이 있고 지금까지 정설은 없다. 이 부분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