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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은 어떻게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12.

글: 유계흥(劉繼興)

 

만년의 장개석(蔣介石)에게 한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죽은 후에 대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후에 대하여 여러가지 고민을 했고, 아들 장경국이 자기가 죽은 후에 순조롭게 대권을 계승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확실히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 역사과정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오랫동안 대만당국에 의하여 기밀로 유지되었다.

 

대만학자 구가홍(邱家洪)은 <<정치호정청담박심 - 사동민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동민(謝東閔)은 그가 당시 했던 '최고기밀'의 일에 대하여 아주 자랑스러워했고, 그가 '대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한 시대를 긋는 대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최고기밀'인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장개석의 '가천하'의 밀모를 도와서 성사시킨 것이고, 장개석을 성공적으로 후계자로 만든 일이다.

 

경위는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쳐갔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민당의 잔여세력이 대만으로 도망쳐갔을 때, 장개석이 대륙에서 데려간 군정인원이 대만의 거의 모든 관직을 차지했다. 대만적 인사는 하급공무원의 직위를 차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대만으로 도망쳐온 대륙인사와 대만적인사간의 갈등이 날로 첨예화되었고, 대만민중들도 이에 대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기간동안 미국과 일본의 두 나라, 특히 일본의 우익세력은 각종 채널을 통하여 대만당국에 압박을 가했다. 장개석에게 대만성장의 자리를 대만인에게 물려주어, 갈등을 완화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삼련(吳三連), 황조금(黃朝琴), 사동민등을 적극 추천했다.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생각이 강했던 장개석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너무 일찍 대만본토인사를 기용하면, 아들의 승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시간의 바퀴는 흘러서 1971년말이 되었다. 장개석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데 있어서의 장애는 기본적으로 제거되었다고 보았고, 자신의 나이도 적지 않고, 아들 장경국도 이미 60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계문제를 의사일정에 올려놓게 된다. 그러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일을 아버지의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이 제안하는 것이 아무래도 보기 좋았다. 특히 대만본토인사가 제기해주면 더욱 설득력이 있을 터였다.

 

이 문제를 노련한 장개석이 해결하지 못할 리가 없다. 1972년 2월말, 장개석, 송미령부부는 장경국을 데리고 대만남부의 일월담에 가서 휴식을 취한다. 그들 일가는 일월담의 함벽루(涵碧樓)에서 이틀간 머문 후, 장개석은 시종을 통해 대만성의회 의장이며 대만본토정치인인 사동민과 남투현장 임양항(林洋港)을 일월담으로 불러서 만난다.

 

장개석이 만나자고 하자, 사동민은 깜짝 놀란다. 그는 잘 알았다. 노친네가 표면적으로는 지방업무보고를 받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이 장씨집안에 충성하는지를 보려고 한다는 것을. 과연 장개석은 업무보고를 다 들은 후, 슬쩍 말을 흘렸다. 장경국이 그를 따라 대만으로 와서 일한지 일,이십년이 흘렀는데, 사회에서 장경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사동민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다. 대답을 아주 적절하게 잘 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빌어 장개석과 장경국을 대거 칭송하는 말을 한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있던 장씨부자가 아주 만족해하고, 서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질풍이 불어야 강한 풀이 어느 것인지 아는 법이다. 정국이 뒤집어져야 충신이 누구인지 안다. 장씨부자는 사동민은 장씨집안에 충성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임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일 그를 대만성 성장으로 발탁한다면, 국민당과 장씨집안에 모두 유리하고, 장경국의 후계를 순조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장개석은 장경국과 관계가 아주 좋은 총정전부 부주임 왕승(王升) 상장을 불러서 그에게 말한다: "최근들어 사회 각계에서 속속 장경국이 '행정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천여명의 '국민대회대표'가 연명으로 글을 올리고(사실상 이것은 장개석이 뒤에서 기획한 것이다), 특히 대만성의회 의장인 사동민이 강력하게 표현했다. 그는 여러번 고위층회의에서 장경국을 추천했고, 장경국이 대임을 맡을만하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왕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회에서 이처럼 장경국을 떠받드니, 너는 무봉으로 가서 사동민을 만나라. 그리고 그에게 정식으로 추천서를 써서 당중앙에 올리도록 해라. 그리하여 사람들이 장경국이 행정원장을 하는 것은 인심이 바라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이 추천서는 아주 잘 써야 한다."

 

특무출신인 왕승은 장씨부자와 2,30년간 같이 일을 해와서, 관료사회의 이런 일을 아주 잘 처리했다. 장개석의 뜻을 그는 한번 듣고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즉시 말했다: "총통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제가 즉시 사동민을 만나서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금방 왕승은 글쟁이를 불러모았다. 그리고 사동민의 명의로 추천서를 하나 초안했다. 추천서에는 장경국이 "재덕을 겸비하고, 지용을 모두 갖추어, 나라가 어려울 때 보필할 뛰어난 인재"라고도 하고, "경국선생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바라고 있고, 전국의 상하에서 모두 추천하니, 민의의 방햐이다. 민의에 따르는 것이 백성을 안정시킬 수 있고, 지혜롭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만민들이 칭송할 큰 위업을 이루는 것이 된다."

 

왕승은 추천서를 가지고 무봉으로 간다. 사동민은 읽어본 후에, 장개석의 뜻을 이해했다. 그자리에서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추천하겠다고 말하고, 추천서에 서명을 하고 날인하겠다고 동의했다. 그후에 성의회의 공용문서를 꺼내 비서에게 추천서를 다시 쓰게 한 후에, 자기의 도장을 찍었다.

 

장경국은 왕승이 가져온 사동민의 추천서를 받아보고 아주 기뻐했다. 그리고 왕승을 칭찬했다. 그후 장경국은 추천서를 장개석에게 보여준다. 장개석도 아주 만족한다.

 

다음 날, 장개석은 다시 이 추천서를 국민당중앙당부 비서장 장보수(張寶樹)에게 건네준다. 이 추천서는 사동민이 특히 사람을 통해서 타이페이로 보내온 것이며, 사동민은 국가대사에 관심이 있고, 그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니, 다음번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읽어달라고 한다.

 

1972년 5월 26일, 국민당은 중앙상무위원회회의를 개최한다. 회의시작 반시간전에, 장개석은 장보수에게 사동빈의 추천서를 부총통겸 행정원장인 엄가금에게 읽어보도록 보여주게 한다. 엄가금은 추천서를 보고는 이것은 장개석이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마음 속으로 불만은 약간 있었지만, 그는 잘 알았다. 이런 일은 그가 막으려고 해서 막아지는 일이 아니다. 아예 물이 흘러가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그는 적극적으로 사임을 표명하여, 장씨부자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자신은 나이가 이미 많아서 다시 해봐야 얼마 더 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장개석의 곁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총통, 그럼 제가 오늘 부총통과 행정원장 직을 사임하고, 경국선생으로 하여금 제 직무를 이어받도록 극력 추천하겠습니다" 장개석은 엄가금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부총통에 즉위한지 6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사임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행정원장만 사임해라."

 

이렇게 하여, 이번 중앙상무위원회는 회의전에 임시일정을 두어, 사동민의 추천서와 엄가금의 '행정원장'사임에 관하여 토론하고, 장경국을 행정원장으로 지명하기로 한다. 장보수가 추천서를 읽은 후, 회의장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어서, 회의참가자들은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다. 엄가금이 말을 마친 후에도 회의장에서 의견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개석은 회의장이 썰렁해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엄부총통이 제안한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일어서 주십시오." 회의에 참가한 중앙상무위원들은 장개석의 위엄에 눌려, 모두 일어났다. 그러나, 장보수가 사동민의 추천서를 읽을 때, 장씨부자는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띄었지만, 엄가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규정에 따르면, "행정원장"은 총통이 지명하는 것인데, 장개석은 외부에서 말이 나올까 우려하여, 엄가금으로 하여금 제안하게 한 것이다. 인욕부중(忍辱負重)의 엄가금은 시키는대로 했다. 엄가금이 이렇게 희생을 한데 대하여, 나중에 장개석이 당연히 그에 대한 위로를 충분히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정치사상 드물게 보는 부친이 총통을 하고, 아들이 행정원장을 하는 특수한 정치구조가 대만에 출현한다. 일시간에 내외의 매체들은 장씨부자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속속 공격을 한다.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가 장경국을 임명한 후, 정치수완이 대단한 장개석은 다시 두 가지 조치를 취한다. 하나는 국민당 선전부가 <<중앙일보>>, <<중화일보>>와 <<연합보>>에 글을 써서, 장경국의 재덕을 칭송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 '입법위원' 오춘청(吳春晴)으로 하여금 입법원에서 서면선전원고를 내도록 한다. 엄가금이 행정원장을 사임한 것을 칭찬한 후, 일부 입법위원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결과적으로 입법원이 장경국을 임명할 때 408표중에서 381표를 얻어, 순조롭게 임명된다.

 

장경국의 후계에 큰 공을 세운 사동민에 대하여 장경국은 당연히 보답했다. 1972년 6월 1일, 장경국은 행정원에서 취임선서를 할 때, 사동민을 대만성주석에 임명한다. 그후 장개석은 친히 사동민을 접견한다. 장경국을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왕승을 장개석은 잊지 않았다. 즉시 그를 총정전부 주임으로 임명한다. 계급도 육군상장에서 이급상장으로 승진시킨다.

 

사동민은 대만성주석이 된 후에, 미국과 일본은 모두 만족을 표시한다. 이 조치는 향후 대만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장경국이 행정원장을 맡은데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1975년 4월, 장개석이 병사하고, 엄가금이 총통을 물려받는다. 다만 이때 장경국은 이미 장개석을 이어 국민당중앙위원회주석 겸 중앙상무위원회주석의 직을 가지고 있어, 실권은 그의 손에 있었다. 엄가금도 자신이 과도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동민의 적극적인 협조에 장경국도 보답을 한다. 1978년 3월, 장경국이 제6대 총통에 오를 때, 사동민을 부총통에 앉힌다. 5월 20일, 사동민은 장경국과 함께 취임선서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쳐온 이후, 직위가 가장 높은 대만본토인사가 된다.

 

장경국은 성공적으로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1978년-1988년까지, 10년동안 두번(제6기 및 제7기 총통)의 임기를 연임했고, 1988년 1월 13일 당뇨병으로 인한 복합기관쇠약으로 대만 영민총의원에서 사망할때까지 총통직에 있었다. 당시 장씨집안의 이 정치거래에 대하여, 사동민은 계속 입을 닫고 있었다. 1999년 4월이 되어, 말년의 사동민은 자신에게 남은 날짜가 얼마되지 않는 것을 알고, 이 '최고기밀'을 그의 전기를 쓰던 구가홍에게 털어놓는다. 그리하여 진상이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