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나라는 중화민족에 가장 수치스러운 왕조이다.

중은우시 2009. 12. 13. 02:20

글: 신력건(信力建)

 

많은 사람들은 원나라는 중화민족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왕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청구(淸)라고 부르는 사람이 <<우리나라가 러시아를 정복한 전쟁사의 한 페이지>>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를 읽으면서 원나라의 징기스칸에 이르면, 몽골에서 일어나서 중원으로 들어와서 주인이 되었다. 개국이후, 킵차크, 아조프(Azov, 阿速)등의 여러 부족을 차지하고, 수부타이에게 메르키트를 멸망시키게 했으며, 디시 병력을 카스피해(寬田吉思海, 지금은 耳海로 부름)를 돌아 태화령(太和嶺, 코카서스)까지 갔다. 태종7년부터, 수부타이를 선봉으로 삼고, 왕 바투, 황자 구육, 황제조카 몽케등으로 하여금 서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10년동안 대거 러시아를 정벌하여, 야열찬성(耶烈贊城)까지 밀고 들어가고, 모스크바를 함락시켰다. 태조의 장남 주치는 그 곳에서 칸에 오른다. 이는 사상유례없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대의 영주가 개창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공격하여 취하고, 그 병력의 위세를 가지고 한 지역을 통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책에 쓰여있는 경우를 보면 우역(禹域)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쪽으로 유사에 이르고, 삭북의 광활한 토지까지 가진 경우는 없었다.... 유럽의 내륙까지 진격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통일하는 세를 이룬 것은 우리나라 전쟁사상 가장 빛나고 가장 명예스러운 한 페이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원나라 군대의 날카로움은 유라시아를 거머쥐었고, 석권하여 모두 가지려는 기상을 가졌으니, 우리나라의 후손들중 용기있는 자가 예로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여기에 쓰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내용은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원나라는 근본적으로 이민족이 중원을 침입하여 식민통치한 경우이다. 그 실제적인 통치행위를 보면, 원나라는 그저 한족을 주체로 하는 중화민족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왕조라고 할 것이다.

 

사회를 이야기하자면, 원나라는 봉건사회가 아니라 노예사회라고 하여야 한다. 원나라가 처한 역사단계는 기껏해야 반봉건반노예사회로 수백년전의 당나라의 봉건문명단계와 비교하더라도 크게 낙후된 것이다. 송나라의 인민자유의 경제상업사회와 비교하면 더욱 크게 낙후된 것이다. 최소한 수백년의 문명발전을 후퇴시켰다.

 

원나라 통치는 영주분봉제(領主分封制), 농노제로 전형적인 노예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원나라에는 대량의 구구(驅口, 노예)가 극히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이는 원나라가 노예사회라는 것을 증명한다. 개설된 인시(人市)에서 구구를 자유롭게 사고팔았다. 원나라의 한 중급관리는 백명이 넘는 구구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대사장(大使長, 노예주) 한 사람의 구구는 왕왕 천명 만명을 헤아렸다. 쿠빌라이의 총신인 아하마는 7천여명의 구구를 가지고 있었다. 구구는 바로 노예로 인신의 자유가 없다. 주인의 사유재산이다. 구구는 사장에게 조세를 바쳐야할 뿐아니라, 정부의 요역도 부담한다. 원나라의 법률은 "구구는 돈이나 물건과 같다"고 규정한다. 주인은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다. 주인이 죄없는 구구를 죽이면 장(杖) 팔십칠이고, 양민이 타인의 구구를 죽이면 장 일백칠이다. '구구' 한 명을 죽였을 때 받는 형벌은 소말을 임의로 죽였을 때 받는 형벌과 거의 비슷하다. 원나라 전호(佃戶)의 지위는 아주 낮았다. 원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주인이 전호를 때려죽여도 장 일백칠에 불과하다. 원나라는 일찌기 자유로왔던 농민을 다시 농노의 운명으로 몰아넣었다.

 

원나라는 법률의 형식으로 적나라하게 각 민족의 불평등을 규정했고, 적나라하게 동종인의 극도의 불평등을 규정했따. 원나라는 저급원시민족 유목부락이 건립한 왕조로 중국을 다시 노예사회로 되돌렸다.

 

몽골 원나라의 통치기간에 몽골인들은 전중국인들을 4등급으로 나누었다(사실은 3등급이다. 몽골인은 그들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처한 북방은 3등공민 즉, 역사서에 쓴 그 "한인(漢人)"이다. 이것은 역사서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역사서에서 말하지 않는다. 몽골인들이 어떻게 한인을 통치했는가? 필요한 군사역량과 진압도구(감옥)을 만든 후에, 최저청의 모든 마을에 몽골가정 하나를 파견해서 전체 마을의 한족을 통치하게 했다.  한족 아가씨가 만일 결혼하려면, 반드시 그 몽골인 남자와 삼일을 자야 했다. 간단한 말로 하자면 그 아가씨의 초야권은 몽골인의 것이다. 한족노인이 60세가 되면 반드시 들판에 묘혈을 파고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묘혈은 노인들이 말하는 전타묘(塼打墓)이다. 이를 보면 몽골 원나라시기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굴욕적이고,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일부 후안무치한 '애국' 역사전문가가 떠들어대는 것처럼 '강대무비하고 유라시아에 위력을 떨친' 시대가 아니다.

 

구체적인 통치조치에 있어서, 원나라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한족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5가구의 한족인들에게 식칼 1개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 식칼도 몽골인의 집에 놔두어야 했다. 몽골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족인들은 아궁이에 불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족들은 이 몽골인 남자를 습관적으로 "노조야(老爺)"라고 부르고, 몽골여인은 "노조내(老)"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림으로 그려서 주방에 붙여놓았다. 새해마다, 이 몽골인은 현성으로 전체 마을의 상황을 보고하러 간다. 이 '노조야'가 위에 좋게 말해달라고 하기 위하여 음력십이월 이십삼일에 모든 집에서는 좋은 먹을거리를 몽골인의 집으로 가져갔다. 이를 "제조(祭)"라고 불렀다. 만일 기회가 되어 시골의 "노조야" "노조내"의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림에 그려져있는 인물이 몽골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나라의 한족에 대한 잔혹한 통치는 심지어 침대에까지 이어졌다. 몽골인의 정복시기에, 한인과 다른 소수민족백성은 모든 집안의 신부의 초야를 반드시 몽골 보장(保長)과 보내게 해야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몽골이 정복한 왕조에서 최하층의 계층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유린해도 되기 때문이다. 굴욕의 초야권으로 인하여, 한인들은 결혼후 첫번째 태아는 죽여버렸다. 이것이 바로 첫째 태아를 죽이게 된 내력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위하여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이다.

 

원나라 통치자들의 한인에 대한 살육은 더욱 비인간적이었다: 몽골인들은 한때 중국인을 모두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논밭을 목장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야율초재가 극력 설득하여, 중국인들이 '납세'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은 일찌감치 중국인의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비록 그러했찌만, 몽골인들은 여전히 몇몇 대성(大姓)를 도살했다. 사천에서는 수백만의 사람을 도살했다. 몽골인의 통치는 중국을 극도로 망가뜨렸다. 한인, 남인은 천민이었다. 재산은 언제든지 빼앗아갈 수 있었다. 처나 딸은 언제든지 유린당할 수 있었다. 생명도 임의로 죽여버릴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성명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저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으로 삼았다. 무기를 지닐 수도 없었다. 그저 몇 집이 합쳐서 식도 하나를 가질 수 있었다. 몽골인의 살륙과 통치하에, 중국인구는 급격히 감소한다. 1223년(남송가정16년) 남송의 인구는 7,681만이었다. 여기에 금나라의 인구를 합치면 1억은 넘어갔다. 그러나 1278년에 남송이 멸망한 12년후인 1290년(원지정27년)에는 면적이 광대했던 원나라의 인구가 겨우 5,883만이었다. 이를 보면 얼마나 참혹하게 살륙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문화는 몽골인의 침입과 통치로 쇠락했다. 몽골인은 한때 산동연해일대에서 매년 여름가을교체기에 바닷 속에 한인을 던져버림으로써 한인인구의 증가를 막았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원나라는 중국역사상 무력이 가장 강했던 왕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은 원나라가 중국역사상 무력이 가장 강했던 왕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오해이다. 큰 인식착오이다. 원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킨후 바로 부패타락한다. 그들의 부패타락정도와 속도는 만청의 팔기자제보다 훨씬 심했다. 쿠빌라이도 멍청했다. 일본, 자바에 대한 토벌이 모두 마음은 있었으나 힘이 따르지 못했다. 죽을 때도 멍청하게 죽었다. 쿠빌라이의 이후는 더더욱 갈수록 더 못해졌다. 그래서 현재 몽골을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저 징기스칸만 떠벌린다. 그러나, 징기스칸이 죽었을 때는 중국을 통일하지도 못했따. 남송은 물론이고 금나라의 수도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었다. 원나라의 대외전적은 형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대외전쟁에서 거의 대부분 실패한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쿠빌라이는 1274년(원지원11년), 1281년(원지원18년), 두번에 걸쳐 일본원정을 하나, 모두 참패로 끝난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중국을 존경하다가 중국을 멸시하기 시작한다. 1282년(원지원19년), 1288년(원지원25년) 원나라군대는 두번에 걸쳐 안남(지금의 월남북부)를 정벌한다. 최종결과는 역시 참패로 끝난다. 1284년(지원21년) 원나라군대는 점성(지금의 월남중남부)를 공격하고, 1293년(지원30년)에는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공격하나 역시 실패로 끝난다. 쿠빌라이는 유감을 안고 죽어갔다. 쿠빌라이의 이후 원나라는 대외적으로 무슨 내세울 전적이 없다. 역사는 다시금 증명한다. 약탈을 좋아하는 깡패, 강도나 그저 불로소득을 얻기를 좋아하는 원시유목민족이 부귀한 학자문명인의 재산을 빼앗은 다음에, 행복한 생활을 즐기지만, 그들의 태도는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원나라가 성립된 후의 대외전투전적은 더할나위없이 형편없다. 원나라는 중국의 자랑이 아니라, 중국의 수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