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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홍콩신홍기(新鴻基)그룹: 고립된 곽병상(郭炳湘)

by 중은우시 2010. 11. 9.

: 진남(陳楠)

 

1년간 조용하더니, 홍콩 곽씨가문의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다시 매체의 포커스를 받고 있다.

 

부동산거두인 신홍기(순홍카이)의 창업자인 곽득승(郭得勝)이 사망한 후, 가족기업의 지배권은 곽씨가족의 신탁기금이 장악하고 있다. 이 기금은 곽씨삼형제의 모친인 현재 나이 81세된 광초경(肖卿)이 관리하고 있다. 10 4일 밤, 광초경은 신홍기지산을 통하여, 곽씨가족신탁기금의 수탁자는 이미 조정을 마쳤으며, 광초경이 계속하여 신탁기금 및 신탁기금이 보유한 신홍기지분(합계 10.82억주, 42.09%, 시가1446억위안)의 수익자로 남아있는다고 하였다. 관련뉴스자료에 따르면, 수익인을 다음과 같이 한정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차남 곽병강 및 그 가족 3남 곽병연 및 그 가족이 각각 1/3의 지분권익수익인이다. 나머지 1/3의 수익인은 장남 곽병상의 가족이다. 이 문자만으로 보면, 2008년 신홍기지산 동사국 주석 및 행정총재의 직에서 면직된 곽병상은 또 한 가지를 더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족기금에서도 빠졌다. 신홍기대변인은 7일 매체에 이 점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곽병상은 단지 상장회사의 비집행동사이고, 이미 회사의 일상운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주었다.

 

현재 나이 60인 곽병상은 4일 늦은 밤 매체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강조했다. 그 자신은 여전히 가족신탁기금의 수익인이고, 3형제의 권익은 차이가 없어야 한다. 곽병상과 다른 가족간에 합의를 이루어, 곽병상이 약 200억위안을 받아서 별도로 회사를 만들어 독립하기로 했다는 소문에 대하여는 당사자의 확인을 받지 못했다.

 

부친에서 자식으로의 승계에 가장 성공한 기업으로 공인되었던 기업이 TV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의 형제간 싸움이 금융위기를 넘어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중국식 가족기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곽씨삼형제와 부친 곽득승의 원적은 광동성 중산이다. 일찍이 부친을 따라 잡화도매를 시작했고, 1947년에 홍콩으로 이주한다. 상환(上環)에 점포를 하나 임대하여 홍흥합기(鴻興合記)라는 잡화점을 설립한다. 1952, 곽득승은 상호를 홍창(鴻昌)수출입유한공사로 고쳐서 외국물품도매업을 하고 나중에는 일본의 YKK 지퍼의 독점대리를 한다. 홍콩의 의류제조업이 흥성하면서, 그의 사업은 크게 성공하고, 양잡(洋雜)대왕이라는 별칭까지 얻는다.

 

1958, 홍콩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는 단계에 접어들면서, 부동산업종이 중천에 떠오른 해와 같았다. 곽득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친구인 풍경희(馮景禧) 및 이조기(李兆基)와 함께 영업(永業)기업유한공사를 설립하여, 부동산경영사업을 시작한다. 1963, 부동산운영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영업기업신홍기기업유한공사로 확대되고, 곽득승이 동사국주석을 맡는다. 회사명칭중 자는 풍경희의 신희공사에서 따왔고, 은 곽득승의 홍창에서 따왔으며, 는 이조기의 이름에서 따왔다.

 

곽득승, 이조기, 풍경희는 10년후에 동업을 그만둔다. 곽득승은 신홍기부동산에 남아서 계속 사업을 하고, 그룹은 1972년 홍콩에 상장한다. 시가총액이 4억홍콩달러였다. 그후, 곽득승은 계속 노력하여, 신홍기지산은 1980년대 홍콩부동산업계의 5()중 하나로 불리며, 시가총액이 63.5배나 성장하여, 254억홍콩달러에 이른다.

 

1990 10, 곽득승은 은퇴1년후 심장병이 재발하여 사망한다. 이가성, 포옥강, 소일부, 곽영동, 정유동, 이조기등 그의 장례에 참석한 사람에 대하여 당시 신문은 이들 부영자(扶靈者)들은 홍콩의 반세기의 경제명맥을 이어온 사람들이다라고 평하였다.

 

곽씨삼형제는 신홍기지산의 사업을 순조롭게 물려받는다. 곽병상은 그룹동사국주석 겸 행정총재를 맡고, 곽병강과 곽병련은 부주석 겸 동사총경리를 맡는다. 신홍기지산의 관리구조는 윗대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다. 곽득승은 곽씨작정신탁기금을 만들어소 신홍기지산의 42%지분을 보유하게 하고, 수익인을 광초경 및 곽씨삼형제로 하였다. 광초경은 신탁기금의 후견인이고 동시에 신홍기지산의 막후영혼인물이다. 세 아들이 다투면 매번 그녀가 나서서 해결한다. 신탁기금이 보유한 신홍기지산의 지분은 임의로 나누어 팔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형제 세 사람은 각자 개인자격으로 신홍기지산의 지분을 추가로 보유하고 있다.

 

외부인이 보기에, 곽씨삼형제는 신홍기지산의 파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트라이앵글이다. 곽병상과 곽병강은 각각 영국 런던대학의 구조공학 석사와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곽병련은 캠브리지대학 법률학과와 하버드대학 경영학과의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세 사람은 자주 공동으로 협의한다. 중대사항에 대하여는 충분히 토론하여 결정하며, 회사실적발표나 자선활동등 중요한 경우에는 그들이 항함 함께 나타난다. 이들은 안정적이고 명석하여 재벌2세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모범적이었다. 신홍기지산의 조용하고 온화한 기업이미지도 사람들에게 비교적 좋은 평을 들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신홍기지산이 개발한 부동산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들은 부동산사업을 대륙까지 성공적으로 확대한다. 1990년대초, 대륙의 투자프로젝트에는 북경 왕푸징의 신동안시장, 방장의 신성시광장, 상해의 중환광장등이 있다. 이뿐아니라, 신홍기지산이 관여한 업종은 호텔경영, 건축, 재무, 보험, 극원, 화물창고, 의류제조, 공공운수 미 전신업등에 걸쳐 있다.

 

현재 신홍기지산의 시가총액은 3400여억홍콩달러에 달한다. 1990년의 254억홍콩달러보다 10여배나 늘었다. 그리하여 신홍기지산은 홍콩에서 가장 성공한 폐쇄적 가족적 상장기업으로 일컬어졌었다.

 

포브스의 금년 2월 홍콩40대갑부리스트에서 곽씨형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합쳐서 나타났다. 170억달러로 3위를 차지한다. 1위와 2위는 각각 이가성과 이조기였다.

 

그러나, 형제동심, 기리단금(兄弟同心, 其利斷金)의 화합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환점은 1997년이다. 이해 9, 곽병상은 심수만(深水灣)에서 별명이 대부호인 장자강(張子强)에게 납치되어 5일간이나 갇혀 있으면서, 구타를 당한다. 알려진 바로는 작은 나무상자에 집어넣어서 구멍으로 겨우 숨을 쉬었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하면 곽병상에게 불리하게 될까봐, 그의 부인 이천영(李天潁)은 단독으로 납치범을 만나서, 장자강을 설득하여 석방금 14억홍콩달러를 7억홍콩달러로 낮추는데 성공한다. 그녀의 담량에 대하여는 곽씨집안의 모두가 인정했다.

 

곽병상은 비록 풀려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돌아온 후에 실제업무는 두 동생에게 넘겨서 처리하게 하고, 자신은 점차 핵심업무에서 멀어져갔다. 그저 회사의 사교활동에 참석할 뿐이었다.

 

곽병강과 곽병련이 실권을 장악한 후, 인사에서도 조정이 생긴다. 두 동생의 심복들이 회사에 포진한다. 곽병상은 명의만 사령관이었다.

 

비록 이후에도 신홍기지산은 부동산업계에서 잘나갔지만, 삼형제간의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업그레이드된다. 이 갈등은 2007년부터 폭발한다.

 

알려진 바로는 곽병상이 오랫동안 실무에서 멀어져 있다가 돌연 회사의 구체적인 업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관여하는 핵심업무가 갈수록 많아지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형제간의 감정을 가장 상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외부인에게 중요한 업무들을 위임한 것이다.

 

홍콩신문보도에 따르면, 곽병상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고 신뢰하는 한 여성인사를 신홍기에 데리고 들어와서, 상장회사의 경영에 관여하게 하고, 어느 정도 곽병강, 곽병련의 세력을 대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형제간 갈등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도화선이다.

 

곽병상의 이 홍안지기는 바로 당금형(唐錦馨)이다. 그녀는 대대로 공장을 운영하던 집안출신으로, 전자공장을 경영한 바 있다. 나중에는 투자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녀의 부친은 1970년대 홍콩의 기기대왕으로 불리웠다.

 

당금형은 곽병상보다 3살이 많다. 키도 크지 않고, 코도 크고 입도 크며, 피부도 비교적 검은 편이다. 용모는 보통이지만, 머리가 비상하여, 많은 재계의 사람들이 그녀를 쫓아다녔다. 홍콩매체에 다르면, 곽병상이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와 사귄 적이 있다. 부친 곽득승이 반대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더 깊이 사귀지 못하고, 각자 결혼하게 된다. 나중에 당금형은 결혼에 실패하고, 다시 곽병상과 관계가 밀접해진다. 납치사건이 발생한 후에 곽병상의 성격은 많이 바뀌게 된다. 말이 적어지고, 겁이 많아졌다. 자주 자신을 고립시켜서, 그의 처도 그와 얘기를 하기 힘들었다. 당금형은 그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주고, 유일하게 그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두 사람의 남다른 관계는 십여년간 지속되었다. 곽씨집안사람들은 모두 모른척 해주고 있다. 당금형도 행동을 적절하게 하여, 곽병상의 처가 나타나는 곳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당금형은 곽병상의 생활을 주도할 뿐아니라, 점차 그의 업무까지도 개입하기 시작한다. 신홍기지산에 들어간 후, 당금형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켰을 뿐아니라, 곽병상의 신홍기지산내에서의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광초경의 남동생을 포함한 신홍기지산의 원로들에게도 도전을 하게 된다. 이는 곽씨집안의 나머지 구성원 특히 곽병강의 불만과 우려를 자아내게 되다. 그리하여 광초경에게 이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광초경은 장남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여러버 권했지만, 곽병상은 말을 듣지 않았다.

 

여러가지 갈등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폭발한다.

 

2008 2 18, 홍콩거래소의 웹사이트에 돌연 공고가 하나 뜬다. 신홍기지산의 주석 겸 행정총재인 곽병상이 개인이유로 잠시 휴가를 떠나며, 휴가기간동안 행정총재의 직무와 직책을 일체 이행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직무와 직책은 회사부주석 겸 동사총경리인 곽병강과 곽병련이 분담할 것이라고 하였다.

 

원래, 당일 소집개최된 신홍기지산 동사회에서, 동생이 보낸 미국의사에 의하여 조울증으로 진단받은 곽병상은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압박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절충방안을 내놓게 되는데, 스스로 정직3개월을 하며, 의사로부터 자신의 건강상황을 진단받은 후, 동사회에서 다시 의학적 소견에 따라 언제 복직할지를 결정하자는 것이다.

 

휴가기간이 끝날 때쯤, 곽병상은 여러 홍콩전문가의 보고서를 가지고 와서, 자신이 조울증을 앓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여, 복직하려고 준비하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이미 다른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놓아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갈등은 더욱 커지고, 그를 파면시키려는 조치가 곽병강과 곽병련에 의하여 개시된다.

 

5 15, 신홍기지산은 다시 동사회를 개최하여, 곽병상의 주석 및 행정총재직 퇴임에 관한 의안을 토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회의개최예정시간 1시간전에 곽병상은 법정에 가처분을 신청한다. 목적은 회사의 전체이사(곽병상제외)들이 관련의안에 투표하는 것을 금지하고, 의안이 통과되더라도, 회사가 투표결과를 집행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쌍방의 진술을 충분히 들을 시간이 부족하였으므로, 법원은 임시가처분을 내리게 된다. 5 24, 홍콩고등법원은 신홍기지산의 주석 곽병상이 제출한 가처분 즉 그의 이사회주석 및 행정총재직을 면직하는 이사회개회를 금지하는 건에 관하여 개정하여 심리핫따. 홍콩고등법원 법관 관숙형은 약 1시간동안 쌍방의 진술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곽병상의 가처분기간연장신청을 기각시킨다.

 

3일후, 신홍기지산을 18년동안 장악해왔던 곽병상은 동사국의 주석 및 행정총재에서 면직되고, 비집행동사가 된다. 주석은 광초경이 맡고, 행정총재는 곽병강과 곽병련이 분담하게 된다.

 

그후, 글로벌금융위기가 발발한다. 신홍기지산의 가족내부투쟁은 점차 공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사건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2년후, 곽병상은 다시 가족신탁기금에서 쫓겨난다. 광초경이 이렇게까지 조치한 것은 장남이 여전히 당금형을 버리고 부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뿐아니라, 모친에게 당금형과의 관계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초경으로서는 이러한 조치를 취해두지 않으면, 장래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곽씨가족의 전체이익에 손실이 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 조치는 엄청난 금액의 이익이 관련되었으므로, 시장의 인사들은 곧 큰 싸움이 한번 벌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