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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중국에서는 “태도(態度)”가 중요하다.

by 중은우시 2010. 11. 9.

: 이중천(易中天)

 

위명륜(魏明倫)선생이 나에게 남충(南充)으로 가서 진수(陳壽)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한 사건은 기껏해야 하나의 자잘한 원안(寃案, 억울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선생이 <<성도일보>>의 왕가 기자에게 말할 때는 사죄라고 말한 적은 없고, 인사라고 말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죄와 인사는 천지차이이다. 매체가 어찌 이렇게 말을 뒤바꿔 놓을 수 있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은 <<화서도시보>>에서 위명륜이 당시에 그렇게 말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사건은 아직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니, 아직은 미결사건이라고 해두자.

 

나는 확실히 억울하다. 내가 언제 진수의 사상을 빌려쓰면서 그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작자도 명확히 언급하지 않은 적이 있단 말인가? <<품삼국>>을 보면 여러 군데, <<삼국지. 모모전>>이라고 밝혀서 독자들이 읽기를 귀찮아할 정도였는데. 위명륜의 남충강화 정신에 따르면, 나는 상을 받으러 가야지, 어찌 죄인이 되어서, 사죄를 하러 가야 한단 말인가?

 

당연히 조작해(趙作海)와 비교하자면 나는 억울한 축에도 못낀다. 그러나 아무리 작더라도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고수의 고견에 따르면 그래도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은 일을 크게 벌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글을 <<남방도시보>>처럼 영향력있는 데 발표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한가지 배웠다. 원래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런 말은 처음 듣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왕빈빈이 왕휘 선생이 표절했다는 의문을 제기했을 때, 바로 누군가 나서서 왕빈빈의 태도를 지적했다. 표절한 일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왕빈빈의 태도가 좋고 나쁘고와 왕휘가 표절을 했는지 안했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왕휘가 표절하지 않았다면, 왕빈빈의 태도가 아무리 좋아도 비방일 뿐이다. 왕휘가 표절했다면 왕빈빈의 태도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표절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간단한 이치이다. 학자들은 이를 모르고 있단 말인가?

 

당연히 모두 알고 있다. 단지, 일이 닥치면 잊어버리는 것뿐이다.

 

실제로 우리들의 사고방식 혹은 심리습관은 삼문삼불문(三問三不問)이다. , 일이 생기면, 시비(是非)를 묻지 않고 친소(親疏)를 먼저 묻는다. 도리(道理)를 묻지 않고 태도(態度)를 먼저 묻는다. 사실(事實)을 묻지 않고 동기(動機)를 먼저 묻는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자신의 형제나 자매라면 아무리 명확한 잘못을 저질러도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용감하게 일어나서 비판을 하면, 당동벌이(黨同伐異), 즉 모조리 들고 일어나 공격한다. 공격의 구실은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동기이다. 혹시 이걸 기화로 유명해지고 싶은 거냐? 등등. 그의 말이 사실인지, 합리적인지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이렇게 사실을 따지지 않고, 도리를 따지지 않고,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등효망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중국의 학술계에는 방파(幇派)만 보이고 학파(學派)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 서주(西周)때로부터 중국은 로 천하를 다스렸다. 필자는 이를 윤리치국이라고 부른다. 이는 먼저 친소를 따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한 사람이 괴로워하고, 원수가 좋아할 일(親者痛仇者快)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태도를 따진다. 군주, 윗사람, 부모, 스승에게 얘기할 때는 말하는데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 말에 토를 다는 것이 죄인데,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의견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도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잘 말해야 한다. 왜 토를 다는가. 설마 하극상을 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동기가 불순한 것이 된다. 최소한 어른도 몰라보는 자가 되어 버린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태도는 이처럼 중요하다. 그리하여 중국특색의 태도문화가 발달한다. 예를 들어, 윗사람이 결정하거나 지시하면, 옳건 그르건, 좋건 나쁘건, 할 수 있건 없건, 우선 먼저 옹호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 그 다음에 이를 하건 말건 어떻게 하건 중요하지 않다. 해내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능력문제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시 예를 들어, 억울하다고 하려면, 여기도 태도가 중요하다. 먼저 촌장을 찾아가서 만나서 얘기한다. 촌장이 너를 데리고 향장에게 간다. 다행히 현의 태수까지 만났다면 너는 무릎을 꿇고 소인은 억울하옵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직접 단계를 넘어서 상급기관을 찾아가는 것(上訪)은 잘못이다. 태도가 단정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태도가 나쁘면, 아예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도리에 맞더라도,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그걸로 끝이다.

 

태도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실, 도리, 시비 같은 것들은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위명륜이 말했다: 남풍의 문화브랜드가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지금의 일부 학자들이 잘못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충의 문화명사들을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도 아니고, 논리도 맞지 않는다. 학자의 영향력이 정말로 그렇게 크다면, 나는 한번이고 두번이고 세번이고 계속하여 삼국지와 진수를 얘기했다. 그런데도 전혀 작용을 발휘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같은 선생을 잡고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남충의 문화브랜드가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군기문제수빈(君其問諸水濱)하라.

 

다시 말해서, 태도라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가? 예를 들어, 늑대가 양을 먹으려고 하는데, 양의 태도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태도가 나빠도 잡아먹히고, 태도가 좋아도 잡아먹힌다. 당연히 구별은 있을 것이다. 양의 태도가 좋지 않으면, 더욱 당당하게 잡아먹을 것이다. 양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뿐아니라, 죽일 놈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태도가 좋으면 어떨까? 아무리 억울한 죽음이지만, 어쨌든 죽어서 귀신이 된다. 아마도 이럴 지는 모르겠다. 옥황상제가 성지를 내려서, 이 양은 태도가 좋았으니, 짐이 아주 기쁘다. 착한 양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착한 양 무리에 집어넣어라. 이상 이게 바로 귀신이 되어서도 행복하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