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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隋煬帝)는 왜 고구려정벌에 실패했는가?

by 중은우시 2008. 1. 18.

글: 월초(越楚)

 

수양제 양광(楊廣)은 황음무도하기는 했지만, 군대를 잘 다스렸고, 전투를 잘하는 인재였다. 수나라가 다시 남북을 통일할 때의 군사령관은 바로 겨우 20살의 양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수나라 대업8년부터 10년까지 양광은 세번이나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는데, 모두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이일은 수나라 대업3년(607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때 양광은 북으로 내몽고초원을 유람하러 떠난다. 그 도중에 고구려의 사신을 접견하는데, 양광은 고구려사신에게 이렇게 분부한다: "짐은 탁군(지금의 하북성 탁현)으로 순시를 갈테니, 고구려왕 고원(高元)으로 하여금 그 때 친히 탁군으로 와서 조견(朝見)하도록 하라" 그런데 생각도 못했는데, 고구려왕은 수나라황제의 체면을 전혀 살려주지 않았다. 양광이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호호탕당하게 탁군에 도착했는데, 고구려왕 고원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광은 대노했고, 그 자리에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고 결정했으며, 친정을 해서 간이 부은 고구려왕을 혼내주겠다고 벼뤘다.

 

황명이 내리자, 순식간에 전국의 수백만장정이 징집되거나 군에 들어가거나 요역에 불려왔다. 민간의 배, 차, 우, 마는 대량으로 징발되었다. 병사들은 탁군으로 모였고, 양초(糧草, 양식과 풀, 사람과 말등이 먹을 것)는 요서군에 쌓아두었다. 길가에는 병사를 운송하고 양초를 운송하는 백성들이 백만에 달하였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병사하거나 과로사한 사람들이 서로를 베고 누워있었고, 길가에는 시체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백성의 원성이 온 길을 가득 메웠다. 수양제는 다시 부자들에게 군마를 사서바쳐서 군대를 도우라고 조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매필의 말가격은 10만까지 올랐다. 동래해구에서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주야로 일을 하도록 하였다. 물속에 기포가 많아서, 허리아래에 벌레에 물려서 죽은 자가 10에 3,4명이 되었다. 군량미를 운송하기 위하여, 양광은 마부 60만을 징발했고, 두 사람이 3석의 쌀을 운송하게 했다. 3석의 쌀은 이 마부들이 가는 길에 배를 채우는데도 부족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쌀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할 수 없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대업8년 정월, 양광은 고구려정벌의 명령을 내린다. 매일 1군씩으로 보내는데 연속 40일동안 병사를 출발시켰다. 총병력은 113만3800명이었다. 부르기는 200만대군이었다. 운송하거나 물자조달하는 사람은 군대의 배나 되었다. 각로의 군마는 머리와 꼬리가 연결되었고, 북을 두드리고 뿔피리를 불면 서로 들렸으며, 천여리에 깃발이 이어졌다. 여기에 수양제는 여러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군사행동은 어떤 것이든 반드시 보고해라. 스스로 결정해서 처리하지 말라. 고구려가 항복을 청하면 모두 받아들이고 공격하지 말라"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방어군들은 계속하여 허위항복작전을 쓰면서 진공속도를 늦추게 하였다. 계속하여 수나라군대를 희롱했다. 그러나, 양광은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장난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여러번 수나라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성을 굳게 걸어잠그고 싸웠다. 수나라군대가 맹공을 하자, 요동성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수비군사들은 성을 지키기 힘들 것처럼 보이자, 바로 백기를 높이 들어 투항했다. 공성하는 장군들은 감히 나서서 투항을 받아주지도 못하고, 또한 감히 계속 공격해서 성을 함락시킬 수도 없었다. 그저 양광에게 급히 보고하여 결정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양광의 명을 받아서 군영으로 돌아오면, 고구려수비군은 이미 무너진 성벽의 수리를 완료하고 계속 저항했다. 이런 일이 두세번 반복되고, 계속 함락시키지 못했다.

 

우익위장군 내호아(來護兒)는 수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진입했다. 평양에서 60리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그리고 정예병사 4만을 뽑아서 직접 평양성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도 못하게 고구려군의 매복에 당해 살아돌아온 자가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35만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계속하여 고의패퇴, 허위투항등의 "유격전"을 벌였고, 수나라군대는 피로해졌다. 살수에서 고구려군이 사방팔방에서 포위공격하자 겨우 2700명이 살아돌아갔다. 수만에 달하는 군용물자는 모두 잃게 되었으니, 양광의 첫번째 정벌은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대업9년 정월, 양광의 제2차고구려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고구려는 작은 오랑캐이면서 감히 우리 수나라 상국(上國)을 능멸했다. 이제 짐은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기는 것도 해낼 수 있는데, 하물며 자잘한 오랑캐는 말할 게 무엇인까"라고 말하였다. 두번째 고구려정벌도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히고 게다가 후방에서 문제가 터졌다. 예부상서인 양현감의 반란과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나서 할 수 없이 양광은 병사를 되돌려야 했다.

 

다음 해 봄, 양광은 다시 전국의 군대를 모아서 백로로 나누어 제3차 고구려정벌에 나섰다. 내호아는 고구려군을 대파했고, 군대를 몰아 평양성을 핍박했다. 고구려와 고원은 두려움에 옛 수법을 다시 썼다. 사신을 보내어 양광에게 투항을 하겠다고 요청했고, 양현감의 반란때 공모했다가 고구려로 도망쳐온 곡사정(斛斯政)을 죄수수레에 태워서 수나라군대에 압송했다. 양광은 크게 기뻐해서, 전군에게 회군을 명했다.당시 내호아는 황명을 어기면서까지 일거에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원을 생포하고자 하였다. 그는 부하에게 "대군이 3번이나 출정해서 고구려를  평정하지도 못하고 돌아간다면 치욕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군은 확실히 전투력이 얼마남지 않은 상태였다. 수나라군은 일거에 고구려를 평정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황명은 어길 수가 없었다. 내호아는 자신의 부하장수들의 생명안전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회군하게 된다.

 

양광은 전쟁을 장난으로 여겼다. 세번이나 고구려를 친정하면서, 고구려를 철저히 정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산을 많이 탕진했다. 그리하여 백성의 원한을 샀고, 국내에서 농민반란이 벌떼처럼 일어나게 된다. 겨우 4년후에, 양광은 그의 수왕조와 함께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