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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남량(南梁): 모든 황제가 비명에 간 왕조

by 중은우시 2010. 5. 1.

글: 노위병(路衛兵)

 

역사상의 왕조를 들여다보면,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한 일면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탁월한 전투력을 지녔거나, 장막에 앉아 천리를 내다보는 문치도략을 지녔거나, 화려하고 부유한 태평성대의 번영을 누렸거나...이 모든 것들은 그 왕조의 휘황한 과거를 기억하게 해준다; 어느 왕조이건 모두 풀지 못한 고질과 질곡이 있었다. 특히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곤궁한 시절에, 생사의 기로에 서서 죽을 힘을 다해서 헤쳐나갔던 비극의 왕조들은 황제와 재상들이 얼마나 많은 무력함이 탄식을 내뱉었던가.

 

왕조의 운명은 모두 '흥성한 후에 쇠락하고' '먼저 억눌리고 나중에 흥하거나' 혹은 '중흥후에 몰락하는' 역사의 필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 흥성했던 왕조, 한때 위풍당당했던 제왕은 왕왕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비바람에 흔들리며 난세에 한쪽 귀퉁이땅을 차지하고 있던 단명왕조나 불안과 공포속에서 힘들게 버텨갔던 운나쁜 제왕은 왕왕 역사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여러 방면이다. 굴욕과 단명의 왕조황족은 겪었던 고난이 태평왕조보다 훨씬 많았다. 남북조시대의 남량왕조는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남량왕조는 역사의 긴 흐름에서 그다지 큰 파도를 일으킬 수 있지는 못하다. 남량왕조가 다른 왕조와 다른 점이라면, 아마도 두 가지 점일 것이다: 하나는 제왕들의 문학상의 조예나 공헌이다. 그들은 학문을 숭상했고, 후세인들에게 고귀한 정신적인 재부를 남겨주었다. 이는 영원히 칭송받을 만하다. 또 다른 하나는 역대제왕이 누구 하나 선종(善終)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한 왕조의 황제가 모조리 비정상사망했다는 기록으로 남는다. 역사를 살펴보고, 사서를 뒤적여보면, 이런 경우는 아주 특수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개국황제인 양무제 소연(蕭衍)은 산채로 굶어죽었고, 양말제 소방지(蕭方智)는 진패선(陳覇先)에게 피살당한다. 양나라의 모든 황제는 그들의 생명, 그들의 경력으로 단명왕조의 풍우창상을 기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간단히 통계를 내보자. 남량은 모두 55년간 존속했고, 앞뒤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 8명이다. 그중 산채로 굶어죽은 황제가 1명(소연). 질식사당한 황제가 1명(소역), 괴뢰황제로 있다가 피살된 황제가 두 명(소강, 소방지), 내부권력투쟁에서 피살된 황제가 두 명(소동, 소기), 북조에서 내세운 괴뢰황제로서 나중에 괴롭힘을 당한 끝에 죽은 자가 2명(소연명, 소찰). 역사는 놀랄정도로 비슷하다. 개국황제인 소연은 원래 남제(南齊)의 권신이었다.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卷)을 죽인 후에 대권을 장악하고, 괴뢰황제 소보융(蕭寶融)을 내세운다. 그후에 소보융을 핍박하여 황제위를 선양하게 하여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남량이라 한다. 그후에 소보융을 죽인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반세기후에, 똑같은 비극, 똑같은 상황이 소씨왕족내에서 다시 한번 벌어질 줄은. 진패선이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남량의 대권을 빼앗아가고, 괴뢰황제 소방지를 죽이고 남량을 없애고, 남조 진(陳)나라를 세운다. 

 

남량의 멸망은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개국황제 소연은 집권초기에는 업적이 상당히 많았다. 역사에는 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려서 주공과 공자를 배웠고, 약관에 육경을 모조리 익혔다" 서법과 시사에 능한 학자형의 제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무를 열심히 봤고, 간언을 잘 받아들였으며, 근검절약하였다. 남량의 초기번영에 기초를 닦는다. 그러나, 후기의 소연은 달랐다.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서 거의 미치광이수준이 되었다. 그는 일찌기 4번이나 출가하고, 4번이나 사신(舍身)하여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낭비했다. 너무 지나치게 되다보니 조정의 기풍이 쇠하고, 국방이 느슨해지고, 결국 전쟁의 화를 불러온다. 우연한 요소를 얘기하자면 가소롭다. 남량은 비록 강남의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소연은 그래도 언젠가 중원을 차지하고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남사>>의 기록에 따르면, 소연히 한번은 꿈을 꾸는데, 꿈에서 북조의 관병이 성을 바치며 투항하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바로 이때 동위의 장수 후경이 동위를 배신하고 양나라에 투항하러 왔다. 소연은 이를 하늘의 뜻이며, 아주 길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후경을 하남왕에 봉한다. 그런데, 이는 늑대를 집안으로 들인 꼴이었다. 왕조멸망의 화근이 이때 심어진다. 4년에 걸친 후경의 난으로 국가는 유린당하고, 남량은 이때부터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일찌기 일세를 풍미했던 소연은 후경에 의하여 구금된 후 산채로 굶어죽는다.

 

소연이 죽은 후, 후경은 소연의 셋째아들 소강(蕭綱)을 괴뢰황제로 세운다. 그가 간문제(簡文帝)이다. 후경의 난이 아니었더라면, 소강은 아마도 좋은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남사>>의 기록에 따르면, 소강은 "나이 열한살때부터" 정무를 보았는데, 정치적인 재능이 있었고, 시문에 뛰어났다. 7살때부터 시를 지었으며, 스스로 일파를 이루었다. "궁체(宮體)"라고 하였다. <<양서>>에는 그에 대하여, "천재종일, 관어금고(天才縱逸, 冠於今古)"라고 평했다. 소강이 괴뢰황제가 된지 2년만에 후경에게 연금되어 피살당한다. 죽은 방법은 아주 황당했다. "술에 취해서 잠들게 하고.....준이 흙주머니에 넣은 다음에, 왕수찬이 그 위에 걸터앉았다." 결국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흙주머니에 넣어져서 산채로 질식사한 것이다.

 

후경에 세운 두번째 괴뢰황제는 예장왕 소동(蕭棟, 소연의 증손자)이었다. 후경의 최종목표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소동도 3개월만에 쫓겨난다. 다행스러운 것은 후경이 이번에는 그를 죽이지 않았고, 그저 그를 회양왕으로 격을 낮춘 다음 연금시켰다. 형주자사 소역(蕭繹, 소연의 7째아들)이 후경을 죽이고, 4년에 걸친 후경의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소역은 스스로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양원제(梁元帝)이다. 후환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는 소동에게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한 후에, 그를 장강에 던져 익사시킨다. 소역이 후경을 평정할 때, 익수자사로 있던 소기(蕭紀, 소연의 8째아들)는 그 기회를 노려 성도에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대군을 이끌고 동진하여, 어부지리를 노린다. 그런데 결국 소역에게 패배하여, 소기 본인은 소역 부장의 칼에 죽는다.

 

소역도 보기 드문 천재였다. 그는 5세때, '곡례를 암송할 수 있었고' 어른이 된 후에는 모든 책을 읽었고, 글을 쓰면 바로 문장이 되었다. 조정에서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연도 그를 아주 아꼈다. 소역이 어려서 안질을 앓았는데, 치료를 하지 못하여, 눈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소연은 이로 인하여 소역을 더욱 아낀다. 그리고 소역은 성격이 성색을 좋아하지 않아 고상한 것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는 분명히 좋은 황제가 될 재목이다. 그런데, 시운을 잘못만났다. 남량은 시운이 다했고, 그가 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소역은 심지어 황제의 자리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의 조카이자 옹주자사인 소찰(蕭詧)이 반란을 일으킨다. 서위와 연합하여 강릉을 공격했다. 소역은 투항한 다음 소찰에 의하여 흙주머니에 넣어져서 질식사당한다.

 

소역이 죽은 후, 양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고, 한 왕조에 3명의 황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서위(西魏)가 내세운 소찰이다. 그는 실제로는 서위정권에 스스로 신하를 자처했고, 서위를 정통왕조로 모시고, 강릉일대의 할거정권이었다. 후세에 후량(後梁)이라 부른다. 소찰은 비록 황제에 올랐지만, 그가 얻은 봉지는 너무나 좁았다. 게다가 관할지역에도 화란이 많았고, 무슨 일을 하든 서위의 눈치를 봐야 했다. 소찰은 우울해하였고,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결국 우울함과 분노가 병이 되어 등에 난 종창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북제(北齊)가 내세운 정양후 소연명(蕭淵明, 소연의 조카)이다. 소연명은 후경의 난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후경이 동위를 배신하고 투항할 때, 소연은 소연명을 보내어 맞이하게 한다. 그런데 그는 동위와 전쟁중에 포로로 잡힌다. 소연은 다시 후경을 주고 소연명을 찾아오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후경이 분노한다. 그리고 이어서 후경의 난이 일어나서 강남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후경의 난이 평정되자, 남량의 황실은 비었고, 국력은 피폐했다. 이때 동위를 대체한 북제는 이 기회를 틈타서 소연명을 무대위로 밀어올린다. 소역이 피살된 후 북제의 황제 고양(高洋)은 소연명을 호송하여 귀국시킨다음 황제를 칭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북제가 남량을 통제하고, 남량을 북제의 부속국이 되도록 하려 한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남량의 태위 왕승변과 사공 진패선이 옹립한 진안왕 소방지(소역의 아들)이다. 북제의 대군이 남하하자, 남량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소연명이 즉위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소방지를 쫓아낸다. 소연명도 반년이 되지 않아, 진패선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진패선은 소연명을 사도, 건안공으로 격하시키고 북제로 되돌려보낸다. 소연명은 이번 사태로 홧병이 들어 북제로 돌아가는 도중에 등에 종기가 나서 죽어버린다. 진패선은 먼저 소방지를 황제로 올린다. 그가 경제(敬帝)이다. 소방지는 3년간 괴뢰황제로 있는다. 대권은 모조리 진패선이 장악한다. 진패선은 557년에 소방지를 황제위에서 폐위시키고 강음왕으로 만든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여버린다. 이렇게 하여 남량은 망하고 진나라가 들어선다. 남량은 짧은 고난의 역정을 마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