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위병(路衛兵)
전진왕 부견의 유감은 비수지전(淝水之戰)에서의 패배만이 아니다. 더욱 큰 것은 아마도 내심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충성을 다하던 신하, 그가 진심으로 대해주던 친구가 속속 그를 떠나서, 그에게 반기를 들 둘은. 예전에 수족과 같았던 형제가 지금은 서로 대치하는 상대방이 되어버렸다. 이런 결과를 부견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을 것이다. 일세의 영웅인 부견이 결국 그가 가장 신뢰하던 부장 요장(姚萇)에게 죽임을 당한다. 분노 이외에 아마도 그 순간이 부견이 일생중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유감스러웠던 순간일 것이다.
부견(338-385)은 중국역사상 아주 전설적인 색채를 띈 제왕이며 아주 비극적인 색채를 띈 제왕이다. 그는 전반기에는 휘황했고, 후반기에는 처량했다. 그 격차가 너무나 컸다. 영웅의 위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큰 뜻을 다 펴지 못했다. 부견은 동으로 전연(前燕)을 멸망시키고, 서로는 전량(前凉)을 합병했으며, 북으로 대국(代國)을 집어삼키고, 구지(仇池)를 평정하고, 익주(益州)를 차지했다. 오호시대 북방의 유일한 통일이었다. 이 점만으로도 부견은 부끄럽지 않은 신무(神武)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비수지전에서 동진에 패배한 이후의 전진은 시한폭탄이 장치된 빌딩과 같았다. 즉시 사분오열하여, 부견이 힘들여 모아놓은 사방의 무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일찌기 위세가 대단했던 왕국이 이 지경이 되다니, 유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전쟁터에서의 패배는 전진의 멸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동진의 일격은 전진을 철저히 무너뜨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담장이 무너지니 모두 밀고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바로 제국이 멸망한 최종원인이다.
부견은 아주 특수한 제왕이다. 왜 특수하냐면, 그가 오호의 난세에 철혈로 천하를 정벌하면서도 여전히 "위정지체, 덕화위선(爲政之體, 德化爲先, 정치를 함에 있어서 덕으로 다스리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의 치국이념을 견지하고, 현저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상의 경지가 이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소수민족제왕에게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부견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행동거지거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시서를 많이 읽어, 유가의 풍모가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仁)으로 정치를 하고,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린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유학을 공부하고,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부견이 견지한 정치이념이었다. 부견의 휘황은 그의 전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호시기에 보기 드문 나라의 번영을 이룬다. '관중, 농서는 편안했다. 백성은 풍족했다. 장안에서 여러 주에 이르는 길에는 홰나무를 심어서 이십리에 1정(亭), 사십리에 1역(驛)이 있었고, 여행자들이 도중에 숙식을 했고, 공상무역을 하는 자들이 길에서 장사를 했다.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하기는 어렵다. 황제는 위엄을 중시한다. 다른 사람보다 한단계 높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준다면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간언을 잘 받아들인 당태종이 대단한 것이다. 부견도 간언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당태종보다 위면 위이지 아래는 아니다. 부견이 일련의 성과를 거둔 후에 잠시 느슨해졌다. 그리하여 업성의 서산에 사냥을 같다. 그런데 예인 왕락이 말을 가로막고 간언한다. 천자는 백성의 의식부도인데, 어찌 무절제하게 사냥을 하는가? 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변고는 예측할 수 없는데, 나중에 종묘사직은 어떻게 하려는가? 이 말을 듣고 부견은 다시 사냥을 가지 않았다. 비천한 예인의 말도 들었다. 이는 당태종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그 예인의 말은 이치에 맞았고, 부견의 마음을 울렸다. 그러나, 하는 말이 맞다고 하여 다 들어주는가? 일부 관리들을 보라, 비록 당신이 하는 말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반대로 말할 것이다. 왜 그런가? 이치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네가 그의 체면을 상하게 하고, 그의 위엄에 손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흉금이 넓은 사람만이 부견처럼 천하를 포용하는 큰 지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군대를 다스리는데 어짐(仁)은 그로 하여금 각 부족의 지지를 획득하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흉노의 좌현왕 유위진은 사신을 보내와서 투항하는데, 운중호군 가옹이 사람을 보내어 약탈했다. 부견은 가옹으로 하여금 '얻은 재물을 모조리 돌려주라'고 명령하였을 뿐아니라, 그의 관직을 파직했다. '작은 이익때문에 큰 신의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위진이 성심성의껏 귀순했을 뿐아니라, 오환, 선비의 일부 부락들도 그 소식을 듣고 속속 투항해왔다. 이처럼 그의 어진 정치는 백성의 지지를 얻는다. 부견은 민생을 중시했다. 한번은 국내에 가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해졌고,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졌다. 부견은 한편으로 궁중의 비용을 줄이고, 관리의 급여를 낮추었다. 그리고 사방을 순찰하게 하여 나이가 많거나 과부이거나 고아등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부견의 가장 뛰어난 점은 정치에서의 어짐이었다. 이는 그의 정권을 공고하게 해주었다. 모용수(慕容垂)가 투항해왔을 때, 왕맹(王猛)은 '교룡맹수는 길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늑대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니,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한다. 부견은 '우리나라는 영웅호걸을 의리로 대하는데, 지금 그를 해친다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모용수를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후 부견은 모용씨의 황족고관들을 모두 잘 대우해준다. 강(羌)족의 추장인 요장에 대하여는 부견이 더욱 높이 대접했다. 황제가 되기 전에 부견은 용양장군이라는 직위에 있었다. 황제가 된 후에 '용양장군이라는 칭호를 다른 사람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칭호를 바로 요장에게 허용한다. 나중의 결과가 어찌되었건간에, 길들이기 힘든 오호세력을 모조리 전진에서 일하게 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그의 천하를 포용하고, 안목을 멀리 두는 제왕의 풍모는 존경할 만하다. 사실상 부견의 어짐은 모용수와 요장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확실히 제국의 흥성에 불후의 공훈을 세운다. 유감스러운 것은 부견의 어짐은 최종적으로 그의 머리를 날리게 만들었다. 모용수와 요장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부견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부견의 인정(仁政)은 잘못이 아니다. 인정은 부견이 성공한 관건이었다. 오호시대의 제왕은 대부분 무력으로 정복했고, 살인으로 살인을 막았다. 그 결과는 바로 반항이었다. 멀리까지는 얘기할 것도 없이, 부견의 전임왕인 부생(苻生)은 잔혹하고 흉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다보니 인심이 흩어졌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부견의 인의에 감동받았다. 예를 들어 충성심이 대단했던 왕맹은 임종전에도 전진의 미래를 위하여 부견에게 이렇게 권한다: "진나라를 노리지 말라" "선비(모용수), 서강(요장)은...결국 우환이 될 것이니,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좋다" 그의 말은 결국 들어맞았다. 멀리 서역을 원정하던 대장 여광(呂光)은 나중에 부견이 요장에게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고 슬피 울며 삼군에 상복을 입게 한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상복을 삼개월간 입게 하고, 서인들에게 3일간 곡을 하게 한다" 거국적으로 이렇게 애도하는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사람은 초목이 아니니 누가 정이 없겠는가? 덕으로 다스리고, 정으로 감화사면, 당연히 효과가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인정은 폐단이 있다. 인정을 베풀려면 베푸는 대상이 덕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너의 인덕이 그들로 하여금 국가에 죽음으로 충성하겠다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함부로 차계생단(借鷄生蛋)의 핑계가 되도록 하여서는 안된다. 만일 모든 신하들이 왕맹, 여광처럼 충성스러웠다면 비록 비수에서 패배하였더라도, 전진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이렇게 잔혹하다. 감정을 형량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도덕은 원래 정치가가 지켜야하는 행위준칙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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