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염(趙炎)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대왕조는 모두 사서를 쓰는 관례가 있었다. 조정에는 전문적인 부서를 두어 사관을 임명하여, 전왕조의 역사를 편찬하고, 본왕조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기>>에는 제선왕과 사관이 싸우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사관은 제선왕의 황당한 짓들을 사실대로 기록했고, 제선왕은 사관을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사관은 뼈대있는 인물로 오히려 제선왕을 겁준다. 나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또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제선왕이 비록 멍청한 임금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식했다. 그리고 이 간이 큰 사관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상한 점은 당항족인 이원호는 1038년에 서하왕조를 건립하고, 북송, 요나라 및 이후의 몽골과 항쟁을 하여 근 200년간 존속한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분야에서 모두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자신의 독립한 사서가 없고, 그저 원나라가 편찬한 <<송사>>에 “하국전(夏國傳)”이라는 분권(分卷)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하왕조가 역사기록을 게을리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후 왕조의 사관들이 중국서북지역에서 200년간 풍운을 질타했던 이 왕국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중국인의 역사서기록에 관한 특징, 몽골인들의 서하공격역사 및 서하왕조의 문화상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의문이 풀릴 지도 모르겠다.
중국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전승, 차감(借鑒)을 중시했다. 전승은 역사문화이고 교훈은 흥망성쇠의 교훈이다. 이를 통하여 본왕조의 통치에 활용하려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왕조 사관의 기록, 민간필기, 야사, 전문등등에 근거하여, 종합적으로 자르고 붙여서 만드는 것이다. 역대왕조의 사관들은 당국에서 임명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먹고 산다. 정의감과 책임감이 있는 사관들만이 ‘전승’에 착안한다. 해진(解縉)이 주편을 맡은 <<영락대전>>, 기효랑이 주편을 맡은 <<사고전서>>는 근현대의 적지 않은 학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이는 순 엉터리이다.
서하는 몽골인의 손에 망했다. 몽골의 승상 토토(脫脫)가 사서편찬업무를 주재하면서, 각각 <<요사>>, <<금사>> 및 <<송사>>를 남겼다. 오직 <<서하사>>만 쓰지 않았다. 그저 “하국전”을 남겼을 뿐이다. 이것은 몽골인들이 원한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중에는 민족감정도 있을 것이고, 역사적인 원인도 있을 것이다.
어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당항족은 선비족의 후예이고, 몽골족, 여진족, 거란족과 혹은 가깝고 혹은 먼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항족의 조상은 당나라초기의 탁발적(拓跋赤)으로 대월지와 한족의 혼혈이다. 이원호는 송인종에게 보내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신의 조상은 원래 제주(帝胄)출신으로, 동진의 말기에, 후위(後魏)의 기초를 닦았다” 이를 보면 당항족은 중국북방의 소수민족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서하가 강성할 때, 하투(河套)지역과 현재의 몽골, 신강지역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몽골족들이 핍박과 설움을 많이 받느다. 당시 몽골인들은 아주 원시적인 부락상태였고, 약소한 여진족들보다 못했다.
몽골의 철기가 천하를 종횡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가는 곳은 적들이 속속 무너졌다. 여진인들은 무기를 내놓았고, 송나라사람들도 항복했으며, 동으로는 동해에서 서로는 다뉴브강까지 적수가 없었다. 다만 서하의 수도 흥경부(지금의 은천시)를 공격할 때 당항족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징기스칸은 선후로 6번이나 공격하며, 참중한 대가를 치른다. 모두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1226년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은 더욱 치열했다. 징기스칸 자신도 화살을 맞고, 사망한다. 다음해 초봄에 서하국은 몽골에 멸망당한다.
이 무서운 적수에대하여 몽골인들은 잊기 어려운 참혹한 기억과 씻어버릴 수 없는 원한을 갖게 된다. “장생천”도 서하국이 일대천교 징기스칸을 죽인 죄악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위하여 역사서를 편찬해줄 리가 없다. 그저 서하왕국은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이 모호하게 기억하도록 놔둘 뿐이다.
몽골인들의 민족정서와 역사요소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서하국을 위하여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하왕조는 스스로 사서를 편찬하지 않았다. 보존한 자료가 아주 유한했다.
서하왕조의 문화특색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여러 번 막고굴을 수리하고, 불교문화를 선양했다. 서하문자도 만들었다. 유가문화를 번역하였다. 전왕조를 위하여 사서를 편찬할 계획도 없었다. 사실 서하국에도 전왕조의 역사는 있다. 예를 들어, 당중화원년(881년) 탁발사공이 하주(섬북지구의 횡산현)을 점거하고 하국공에 봉해진다. 봉건체제에 따라, 이는 사직공능을 지닌 국가였다. 그외에 오대십국시기에 탁발씨가 건립한 북위정권등도 있다. 이들 역사도 모두 서하왕조에서 편찬했어야 했다. 그래야 당항족의 역사문화를 전승하는 것이다. 다만 이원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하에는 2개의 문화기관을 설립하는데 번자원(蕃字院)과 한자원(漢字院)이다. 당시의 역사기록은 중시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요공능은 유교문화를 ‘번자’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송사. 하국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호는 스스로 번서를 만든다. 야리인영에게 이를 번역하게 하여 12권으로 만든다. 글자체는 네모나고 팔푼서와 유사했으며, 글자는 아주 복잡했다. 나라사람들에게 기록하는데 번서를 쓰게 한다.” 마지막으로 12권의 번서가 만들어졌다. 이는 모조리 유가경전이었다. 사서가 아니었다. 이를 보면 두 개의 문화기구는 사서를 편찬하기 위하여 둔 것이 아니므로, 구성원도 사관이 아니었고, 활자장인과 번역관들이었다.
몽골인들이 편찬한 “하국전”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모호’라는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선별한 자료는 대부분 송나라에서 남긴 서하국과의 교류문서, 당시인들의 필기이다. 여기서 시간을 추정하고, 사건경과를 추리하여 작성했다. 많은 부분은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정도이다. 다만 서하국의 망국과정은 아주 상세하다. 이것은 아마도 몽골인들이 친히 겪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이 왕조를 무너뜨렸으니까.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두 왕조에서는 더더구나 서하를 위하여 사서를 편찬하지 않았다. 명왕조는 한족의 정통국가이다. 주씨황제들의 눈에는 송나라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국을 100년이나 통치했던 몽골의 원나라에 대하여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입만 열면 오랑캐가 어쩌고…하였다. 그러니 서하를 위하여 사서를 편찬할 리가 없었다. 청나라왕조는 중원을 차지한 후, 주로 <<명사>>를 편찬하는데 집중했다. <<사고전서>>는 선택적인 문헌기록이지, 쓴 것이 아니었다. 서하왕조는 그저 영원히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 황사속에 숨어있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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