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악산인(五岳散人)
역사붐이 일어난지 여러해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대토론부터, 1990년대의 다원신문화를 거쳐, 새로운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이래, 역사는 오히려 회귀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전통문화의 회귀를 시작했다. 신세기가 시작될 때는 모두 지나간 시대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을 드러낸다. 이것이 문화인지 심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요 몇년동안 가장 인기있는 TV프로그램중 하나는 <<백가강단>>이다. 사실 우리가 그 프로그램의 도입부분과 내용을 보면, 아예 무슨 백가(百家)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가(史家)가 거기에서 공연하는 것일 뿐이다. 도입부분을 보면 인류의 지혜를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도 있다. 우리가 언제 누가 나와서 상대론을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말도 안되는 일이다. TV에서 대중을 향해서 강연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왕왕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문과학뿐이다. 사실 얘기하는 것은 학무도 아니다. 그냥 역사이야기이다. 이런 방법은 바로 고급 평서(評書)의 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정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의 관중은 마실 차가 없고 까먹을 호박씨가 없을 뿐이다.
최근에 고급평서로 유명한 원등비가 한가지 견해를 얘기했다. 우리가 한나라 당나라를 너무 떠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흥으로 얘기하자면 오히려 양송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뜻은 대략 이렇다. 양송을 더 많이 공부하고, 한당은 덜 얘기하자. 양송은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달했으며, 개인은 자유가 있고, 정치가 개명적이었다.
왕소파 선생이 자신의 잡문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식인들에게 어느 시대가 가장 살고싶으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송나라에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만일 역사의 각도에서 말한다면, 송태조 조광윤은 보기 드물게 뛰어난 무술을 지닌 인물이다. 무림에는 지금까지도 태조장권과 태조곤(太祖棍)이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런 무술가가 책을 읽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매번 출전할 때마다 수레 두 개에 책을 가득 싣고 나섰다. 중화민국시대의 모 군벌이 비행기로 첩을 전선으로 데려와서 시침시킨 것보다는 훨씬 높은 경지라고 할 것이다.
송나라의 황실은 공신과 지식인들에게 아주 관대하게 대하였는데, 사상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역대의 공신들은 결말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것을. 그러나 송나라때만은 달랐다. "배주석병권"의 일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이다. 전무후무하게 모든 공신이 일거에 물러났다. 다른 왕조에서라면 처형장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지식인들만 양송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백성들도 양송이 비교적 좋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맹아를 얘기하자면, 명나라는 사실 전혀 없었다. 양송때 제대로 된 것이 약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최초의 지폐가 송나라때 탄생한다. 바로 "교자(交子)"이다. 화폐라는 것은 원래 금속으로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무게와 크기로 이하여 상품유통이 순조롭지 못했다. 아쉬운 것은 이것이 계속하여 전승되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가지 학술적인 견해에 이런 것이 있다. 자본주의의 가장 현저한 특징중 하나는 상업의 확장성과 민간의 자발성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상, 송나라때만이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송나라가 '화폐"를 만들어 백성들이 가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유목민족에게 망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경제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견해이다. 당시 송나라의 세폐가 국가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적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 청나라 말기에 그렇게 거액의 대외배상금을 지급하였지만, 그래도 국고에는 남은 돈이 있었다. 민간에는 더 많은 자산이 있었다. 그리고 송나라는 보기 드물게 황제가 민간의 재물축적을 억제하지 않은 때이다. 오히려 부를 민간에 축적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은 "큰 강에 물이 있어야, 작은 시내에 물이 가득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다. "큰 강은 작은 시내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민간의 작은 시내에 물이 가득해야, 큰 강에도 파도가 이는 것이다.
송나라를 좋게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말만 꺼내면 한당의 휘황함을 얘기한다. 그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당시 백성들이 행복하였는지여부는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이나 현재의 생각일 뿐이다. 멀리 바라보는 것이 좋다. 정치, 군사, 강역등의 변천은. 거리가 아름다움을 만든다. 거리는 일반생활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하게 보이는 한당을 바라보고, 약해보이는 송나라는 무시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송나라의 역사적 지위를 고증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사회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중국의 굴기는 이미 다툼없는 사실이다. 현재의 세계는 말탄 민족이 마음대로 횡행하던 시기도 아니다. 전투력이 어떻고, 국경확장이 어떻고는 외교수단이다. 사람들은 원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비로소 그것이 국가를 건립한 본뜻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연히 우리는 이 역사붐의 시대에 송나라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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