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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때는 황제의 권한을 어떻게 제약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4. 4.

글: 오구(吳鉤)

 

선진(先秦, 진나라이전)의 유가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에 반대했다. 공자는 "올바른 도(道)로 군주를 모신다. 그럴 수 없으면 그만두고 물러난다(以道事君, 不可則止)"라고 말했고, 맹자는 "군주에게 큰 잘못이 있으면 간해야 하고, 반복해서 간해도 듣지 않으면 왕위를 바꾸어야 한다(君有大過則諫, 反復之而不聽, 則易位)"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주나라의 사직을 멸하고, 해내를 병합하고, 제후를 병합하였으며, 남면칭제(南面稱帝)"한 진왕조는 고도로 권력이 집중된 법가의 제도를 운용한다. 법가는 황위를 "천하를 독단적으로 다스리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獨制於天下而無所制)" 것이다. 이런 '독단', '독제(獨制)', '독천(獨擅:)'의 권력관은 국가지배구조에서도 반영된다. 즉,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황상이 결정한다(天下之事無大小, 皆決於上)", "승상과 여러 대신은 모든 위임받은 일을 처리할 때 황상의 뜻에 따라 처리한다(丞相諸大臣皆受成事, 倚辦於上)". 그 의미는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황제의 한마디로 결정되고, 대신들은 그저 황권을 집행하는 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나라법제는 또한 "모든 일은 법에 따라 결정한다(事皆決於法)"는 것을 주장하여, 사람들에게 '법치(Rule of Law)'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진나라의 '법치'는 Rule by Law에 더욱 가깝다. "군주는 법의 위에 있다(人主爲法於上)"(상앙의 말). 즉 황제는 절대권위를 가진 입법자이고, 신하와 백성은 군주의 법에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개결어법'은 실제로 '개결어상(皆決於上)'과 같은 뜻이다. 

 

송나라때는 상대적으로 '법치'정신에 더욱 가까운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법치의 정수는 "사개결어법'이다. 지고무상의 황권도 예법의 구속을 받게 하는 것이다. 송나라는 바로 군왕도 예법으 엄격한 구속을 받은 왕조였다. 

 

송나라황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구속은 먼저 송나라유생들의 "공천하(共天下)" 정치이념이었다. 유불(劉黻)이라는 송나라때의 어사(御史)가 한 말을 보자: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해야 한다. 군주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天下事當天下共之, 非人主所可得私也)" 가천하(家天下)의 시대에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대역무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하위공(天下爲公)', '공치천하(共治天下)'는 송나라때 사대부의 컨센서스였다. 황제도 공공연히 부인하지는 못했다. 남송초기, 방정실(方廷實)이라는 어사도 송고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하는 중국의 천하입니다. 조종의 천하입니다. 군신, 백성, 삼군의 천하입니다. 폐하의 천하가 아닙니다." 남송의 재상인 두범(杜範)도 이런 말을 한다: "천하로써 천하를 삼고, 개인으로써 천하를 삼지 않는 것이 만세를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다(是以天下爲天下, 不以一己爲天下, 雖萬世不易可也)". 황제가 모든 권력을 독단하는 것은 송나라유학자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송효종은 "모든 일을 황상이 결정하고, 집정은 그저 황상의 뜻을 받들어 집행할 뿐이어서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돌아보았다." 이학자인 서의가 상소를 올려 간한다: "만일 군주가 성인이면 신하는 멍청이다. 폐하는 누구와 공명을 함께하시겠습니까?"

 

'공천하' '공치'의 정치이념이 송나라유학자들에게 활발하였기 때문에, 북송의 이학자인 정이는 대담하게 황상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천하를 잘 다스리고 못다스리고는 재상에게 달려 있으니, 군주의 덕으로 성취를 경연에서 꾸짖으십시오(天下治亂系宰相, 君德成就責經筵)". 소위 '천하치란계재상'은 정치체제에서 '정치는 중서성에서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시정의 흐름은 재상 두범이 분명하게 말했다: "무릇 폐하고 설치하고 부여하고 빼앗는 것은 모두 재상이 충분히 논의를 거친 후 가부를 정한다. 그 후에 시행한다. 만일 부당한 점이 있으면, 급(급사중), 사(중서사인)이 반박할 수 있고, 대(어사), 간(간관)이 상소를 올릴 수 있다." 송나라의 유학자들은 "권력은 군주에게 귀속되고, 정치는 중서성에서 나오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좋은 국가지배구조는 군주는 상징적인 주권을 가지고, 재상이 국정을 장악하는 것이다. 허군실상(虛君實相)이다.

 

공치천하의 의식을 가진 송나라유학자들은 사대부의 결당의식이 명백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정치용어중에 '붕당(朋黨)'이라는 단어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였다. '붕비위간(朋比爲奸, 서로 결탁하여 나쁜 짓을 벌이다)'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였다. 송나라때의 사대부들은 붕당의 정치적인 의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범중엄, 사마광, 구양수, 소식등은 모두 일찌기 글을 쓰거나 황제의 물음에 답하면서 '붕당'을 긍정적으로 설명했다. 송나라유학자들은 드러내놓고 '오당(吾黨, 우리 당)'이라고 말했다. 송나라유학자들은 붕당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공치천하에 대하여도 새롭게 인식한다. 구양수는 <붕당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로 칭찬하고 서로 추천양보하며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는 순임금의 22명의 신하만한 경우가 없습니다. 순도 의심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썼습니다. 그 후에 후세인들은 순임금이 22명의 붕당에 속았다고 하지 않고, 순임금을 총명한 성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배후의 국가지배구조논리는 바로 유학자들이 말한 순임금은 "천하를 가졌으나 그에 관여하지 않고(有天下也, 而不與焉)". "관직을 두어 현명한 자를 앉히고, 관직은 오로지 능력으로 뽑았다"는 것이다. 순임금이 성명(聖明)한 점은 여기에서 나타난다. 이런 '붕당론'과 붕당의 존재는 당연히 군주독재에 불리하다. 전제군주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후세의 옹정제는 특별히 어제 <붕당론>을 써서, 구양수의 '이설'을 반박한다. 그리고 살기등등하게 말한다. "구양수가 오늘날 살아서 이런 말을 했다면, 짐은 반드시 그를 혹세무민의 죄로 내쫓았을 것이다."

 

다행히 송나라때 군주는 강렬한 독재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혹은 그들이 독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더라도, 송나라유학자들에게 제지당했을 것이다. 비록 이론적으로 송나라황제는 최종 의사결정권을 지니고 있었고, 직접 성지를 반포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권력운영과정에서는 송나라때 이미 황제의 조서는 '이부(二府)'를 거치지 않으면 시행되지 않는다'는 관례를 만들었다. '이부'는 정사당(政事堂)과 추밀원(樞密院)으로 재상기구이다. '봉각난대(鳳閣鸞臺, 재상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조령(詔令)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의미는 황제가 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명령을 내리더라도 그것은 비합법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합법적인 '조령'은 신하들이 집행하지 않을 수 있다. 송도종은 '금일내비, 명일내비(今日內批, 明日內批)'하여, 자주 재상기구를 거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권력은 황제에게 있으나 정치는 중서성이 한다'는 관례를 파괴하게 된다. 그러자 어사 유불이 상소를 올려서 황상에게 직접적으로 말한다: "정령은 반드시 중서성의 논의를 거치고, 문하성의 논박을 받은 다음에 상서성에 보내어 시행해야 합니다. 삼성을 거치지 않고 시행된 것은 '사봉묵칙(斜封墨勅)'이니 효력이 없습니다"

 

송나라때 관리들은 이렇게 말로만 할 뿐아니라, 자주 그렇게 했다. 예를 들어, 송인종때의 재상인 두연(杜衍)은 황제가 개인적으로 명을 내려 어떤 인사를 관직에 임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것들은 하나도 시행되지 않았다. "매번 10개가 될 때마다 직접 되돌려 주었다" 황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나를 많이 도와주는 구나'라고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유사한 사례는 송나라대 부지기수이다. 여기서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송인종은 황후의 오빠인 장요좌(張堯佐)를 선휘사(宣徽使)에 봉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논의하는데 통과되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송인종은 장황후의 베갯머리송사에 다시 이 의안을 제기한다. 조정에 나갈 때 장황후는 황상을 전각의 문까지 바래다 주고,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관가(황상을 가리키는 말), 오늘은 선휘사를 잊지 마세요." 황제가 대답한다. "알았다. 알았다." 과연 성지를 내려 장요좌를 선휘라로 봉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포증(包拯, 포청천으로 유명한 인물)이 나서서 극력 반대했다. 그의 말은 이 안건은 이미 오래 전에 부결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황상은 어찌 이전의 결정을 뒤집으려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말을 수백마디나 하고 침이 튀어서 황제의 얼굴에까지 묻을 정도였다. 결국 송인종은 명을 거두고 내정으로 돌아온다. 장황후가 와서 인사하자, 황제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원망하며 말했다: "너는 선휘사, 선휘사만 생각했지, 어찌 포증이 어사중승이라는 것은 몰랐느냐?"

 

남송때, 송효종은 바둑을 좋아했다. 내정에 조악(趙鄂)이라는 국수(國手)를 두었다. 한번은 조악이 총애를 믿고 황제에게 관직을 달라고 청하게 된다. 송효종이 말한다: "어지를 내리는 것은 관계없으나, 아마도 외정에서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 효종은 아마도 바둑친구의 청탁을 차마 그냥 거절하지는 못했는지, 조악에게 아이디어를 내준다: '경은 외정관리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는가?" 조악이 말한다: "갈중서는 신의 은인입니다. 제가 그를 찾아가서 말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조악은 갈중서를 찾아간다. 그러나 갈중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의 집안사람이니, 정분대로라면 네 뜻을 이뤄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종법도때문에 할 수가 없다. 기술자에게 관직을 하사한 사례가 없으니, 어지가 내려오더라도 분명히 회수될 것이다." 조악은 다시 송효종을 찾아가서 말한다. "신이 갈중서를 만나보았는데, 그는 죽어도 안된답니다." 송효종도 사사로이 그에게 관직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저 이 바둑친구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재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그들과는 얘길하지 마세요."

 

이치대로라면 장요좌는 황후의 오빠이고, 황제의 처남이다. 조악은 하루종일 황제와 바둑을 두어 효종과 관계가 좋았다. 그들이 관직을 얻는 것이 어려울 리 있겠는가? 그러나, 송나라때의 법도, 예제, 정치체제는 군주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했다. 황제도 공기(公器)를 사적으로 이용하려면 그다지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술한 '정치는 중서성으로'라는 공치체제와 정의(廷議)라는 권력운용매커니즘을 제외하고, 송나라때 군권의 제약하는 법도는 한번 살펴볼 만하다. 중요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서약(誓約)" <송사.조훈전> 및 남송필기에 따르면, 송태조는 서약을 하고 태묘에 넣어두었다. 이후 황제들은 "사대부 및 글을 올려 간언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자손중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그를 주살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송나라 개국황제가 하늘에 맹세한 것으로 이해한다. 조종의 법이 후대에 전해지므로 이는 송나라의 '대헌장'이다. 송나라제왕은 기본적으로 이 '대헌장'을 잘 준수했다. 소식의 한 마디 말로 이는 증명된다: "진,한 및 오대를 살펴보면, 간쟁하다가 죽은 자가 수백명이다. 그러나 건륭(송나라 첫번째 연호)이래로 말하는 자를 벌한 적이 없다."

 

둘째, "국시(國是)" 이는 군주와 사대부집단이 공동으로 제정한 '기본국책'이다. 선전의 초장왕은 일찌기, "상국 및 제후, 사대부들과 공동으로 '국시'를 정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송나라때의 '국시'도 이 전통을 따른 것으로, 남송초 재상 이강은 이렇게 말한다: "옛말에 '여러분들과 국시를 같이 정하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시가 정해지고, 그 후에 여러 조치를 두어서 차례로 집행하면 위로는 정책의 방침이 정해지고, 아래로는 방향에 의혹이 없어지니, 천하의 일을 처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국시가 일단 정해지면, 황제, 조정신하에 모두 구속력이 있었다. 황제가 단독으로 '국시'를 고치고자 해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셋째, "조관(條貫)", "조례(條例)". 즉 일반제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송태조가 하루는 훈롱(薰籠, 향로)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만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화를 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좌우가 말한다: "이 일은 먼저 상서성에 내리고, 상서성이 본부에 내리고, 본부가 본시에 내리고, 본시가 본국에 내리고, 다시 아뢰고 다시 명이 내려가야 합니다. 이 절차를 거쳐야 훈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며칠이 늦어진 것입니다." 송태조가 대노하여 말한다: "이렇게 번거로운 조관은 누가 만든 것이냐?" 좌우가 말한다: "재상에게 물어보십시오." 태조는 재상 조보를 불러서 물어본다: "내가 민간에 있을 때 수십전이면 훈롱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지금 천자가 되고 나니 수일이 지나도록 얻을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이냐." 조보는 답한다. "이 조관은 폐하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폐하의 자손을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후세군주들이 사치품을 제작하고자 하거나 돈을 쓰려고 할 때, 대간의 구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조관의 깊은 뜻입니다." 송태조는 화를 풀고 오히려 기뻐한다. "이 조관은 아주 묘하고나, 훈롱이 없는 것은 자잘한 일이다."

 

서약, 국시, 조관. 이것은 황권을 구속하는 입법이다. 최소한 황권을 제한하는 요소가 있다. 비록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나라이후에 보기 드문 것이다. 사실상, 송나라의 역대황제는 현명하건 우둔하건 모두 진시황, 한무제, 광무제 후세의 주원장부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처럼 권력을 독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체적으로 '법도를 지키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조정에 논의하게 하였다'(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