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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서하국(西夏國) 흑수성(黑水城): 전설의 보물이야기

by 중은우시 2010. 12. 28.

작자: 미상

 

 

 

내몽고의 민간에서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수백년전에 서하국의 군사요충지인 흑수성에는 하라장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하라바투르(몽골어, 그 의미는 흑장군임)인데, 하라바투르는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황제는 자신의 작은 딸을 흑장군에게 하둔(哈敦, 부인)으로 주었다.

 

나중에 흑장군의 세력이 커지고, 권세가 강해지자, 황권을 노려, 천하를 얻고자 한다. 이 음모를 공주가 눈치챈다. 그녀는 흑장군의 음모를 부황에게 보고한다. 황제는 화가 나서, 수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흑수성을 공격한다. 하라바투르의 목에는 엄청난 현상금을 내건다. 그러나, 대군이 흑수성을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흑장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흑수성을 겹겹이 둘러쌌다. 흑수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서하황제는 주술사를 부른다. 주술사는 흑수성은 땅이 높고 강이 낮아서, 성을 포위한 관병들이 성밖의 우물을 길어서 물이 없도록 하였는데도, 성내에는 기갈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분명히 암도로 물이 통한다는 것이니, 이 수로를 막아버리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서하의 사병들은 모래흙을 가지고 흑하의 상류에 거대한 둑을 만들어, 성으로 들어가는 수원을 차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안의 사병들은 저장해놓은 물이 떨어지자 기갈을 참을 수 없게 된다. 할 수 없이 성의 서북쪽에서 우물을 파서 물을 긷는다. 그런데 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흑장군은 성이 위기일발이고 패배는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알고는, 상대방과 최후의 결전을 결정한다. 전투전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창고 속에 보관하고 있던 80여수레의 황금과 다른 금액을 헤아리기 힘든 보물을 모조리 말라버린 우물 속에 집어넣고, 자기 손으로 자신의 처자식을 죽여버린다. 모든 처리를 마친 후에, 흑장군은 성의 서북쪽에서 성벽에 구멍을 낸 후에 병사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서 결전을 벌인다. 그는 앞장서서 적진영으로 뛰어들었고,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으나, 결국은 중과부적으로 전멸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흑장군도 자결한다.

 

지금 흑수정 유적지의 서북쪽 성벽에는 낙타 한마리가 들어갈만한 구멍이 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흑장군이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판 구멍이라고 한다. 흑수성내의 서북쪽에는 큰 구덩이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물이 나오지 않아서, 보물을 전부 파묻어버린 그 우물입구라고 한다. 현지인들이 바오거더보르거라고 부르는 모래언덕은 전설에 따르면 대군이 물을 막기 위해서 쌓은 둑이라고 한다.

 

서하황제의 군대는 흑수성을 함락시킨 후, 성을 모조리 파괴해버린다. 흑수성은 이때부터 폐허로 변한다. 그후, 인근의 성에 살던 한족과 현지의 몽골인들이 여러 번 흑수성으로 가서 보물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신비롭게 사라지곤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흑장군은 죽기 전에 치명적인 저주를 남겼다고 한다. 현지인들은 흑수성의 귀신과 저주를 두려워하여, 가급적이면 이 곳을 지나지 않으려고 한다. 이곳은 점차 폐허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죽음의 성이라고 부르게 된다.

 

흑수성 유적지는 내몽고자치주 어지나기 다라이부쿠진 동남쪽 약 35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나린강의 동쪽의 황량한 사막가운데에는 지금 당항인들이 명명한 성중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성이 있다. 당항인들은 흑수를 어지나(額濟納)’라고 불렀다. 흑수성은 바로 어지나성이다. 몽골어의 하라호트이다. 과거 이곳에서는 상당히 큰 수역이 있었다. 유명한 고거연해만 해도 726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흑수성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가운데 있었다. 1226 2월 흑수성은 치명적인 혈전을 겪었다. 지금도 흑수성에는 뼈가 곳곳에 보일 정도이다. 절반 정도는 사막에 묻혀 있다. , 당시 성을 도살한 흔적인 것이다. 멀리 흑수성의 높은 성벽을 바라보면, 세월의 침식을 겪었지만, 여전히 예전의 휘황을 엿볼 수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원나라때 축성한 것이다. 평면은 장방형이고, 동서로 434미터, 남북으로 384미터이며, 주위는 약 1600미터이다. 가장 높은 성벽은 10미터에 달한다. 동서의 두 곳에 성문이 있고, 옹성을 쌓아놓았다. 성벽의 서북쪽에는 높이 13미터의 복발식 탑이 하나 남아 있다. 성내의 관서, 저택, 창고, 불사, 민가와 거리유적지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성밖의 서남쪽에는 이슬람교 공북이 1개 서 있어, 길표지역할을 한다.

 

이 죽음처럼 적막한 인류의 유적은 사막에서 6세기나 잠자고 있었다. 1907, 러시아 지리학자이자 해군중령인 카츠로프는 죽음의 성 여행을 한다. 이는 그가 6번째로 중국땅을 밟은 것이었다. 원래 그는 이번 탐험의 목적지를 몽골, 청해 및 사천의 서부 및 북부지역으로 정했다. 그러나, 다음 해, 그가 몽골남부의 고비사막을 지날 때, 홀연히 14세기의 저명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전설상의 흑수성을 떠올린다. 그는 즉시 이 전설상의 죽음의 성을 찾아가기로 결정한다. 그가 순조롭게 흑수성으로 들어가서 고찰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흑수성의 관리인 다시를 찾는다. 그리고 다시에게 귀한 선물을 하고는, 다시의 도움하에, 카츠로프와 그의 4명의 고찰대원은 가볍게 입고 앞으로 나아간다. 아주 순조롭게 흑수성으로 들어가서, 발굴을 한다. 이 날이 1908 3 19일이었다.

 

그들은 성내에서 거리와 사찰 유적지에서 10상자의 견질불화, 화폐등 문화재를 파낸다. 이들 문화재는 성페테르부르크로 옮겨진다. 문화재중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와 조형이 독특한 불상이 있어 러시아지리학회는 즉시 결정한다: 카츠로프탐험대는 원래의 사천탐험계획을 포기하고, 즉시 흑수성으로 돌아가서, 일체의 대가를 무릅쓰고, 이곳에서 대규모의 발굴을 전개하라고.

 

하라호트에서 지낸 며칠 동안, 고찰대가 얻은 물건은 가지각색이었다. 서적도 있고, 편지도 있고, 금속화폐도 있고, 여성악세사리, 가구 및 일상생활용품도 있었다. 불상 및 기타 물품도 있어 그 수가 부지기수였다. 수량으로 보자면, 우리는 요 며칠간 가득 얻었다. 무거운 19개 우편상자의 물품은 나중에 러시아 황실지리학회와 러시아과학원으로 보냈다.” 카츠로프는 나는 내가 마침내 1호 폐허 속에서 불상을 발견하고는 전신에 놀라움을 가득찼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같은 해 5, 카츠로프는 다시 현지에서 일꾼을 고용해서, 흑수성에 대한 제2차 발굴을 시작한다. 이번은 대규모의 야만적인 발굴이었다. “죽음의 성은 부활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구가 부딛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공기중으로 먼지가 휘날렸다.” 이번 발굴시간은 4주간에 이르렀다. 그들이 성에서 서쪽으로 4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말라버린 강의 오른쪽 강안에 있는 큰 불탑을 열었을 때, 휘황한 역사박물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것은 복발탑식 건축이다. 안에는 많은 불교조각과 수백수천의 서적, 회화, 두루마리등이 있었다. 이들 보물들은 폐허에서도 여전히 찬란한 광채를 빛내고 있었다.

 

카츠로프는 이 위대한 탑을 발견한 후, 거의 보이는 탑은 모조리 팠다. 흑수성 주위에서 모두 30여개의 탑을 파낸다. 흑수성에 있는 80%의 탑이 이때 파괴된다. 9일동안 대거 발굴한 후, 그들은 고성의 모든 탑과 성을 파괴해버린다. 카츠로프는 파내간 문화재로 나중에 명성을 얻는다. 그는 초록 서적 2000여종을 파내 갔을 뿐아니라, 300장의 불화와 대량의 목제, 청동도금의 작은 불상도 가져간다.

 

카츠로프는 성페테르부르크에서 그가 중국 흑수성에서 가져온 문화재와 문물을 전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러시아의 저명한 한학자인 이봉각(伊鳳閣)은 문화재 더미 속에서 <<번한합시장중주(番漢合時掌中珠)>>라는 책을 발견하는데, 서하문과 한문을 대조한 사전이었다. 카츠로프가 두번 낙타등에 실어서 가져온 것은 중국중고시대 서하왕조 190년 역사였던 것이다. 1038년에 굴기한 소수민족왕국은 약소한 세력으로 북송, 요 및 북송, 금과 삼족정립을 실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 경제, 문화를 최고봉으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