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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를 망국으로 몰아간 극단정치

by 중은우시 2009. 11. 23.

글: 하인용(何仁勇)

 

송신종(宋神宗)이 죽을 때 나이가 겨우 38살이었다. 큰 뜻을 품고 있던 이 이상주의자는 평생 딱 1가지 일을 했다: 변법(變法)을 시행했다. 그리고 그는 딱 1가지 실수를 했다: 변법을 중지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민주체제를 추진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마이클 조단에게 축구를 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의 시대에 살았고,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수준에 맞추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송신종이 죽고, 엉망이 된 나라를 넘겨받은 것은 송철종(宋哲宗)이다. 송철종은 당시 겨우 9살이었다. 이 나이라면 모친의 가슴에 안겨 어리광이나 부리기 알맞은 나이이지, 용상에 앉아서 천하에 명령을 내리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러다보니, 한 여인이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일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있는데 바로 '수렴청정'이다. 이 여인이 바로 고태후(高太后)로 송신종의 모후이다.

 

송신종의 모친은 송신종이 걸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구체적인 방식은 바로 수구파인 원우당(元祐黨)의 사마광(司馬光)을 재상으로 임영한 것이다. 사마광은 분명하게 처리했다. 십여년간 은거해있던 그는 변태적일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바로 난도질을 했다. 왕안석이 9년동안 고생해서 만들어놓은 화원을 모조리 뒤집어 엎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국가와 백성에 모두 이로웠던 면역법(免役法)까지도 화를 입게 된다.

 

주희(朱熹, 주자)는 사마광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는 한가지만을 생각한다. 백성들에게 돈을 내게 하는 것은 모조리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사마광은 그러나 모르고 있었다. 사실 대다수의 백성들도 면역법에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소동파도 이 점을 알았다. 그리하여 사마광을 찾아가서 협의한다. 백성들에게 유리한 신법은 남겨두자고 한다. 소동파는 직선적인 사람이다. 그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차역, 면역은 모두 장단점이 있다." 사마광으로서는 불쾌한 일이었다. 스스로 그 자리를 피했다. 소동파는 다시 정사당(政事堂)까지 쫓아들어갔다. 이번에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 소동파는 자신의 주장을 한참 얘기한다. 사마광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정사당을 나오면서 소동파는 화가나서 소리질렀다: "사마고집불통. 사마고집불통."

 

신법을 모조리 폐지한 것을 제외하고도 고태후와 사마광은 신당을 모조리 권력핵심에서 쫓아낸다. 채확, 장순, 여가문, 등관, 이정등 변법의 '선봉장'들은 모조리 유배를 떠난다. 이미 신당의 내부갈등으로 쫓겨나 있던 여혜경 조차도 화를 면하지 못하고, 건주로 유배간다. 여혜경은 건주에 9년이나 머물렀다. 그동안 냉수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못했다. 병이 들까봐. 그러다보니 조정에 불만이 잔뜩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구당의 인사중 신당에 대하여 심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채확이 유배가면서, 유배도중에 <<하일유차개정>>이라는 십언절구를 썼는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조정에 이를 고발한다. 고태후는 내노하여, 대신을 소집하여 어떻게 채확을 징벌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문언박은 채확을 영남(嶺南)으로 보내버리자고 주장한다. 당시 우상 범순인은 이렇게 우려하는 말을 했다: 그 길은 정위가 유배를 간 이후로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 유배길이 한번 열리면, 언젠가 우리도 그 길을 걸어야 할 지 모른다.

 

영남과 해남은 당시에는 미개발지였다. 정치적수를 유배보내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었다.

 

차개정시안(車蓋亭詩案)은 오대시안(烏臺詩案)이후 연루된 사람이 가장 많고, 강도가 가장 강했던 문자옥사건이다. 원우당인은 고태후의 채확등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전체 신당집단에 뿌리째 뽑아버리는 식의 조치를 취했다. 고태후와 사마광의 계획하에, 송나라정치는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긴다: 전면적으로 긍정하거나, 아니면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아무런 절제가 없는 당파전쟁은 연약한 송나라를 괴롭혔고, 결국 정강지치를 불러오는 화근이 된다.

 

십년간 강동쪽이면, 십년간 강서쪽인 법이다. 겨우 10년후에, 세계는 다시 완전히 뒤바뀐다. 이는 뒤의 일이다. 여기서는 우선 송철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기로 하자.

 

송철종은 비록 어렸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의 부친인 송신종이 요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채확은 궁중내에서 여러번 환영식을 예행연습했다. 그는 궁금해하면서 물었다: "요나라 사신은 사람인가?"

 

채확은 웃으며 말했다: "그들도 당연히 사람입니다. 다만 그들은 거란사람입니다."

 

"그들이 사람이라면 우리가 무서워할 게 뭐 있는가?"

 

고태후는 사실 전통적인 미덕을 지닌 여성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후세인들에게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도 있다. 그녀의 남동생은 조정에서 하급관리를 지냈는데, 오랫동안 승진을 시켜주지 않았다. 송영종이 보다 못해서, 그를 발탁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고태후가 거절했다: "내 남동생이 조정에 관직을 맡은 것만으로, 이미 크나큰 은총이다. 어찌 전대의 일로 후손이 은혜를 받는 관례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송신종은 여러번 고씨집안에 저택을 지어주려고 제안한 바 있으나, 모두 고태후가 거절한다. 나중에 국가가 그녀에게 빈 땅을 주고,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집을 짓는다. 국가에는 한 푼도 부담시키지 않았다. 고태후의 유일한 결점은 권력에 미련이 많았다는 것이다. 송철종이 17살이 되어도, 고태후는 여전히 수렴청정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고태후가 수렴청정할 때, 군국대사는 그녀가 몇몇 대신들과 처리했다. 나이어린 송철종은 기본적으로 발언권이 없었다. 대신들은 송철종이 나이어리다고 하여, 모든 일을 고태후에게 보고했다. 조정에서 회의를 할 때에도 송철종의 용상과 고태후의 자리가 마주하고 있었는데, 대신들은 고태후를 향해서 보고하게 되니, 송철종에게는 엉덩이만 보일 뿐이었다. 송철종이 나중에 친정(親政)을 하고 나서 이 때의 일을 얘기하면서, 자신은 그저 대신들의 엉덩이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철종이 하루하루 나이들어감에 따라, 용상에 앉은 허수아비노릇만 하고싶어하지 않았다. 고태후의 커다란 그림자 아래에서, 그는 마음 속으로 고태후와 원우당에 대한 원한을 키워갔다. 소년 송철종에게 그다지 많은 수단은 없었다. 그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논의할 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행세를 하는 것이다. 한번은 고태후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말을 하지 않느냐. 그들이 조정의 일을 논의할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송철종은 차갑게 대답했다: "당신이 이미 다 처리했는데, 내가 할 말이 뭐가 있느냐?"

 

고태후는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소년황제의 반역심리를 민감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리하여 1093년 가을, 고태후의 병이 위중해지자, 여방, 범순인 등을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은 후에, 황제는 더 이상 너희를 중용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알아서, 자진해서 물러나라. 자리를 비워주고 황제에게 사람을 뽑도록 해라. 그래야 너희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송철종이 대권을 장악하자, 바로 부업을 계승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정치용어는 "소술(紹述)"이었는데, 그 뜻은 '선인의 방식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기존 방침대로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송철종에 있어서, '소술'은 바로 송신종의 뜻고 사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일찌기 고태후와 원우당에 쫓겨났던 변법파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첫번째로 조정에 돌아온 사람은 장순(章恂)이었다. 그는 재상에 임명된다. 장순은 재상의 직위를 받을 때 이렇게 말한다: '사마광의 간사한 무리를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의 업무스타일은 당동벌이(黨同伐異, 뜻이 같은 자는 뭉치고 뜻이 다른 자는 제거한다)였다. 당연히 원우당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보복이 가해진다. 그의 방식은 간단했다. 고태후등이 폐지한 신법을 하나하나 회복시키고, 고태후가 발탁한 원우당인을 모조리 쫓아낸다. 고태후가 쫓아낸 신당사람은 모조리 불러들인다. 만일 그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장부가 하나하나 들춰지고, 옛일들도 하나하나 재론된다.

 

원우연간에, 사마광등 대신이 주도하여, 송나라는 서북 미지등 4채(寨)를 서하에 넘겨주고 포기했다. 당시 원우당인들이 이 일을 처리하면서, 확실히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의 실력으로 봐서는, 송나라가 땅까지 포기하면서 평화협상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장순은 사마광, 문언박, 조설, 범순인등 11명의 대신에 모조리 '기군망상'의 죄명을 뒤집어 씌운다.

 

사마광은 이미 죽었는데, 어떡할 것인가? 그의 시호와 추증된 관직을 회수하였다. 송철종이 친히 사마광등에게 써준 비문도 부숴버린다. 그들의 후손들도 쫓겨나거나 유배를 간다. 장순은 '부관참시'까지 하고자 하나, 송철종은 그렇게 하는 것은 나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만두게 된다.

 

범순인이 옛날에 했던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아직 살아있던 원우당의 대신들은 거의 모두 영남으로 유배를 간다.

 

역사는 놀랄 정도로 유사하게 반복된다. 1100년, 송철종이 병사한다. 24살까지밖에 살지 못했던 젊은 황제는 아들을 두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그의 형제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정하게 된다. 송철종의 형제중 5명이 살아있었다. 단왕 조길(趙佶)은 송신종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후보자격이 미달한다고 볼 수 있지만, 향태후(向太后)와 장순등이 극력 지지하여, 조길은 송나라의 최고통치자에 오른다. 그가 바로 송휘종이다.

 

선례의 위력은 무궁하다. 향태후(向太后)도 수렴청정에 맛을 들였다.

 

향태후는 보수파이다. 그녀는 왕안석의 신당을 아주 싫어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수렴청정을 한 짧은 9개월동안, 송나라의 정치국면은 다시 한번 요동친다; 다시 원우당인을 기용하고, 변법파를 쫓아낸 것이다.

 

송휘종은 모두 알다시피, 송나라 역사상 유명한 '플레이보이'중 하나이다. 송태조의 흉회대지(胸懷大志), 송태종의 용맹정진(勇猛精進), 송인종의 관후인자(寬厚仁慈), 송신종의 여정도치(勵精圖治)는 송휘종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송휘종과 같이 방탕한 황제가 있으니, 조정은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채경을 우두머리로 하는 변법파는 기회를 보아 조정을 장악한다. 채경이 재상이 된 후에, 변법의 기치를 내걸고, 일부 정직한 관리들을 보수파이건 변법에 찬성하는 인물이건 가리지 않고 모조리 간당(奸黨)으로 몰아버린다. 그는 송휘종을 조종하여 단예문 앞에 당인비(黨人碑)를 세워서, 사마광, 문언박, 소식, 소철 등 120명의 이름을 새기게 한다. 살아서는 모조리 삭탈관직하고 유배시키며, 이미 죽었어도 관직은 박탈한다.

 

왕안석이 제정한 신법은 채경에 이르러서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된다. 면역법은 원래 백성의 노역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인데, 채경 일당은 세수를 오히려 증가시켰고, 인민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왕안석이 지하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다리를 붙잡고 탄식했을 것이다.

 

소동파, 범순인등의 명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 시기의 송나라조정은 이미 형편없이 지저분한 곳으로 변모한다. 군자들이 멀리하고, 소인들만 운집해 있었다. 그들에게 시비의 구분은 없었고, 그저 당파이익만 있었다. 수치의 마음은 없었고, 그저 탐욕의 마음만 있었다. 송신종의 시대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왕안석, 사마광, 소동파등은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서로 앉아서 도를 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이 시끄러운 장독안에는 살찐 벌레들만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송나라는 이렇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