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국선(楊國選)
북송 함평5년(1002년) 십월, 송진종 조항(趙恒)이 조서를 반포했다: 좌승상(左丞相) 향민중(向敏中)은 재상의 자리에서 파직하고 호부시랑으로 삼는다. 우승상(右丞相) 장제현(張齊賢)은 태상경(太常卿), 분사서경낙양(分司西京洛陽)으로 좌천한다. 조정의 대지진을 몰고온 연유를 따져보면 실로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이 당당한 좌우승상은 과부 한 명을 서로 취하겠다고 싸워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과부는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 설유길(薛惟吉)의 미망인인 시씨(柴氏)이다. 설유길의 부친은 송태조 시기의 재상인 설거정(薛居正)이다. 설거정은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24사중 <<구오대사>>의 편찬자이니, 재상이면서 재자(才子)라고 할 수 있다. 이 재자는 아주 사나운 부인을 두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을 뿐아니라, 그가 시비나 첩을 가까이 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설유길을 양자로 들이게 된다. 설거정은 설유길을 아주 사랑했다. 그리하여 설유길은 하루종일 문제아들과 어울려서 축구를 하고, 술마시고 놀기를 즐기는 불효자식이 되었다.
설거정이 죽은 후, 송태종이 친히 문상을 갔다가 따로 물어보았다: "불초자식은 잘 있는가? 지금은 버릇을 고쳤는가? 아마도 부친의 위업을 이어받지 못할 것같은데, 어찌하면 좋은가?" 설유길은 곁에서 두려움에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후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다. 아랫사람들에게도 잘 대해주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따. 결국 그가 죽은 후에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과부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시씨는 설유길의 후처이다. 나이가 젊어서 과부가 되었고, 자식도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설유길의 두 아들인 설안상, 설안민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개가를 하려고 했다. 시씨가 고른 사람은 당시 유명한 배불뚝이 재상 장제현이었다. 이 제상은 몸이 방대하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그는 시씨와 남몰래 혼약하기로 하고, 사람과 수레를 보내어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러자 설안상이 개봉부에 고발했다. 그는 계모가 조부, 부친 2대에 걸쳐 모은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 가려고 한다고 하였다. 개봉부는 사건에 관계된 사람이 재상이다보니, 감히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송진종에게 보고하게 된다. 송진종은 사건을 크게 벌이고 싶어하지 않아서, 관리를 보내어 조용히 시씨를 심문했다. 그런데, 시씨의 주장과 설안상의 고발장은 차이가 컸다. 부득이하게 송진종은 이 사건을 어사대에서 심리하도록 보낸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시씨가 나타나서는 등문고를 쳐서 오히려 거꾸로 고발을 했다. 또 다른 재상인 향민중이 설씨집안의 옛집을 헐값에 사들였고, 자기에게 구혼을 했는데, 응락하지 않았는데, 향민중은 수치가 분노로 바뀌어 설안상을 시켜 자신을 무고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전에 설안상 형제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송진종이 그들에게 조부와 부친의 재산을 팔아먹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 바 있었다. 향민중까지 연루되어버리니, 송진종은 그에게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향민중은 확실히 500만을 들여 설씨의 집을 사들인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최근에 상처(喪妻)를 했지만, 재혼할 생각은 없으며, 시씨에게 구혼한 적은 없다고 하였다. 향민중이 설씨의 집을 사들인 것은 황제의 조서를 어긴 것이기는 하지만, 송진종은 일을 적당히 마무리짓고 싶어했고, 끝까지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시씨는 끝까지 고집했다. 다시 북을 두드리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다시 이 사건은 어사대에서 심리하게 된다.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염철사 왕사종은 향민중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나서서 폭로했다. 향민중이 최근에 이미 고인이 된 부마도위 왕승연의 여동생을 취하는 일을 논의했다. "밀약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납채는 아직 하지 못했다" 송진종은 왕씨에게 물어보았고,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향민중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서 면전에서 그가 솔직하지 못하며, 몰래 재혼에 관한 일을 추진하고 있으면서, 황제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다고 얘기하였다고 힐난했다. 진종이 생각해보니, 향민중이 시씨에게 구혼하지 않았다는 말도 믿기 힘들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장제현도 자기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어사대에서 조사하다가 시씨의 고발장이 원래 장제현의 아들이자 당시 태자중사의 직위에 있던 장종회(張宗誨)가 그녀를 시켜서 쓰게 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장제현도 사건에서 무관할 수가 없었다. 다시 시씨의 심복인 종을 심문해보니, 그녀가 금은재화 약 3만민(緡)을 매장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래지 않아 송진종이 친히 심문하였다. 심문결과 다음과 같이 처분했다: 향민중은 재상에서 파면하고 호부시랑이 된다. 장제현은 태상경이 되어 서경으로 간다; 장종회는 해주별가로 강등된다; 설안상은 황제의 조서에 위반하여 주택을 팔았으므로 태형에 처하며, 팔아버린 집은 되사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어사대, 개봉부에 분부하여 수시로 감독하게 시켰다. 재상에 대한 처리의견은 송진종의 명의로 제서(制書)를 작성했는데, 제서를 작성하는 한림원학사 송백은 원래 향민중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 향민중에게 십정의 은자를 빌리고자 했는데, 향민중이 이를 거절했었다. 그리하여 송백은 제서를 초안하면서 글을 더욱 악독하게 썼다. 내용중에 "대짐식언, 위신자매(對朕食言, 爲臣自昧)"와 같은 말이 들어갔다. 향민중은 제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시씨는 마음먹은대로 장제현에게 시집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벌금으로 구리 8근을 내야 했고, 설씨주택을 재매입하는 돈은 그녀가 매장해둔 금은보화를 썼다. 결국 '남편도 잃고 돈도 잃은 격'이었다. 시씨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두 재상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그녀를 취하려고 서로 싸운 이유중 중요한 것은 그녀가 돈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학자인 정이는 전혀 봐주는 것없이 이렇게 말했다: 두 재상이 한 여인을 서로 취하려고 싸운 것은 그녀의 십만이나 되는 호주머니속의 재산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었을까? 희녕5년(1072년), 경사(변량, 지금의 개봉)의 토지(관개를 해서 개조한 좋은 밭)를 매각하는데 1등의 토지는 1무(200평)당 3관 내지 2관500문이었다; 개봉의 집임대료는 상당히 비싸서 외지보다 훨씬 많았는데, 천희5년 임대료는 1칸에 1일당 164문이었고, 월당 4관491문이었다. 이상의 토지가격과 주택임대가격을 참고해보면, 시씨가 매장한 2만관의 '비자금'은 6666무의 좋은 밭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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