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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曹操): 모택동이 가장 많이 언급한 중국고대인물

by 중은우시 2010. 4. 23.

글: 유계흥(劉繼興)

 

중국고대인물중 조조는 모택동이 가장 많이 언급한 인물이다. 모택동은 조조의 정치적 공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조조의 군사재능을 칭찬하였으며, 조조의 문장과 풍류를 좋아했다...동시에 조조에게도 결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필자가 통계를 낸 바에 의하면, 모택동이 조조에 대하여 각종 형식으로 언급한 것은 32번이나 된다.

 

모택동이 젊었을 때, 조조를 아주 존경했다. 그가 독서를 하면서 <<강당록>>에 이렇게 쓴 바가 있다: 재능이 지금 사람보다 낫지 않으면 재주(才)가 있다고 할 수가 없다. 학문이 옛 사람보다 낫지 않으면 학문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천하에 재주가 없으면서, 시대를 풍미하는 자는 적수가 아니다. 적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맹덕(조조), 중모(손권), 제갈(공명)뿐이다.

 

1918년 8월, 그는 하남성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장룡(羅章龍), 진소휴(陳紹休) 세 사람이 허창의 위나라 옛수도의 폐허를 보러 갔다. 거기서 조조를 조문하는데, 나장룡과 합작으로 <<과위도(過魏都)>>라는 시를 짓는다:

 

나장룡: 횡삭부시의비양(橫賦詩意飛揚)

모택동: 자명본지호문장(自明本志好文章)

모택동: 소조이대서전묘(蕭條異代西田墓)

나장룡: 동작황창낙석양(銅雀荒落夕陽)

 

위의 시에서 모택동은 조조에 대한 탄복의 뜻을 나타냈다. 조조는 모택동이 보기에 중국고대에 보기 드물게, 정치, 군사, 문학적 재능을 한 몸에 갖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경우에 조조를 언급했다. 역사서를 읽을 때도 여러번 조조를 평했고, 매우 높이 평가하곤 했다.

 

건국후에는 더더욱 여러번 조조를 언급한다.

 

1952년 11월 1일, 모택동은 하남 안양의 은허를 시찰한다. 그는 수행인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하는 조조가 수군을 훈련시킨 장소이다. 조조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이곳에서 대규모의 확장공사를 하였고, 이곳에 둔전제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의식이 풍족했고, 힘을 기를 수 있어, 나중에 북방을 통일하게 되고, 동진이 전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는다.

 

1954년 여름, 모택동은 북대하에서 조조의 <<관창해>>라는 시를 음송한 후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조조는 대단한 정치가, 군사가이다. 또한 대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조조는 북방을 통일한 후, 위나라를 창립하는데, 그때 황하유역은 중국의 중심지역이었다. 그는 동한의 여러가지 악습을 개혁하고, 호족을 견제하였으며, 생산을 발전시키고, 둔전제를 실행했다. 그리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촉진시켰으며, 법치를 추진했고, 근검절약을 제창했다. 이렇게 하여 파괴되었던 사회는 안정을 되찾고, 회복, 발전하게 된다. 이것들은 긍정적인 것들이 아닌가? 대단하지 않은가? 조조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책에 그렇게 쓰여 있고, 희극에서 그렇게 연기하고, 백성들이 그렇게 말한다. 이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억울한 건이다. 반동사족들이 봉건문화를 독점하면서, 그들이 쓴 것은 모두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1954년 여름, 그는 <<낭도사.북대하>>를 썼는데, 거기서 "왕사월천년(往事越千年), 위무휘편(魏武揮鞭), 동림갈석유유편(東臨碣石有遺篇), 소슬추풍금유시(蕭瑟秋風今有是), 환료인간(換了人間)"이라고 쓴다. 이것은 모택동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종합한 것이다. 단 몇 마디의 문구에 정치가, 군사가 및 시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잘 나타나 있다.

 

1954년 7월 23일,모택동은 딸 이민, 이눌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다: "북대하, 진황도 일대는 조맹덕(조조)가 와보았던 곳이다. 그는 정치가일 뿐아니라,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갈석시는 유명하다."

 

당시 모택동의 국제문제 비서를 맡고 있던 임극(林克)은 이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1957년 봄, 모택동이 북경을 떠나 천진, 제남, 서주, 남경, 상해등지를 시찰했다. 3월 20일 오후, 모택동은 비행기를 타고 남경에서 상해로 간다. 도중에 진강 상공을 지날 때, 모택동은 그 광경을 보고 시흥이 떠올라서, 신기질의 <<남향자.등경구북고정>>이라는 사를 썼다. 다 쓴 후에, 이 사의 내용을 둘러싸고, 모택동은 말을 많이 했다. "생자당여손중모(生子當如孫仲謀)"라는 구절을 얘기하면서, 모택동은 조조의 말을 인용했고, 곧이어, 모택동은 <<삼국연의>>의 조조의 자주논영웅(煮酒論英雄) 부분을 얘기했다. 조조는 '영웅이란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좋은 계책을 뱃속에 담고 있으며, 우주의 기운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천지의 지기를 삼키고 내뱉는 자이다.'라고 하고, 유비가 '누가 능히 그럴 수 있는가?'라고 물으니, 조조는 손으로 유비를 가리킨 후 스스로를 가리키며, "당금 천하에 영웅은 오로지 그대와 나 조조뿐이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모택동이 곧이어 말했다. 비록 유비가 조조보다 견식이 약간 떨어지기는 하지만, 유비는 사람을 아주 잘 쓰고, 단결을 잘 시키며, 대사를 잘 이끈다. 조조의 이 명언은 모택동의 머리 속에 깊이 낙인되어 있었다. 말년에 이르러, 그가 서법을 연습할 때, 자주 쓰곤 했다.

 

모택동은 조조를 폄하하는데 반대했다. 조조를 간신으로 보는 전통관념에는 불만이 컸다. 1957년 4월 10일, 모택동은 <<인민일보>> 책임자와 담화를 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고함을 변명해주었다: 역사상 조조를 간웅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설을 믿을 것은 못된다. 사실 조조는 나쁘지 않다. 당시 조조는 진보적인 측면을 대표했다. 한나라는 몰락한 것이다.

 

1957년 11월 2일, 모택동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날 밤에, 그는 호교목, 곽말약을 불러서 같이 거처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모택동이 먼저 <<삼국연의>>를 화두로 꺼낸다. 그들은 서로간에 아주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었다. 모택동은 돌언 통역 이월연에게 묻는다: "네가 말해봐라. 조조와 제갈량의 두 사람중에서 누가 더 대단한가?" 이월연은 졸지에 질문을 당해서 답을 못하고 쩔쩔 맸다. 모택동은 말했다: "제갈량은 용병에 과연 지모가 뛰어나다. 그러나 조조라는 사람도 간단하지는 않다. 창극에서는 그를 항상 간신배로 묘사하는데, 실은 억울하다. 이 자도 아주 대단하다."

 

1958년 8월 중순, 중공중앙은 북대하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한다. 모택동은 각대협작구주임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다. 그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노동자들과 함께 있으면 좋은 점이 있다. 우리의 감정에 변화가 일어나고, 수천 수만의 간부자제에게 영향을 준다. 조조는 한헌제를 이렇게 욕했다; '깊은 궁권레서 태어나서,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모택동은 이 이야기를 가지고 간부자제들이 군중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도록 했다. 아주 적절하게 비유한 것이다.

 

또 한번은, 모택동이 호북성위 비서장 매백과 간부자녀의 교육문제를 얘기한 바 있다. 모택동이 매백에게 물었다: "너는 조조가 한헌제를 평가한 말을 기억하느냐?" 매백이 답했다: "기억합니다. 이렇게 두 마디입니다. '깊은 궁궐의 속에서 태어나서,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모택동이 칭찬하며 말했다. "좋다. 너는 글을 제법 읽었구나. 현재 어떤 고급간부의 자녀들도 '한헌제'와 같다. '깊은 궁궐의 속에서 태어나서, 부인의 손에 자란다' 편하게 지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고생을 견디지 못한다.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약간은 '아두'와 같다. 중앙, 성급기관의 탁아소, 유아원, 부대의 팔일소학교에서 아이들이 비교하는 것은 무슨 자동차를 타고 왔는지, 부친이 무엇을 하는지, 누구의 관직이 더 높은지 이런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는 어릴 때부터 귀족 도련님을 기르는 것이 아니냐. 이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58년 11월, 모택동은 하남 안양현위서기를 접견할 때 조조를 얘기한다.: "조조는 용인지도를 알았다. 현명한 선비들을 받아들이고, '오호사해'를 모두 거두었으며, 파벌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강물을 준설하는데도 신경썼고, 물을 끌어들이는 관개사업에도 주의하여 농업을 발전시켰다."

 

1958년 11월에 개최된 정주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조조를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은 부정확하다. 며칠 후인 같은 달 20일, 모택동은 무한에서 개최된 좌담회에서 다시 조조를 언급한다. 그는 말했다. <<삼국연의>>와 <<삼국지>>의 조조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르다. <<삼국연의>>는 조조를 간신으로 묘사했다. <<삼국지>>는 조조를 역사상의 긍정적인 인물로 서술했다. 조조는 천하대란시기에 나타난 '비상지인(非常之人)', '초세지걸(超世之傑)'이다. 그러나 <<삼국연의>>가 통속적이면서 생동감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아주 많고, 거기에 옛날 희극에서는 모두 <<삼국연의>>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조조는 여전히 희극무대에서 간신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의 아녀자도 모두 아는 일이다. 조조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억울한 사건이고, 지금 우리는 조조를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우리 당은 진리를 추구하는 당이다. 잘못된 건, 억울한 건은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바로 잡아야 하고, 천년, 이천년이 지나도 바로 잡아야 한다.

 

사학계도 모택동의 말을 듣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곽말약, 전백찬등 역사학자들이 속속 글을 발표하였고, 1959년에 조조명예회복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1959년 8월 11일, 모택동은 여산회의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조조는 천년간 욕을 얻어먹었다. 이제는 명예를 회복해주어야 한다. 그 이후로, 조조는 역사상 명예를 회복하고, 경극무대에서의 조조도 눈썹에 붉은 점을 하나 더 붙여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게 되었다.

 

1958년 12월, 모택동은 <<삼국지집해>>중 노필의 <<양현자명본지령>>의 주석을 읽던 중에 노필이 조조를 질책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평을 내렸다: "이 주석글은 위무제(조조)를 적지 않이 모함하는 것이다. 죄를 덧붙이고자 한다면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이태백이 '위제영팔극, 의관일미형(魏帝營八極, 蟻觀一彌衡)'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에 가까운 뜻이다."

 

모택동은 <<위서.유표전>>을 읽을 때 조조에 관한 두 건의 비주(批注)를 달아놓은 바 있다.

 

<<위서.유표전>> 배송지의 주석에는 유표가 처음에 형주로 갔을 때, 강남에 유씨가족들이 병사를 모아서 모반을 일으켰는데, 유표가 '사람을 보내어 종족의 모반을 꾀한 자들을 유인하였고, 온 자가 55명이었는데, 모조리 참해버렸다(皆斬之).'는 내용이 있다. 모택동은 이 주를 읽고 '모조리 참해버렸다'는 방식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개참지'라는 글자의 옆에 굵게 표시를 한 다음에 이렇게 적었다: 항복한 장수를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맹덕(조조)이 하지 않는 일이다.

 

맹덕은 조조의 자이다. 유표가 포로를 대하는 방식이 조조와는 크게 달랐다. 조조가 전체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포로들에 대하여 너그럽게 대하였기 때문이다. 조조는 '투항한 자는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람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여기에 대하여는 사서에 많은 기록이 있다. 건안3년(198년), 조조는 연주에서 필담을 기용하는데, 나중에 장막이 반란을 일으키며, 필담의 모친, 남동생, 처를 끌고가버렸다. 조조는 그에게 말한다: "경의 노모가 저 곳에 있으니, 가도 좋다." 필담은 장막에게 간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장막을 평정한 후, 필담이 포로로 잡힌다. 모두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 걱정했다. 조조는 말한다: "무릇 부친에게 효도를 다 하는 자가 어찌 군주에게 불충하겠는가? 이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다." 필담을 죽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노상(魯相)에 임명한다. 위종은 원래 조조가 추천한 효렴이다. 장막이 연주를 함락시킬 때, 조조는 말한다: "오직 위종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위종이 투항을 해버렸다. 나중에 장막을 몰아내고 위종은 생포된다. 조조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밧줄을 풀어주고 다시 쓰라." 모택동의 이 비주는 그의 유표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조의 '투항한 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재주있는 자를 아끼는데 대한 칭찬이기도 하다.

 

<<위서.유표전>>에는 노필에 대하여도 주석이 있다. 유표는 건안5년(200년)에 '장택을 공격하여 평정했다" '지방이 수천리이고, 병사가 십여만이었다"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모택동은 이 주석을 읽은 후 다시 비주를 달았다: "토황제(土皇帝)가 되는 짓은 맹덕이라면 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모택동은 다시 한번 조조를 칭찬했다.

 

1959년 2월, 모택동은 <<광명일보>>에 발표된 전백찬의 <<조조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글을 읽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한나라말기 호족의 혼전국면을 끝내고, 황하 양안의 광대한 평원을 회복했으며, 나중에 양진통일을 위한 도로를 닦았다."

 

1959년 6월, 모택동은 인민일보의 책임자 오냉서와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최대의 결점이 지모는 많으나 과단성이 없다는 것이다. 유비, 손권, 원소가 모두 이런 결점을 가지고 있다. 조조는 지모가 많으면서 과단성이 있었다. 말만 많고 요점이 없고 말에 조리가 없는 것에는 반대해야 한다. 한꺼번에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여야 한다. 조조는 원소를 비난했다. "지대이지소(志大而智小), 색려이담박(色勵而膽薄)". 두뇌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소의 다른 단점도 비판했다. 병사는 많은데 나눠준 임무가 분명치 않다. 장수들은 교만하여 명령이 통일되지 못했다. 땅은 비록 넓고, 양식이 비록 많으나, 완전히 내가 쓸 수 있게 되었다."

 

모택동은 조조의 '다모선단(多謀善斷)"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원소의 '다단과요(多端寡要)'를 비판했는데 근거가 있다. 200년봄, 조조는 유비를 정벌하고자 한다. 수하장수들이 모두 말했다: "조공과 천하를 다툴 사람은 원소밖에 없습니다. 원소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그가 우리의 위기를 틈타서 공격해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조는 말한다: "유지는 호걸지사이다. 현재 공격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면히 큰 우환이 될 것이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그는 일처리가 늦어서 병력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곽가도 조조의 유비정벌을 지지한다. 그리하여 조조가 유비를 대파하는 것이다. 원소의 결점은 '다단과요'이고, 앞뒤를 너무 살핀다. 조조가 유비를 치러 갔을 때 원소의 모사인 전풍이 그에게 배후에서 조조를 공격하자고 건의한다. 원소는 아들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공격하지 않는다. 전풍은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말한다: "너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그냥 실기하려느냐.너무 아쉽다" 원소는 여양까지 진군하고, 안량을 백마로 보내어 조조군을 공격한다. 모사 저수가 이런 의견을 내놓는다: "안량은 속이 좁고, 성격이 조급하다. 빌고 용맹하지만, 혼자서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원소는 듣지 않는다. 결국 안량은 대패하고 피살당한다. 원소는 '두뇌가 없다' '뜻은 크지만 지혜는 적다'라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

 

모택동은 조조의 시를 아주 좋아했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래도 조조의 시가 좋다. 기백이 웅혼하고 위엄있다. 강개하면서 비감하다. 진짜 사나이고, 크게 보았다. 모택동은 그의 자녀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조조의 문장시사는 본색이 잘 들어난다. 가슴 속의 말을 직접 해버리고, 활달하고 통쾌하다. 당연히 배워야 한다." 모택동은 조조의 시를 즐겨 암송했을 뿐아니라, 서예를 연습할 때도 자주 조조의 시를 썼다. <<모택동수서고시사선>>에는 두 수의 조조의 시가 들어 있다. 하나는 <<관창해(觀蒼海)>>이고, 다른 하나는 <<귀수수(龜雖壽)>>이다.

 

모택동은 조조의 양생지도도 높이 평가했다. 1961년 8월, 그가 병으로 휴양하고 있는 호교목에게 조조의 <<귀수수>>라는 시를 추천하면서 조조의 싯구를 읊어주었다: "영축지기(盈縮之期), 부독재천(不獨在天), 양이지복(養怡之福), 가득영년(可得永年)". 1963년 12월, 그는 다시 병으로 휴양하고 있던 임표에게 <<귀수수>>를 추천하면서 말했다: "이 시는 장생지도를 읊고 있다. 아주 좋다. 찾아서 한번 읽어봐라. 그러면 자신감이 더해질 것이다."

 

1970년 3월, 모택동은 제4기전인대를 소집한다. 전인대가 시작될 때, 모택동은 국가주석을 두지 말자는 건의를 내놓는다. 중앙위원들이 그의 건의에 동의하게 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삼국시대의 고사를 들어서 설명한다: "삼국시대에, 손권이 조조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했다. 조조는 말한다. 손권이 나를 화로위에 놓고 구우려고 하는구나" 이어서 모택동은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나를 황제로 여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도 손권이 되지 말아라."

 

1975년, 모택동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삼국시대의 몇몇 정치가, 군사가는 통일에 대하여 모두 공헌이 있다. 그렇지만 조조의 공이 제일 크다" 같은 해, 모택동은 북대여교수 노추와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말기에 대분열이 시작된다.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의 봉건통치를 무너뜨렸다. 나중에 삼국이 형성되고, 이것은 통일을 향한 발전이다. 삼국의 몇몇 정치가, 군사가들은 통일에 모두 공헌이 있는데, 조조가 가장 크다. 사마씨가 한때 통일을 완성한다. 주로 조조가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다."

 

1976년의 한 담화에서, 모택동은 조조와 공자, 진시황, 주원장을 나란히 놓는다. 그들은 모두 역사에 공헌이 큰 사람이라고 했다. 이 해에 모택동은 실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재주가 는다는 이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조조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당연히 모택동은 조조의 모든 면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는 조조에게 두 가지 결점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때때로 우유부단했다는 것이다. 1966년 3월, 모택동은 항주에서 담화를 하면서, "조조가 장로를 친 후에 사천도 쳤어야 했다. 유엽, 사마의가 치자고 건의했지만, 조조는 가지 않았다. 몇 주일이 지난 후에, 후회했다.

 

둘째는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조조가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다. <<삼국지>>의 <<무제기>>에는 조조가 "그의 장수들이 출정할 때, 패전한 자는 죄를 묻고, 실리한 자는 관작을 박탈했다"고 되어 있다. 모택동은 이 부분을 읽다가 주석을 달았다: "적벽의 패배는 누구의 죄인가?" 조조가 자신에 대하여는 너무 관대했다고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