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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의 유언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0. 1. 8.

글: 애국영소(愛國營銷)

 

2009년의 마지막 날, 하남성 고고발굴단은 놀랄만한 소식을 터뜨렸다. 그들은 안양에서 조조무덤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의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고, 삽시간에 갑론을박으로 어지러워졌다. 논쟁의 초점은 주로 두 가지이다. 첫째는 조조무덤안에서 조조의 묘지명이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신분을 확정하는 것은 무리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발굴된 조조무덤이 조조의 유언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안양의 조조묘라는 결론에는 헛점이 많아서,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조의 유언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쓰여져 있는가?

 

명나라때 사람인 장부집(張溥輯)이 쓴 <<삼조집(三曹集)>>에는 조조의 유언 3부를 수록하고 있다. 그중 2부는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지만, 1부는 빠져있다. <<삼국지>>에 수록된 2부의 유언은 공식문건이라고 볼 수 있다. 수록되지 아니한 것은 가족들에게 쓴 것이고, 사적문건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제1부는 <<삼국지>>에 수록된 유언이다. <<삼조집>>에서는 <<수릉령(壽陵令)>>이라고 부르고, <<종령(終令)>>이라고도 부른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옛날에 장례라는 것은 척박한 땅은 반드시 골라서 썼다. 서문표사당의 서쪽 언덕 위를 수릉(壽陵)으로 하고, 높은 곳에 터를 잡고, 봉하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 <<주례>>에 총인(관직)은 공묘의 땅을 관장하는데, 제후는 좌우의 앞에 놓이고, 경대부는 뒤에 놓인다. 한나라의 제도에서는 이를 배릉(陪陵)이라고 했다. 공경대신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들은 수릉의 곁에 써라, 구역이 넓게 잡아서 충분히 서로 쓸만하게 하라."

 

이 유언은 건안23년에 쓰여졌다. 즉 서기194년이다. 조조가 죽기 2년전인데, 주로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묘지의 위치는 "서문표사당의 서쪽 언덕위"이다.

둘째, 박장을 실행하라. 묘지는 반드시 '척박한 땅'을 고르고, '높은 곳에 터를 잡고, 봉하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

셋째, 공경대신들 중 공로가 있는 자들을 능 옆에 묻게 하라.

넷째, 더 많은 공로가 있는 신하들이 배장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부지는 넓게 잡아라.

 

2년후, 즉 조조가 서거하던 그 해인 196년에 그는 다시 유언을 하나 작성한다. 이는 이전의 유언을 폐지한 것이다. 왜냐하면 뒤의 유언에서 많은 부분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법도를 따를 수가 없다. 장례를 마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장병들 중 변방을 지키는 자들은 주둔지를 떠나지 말라. 각 관리는 각자의 임무를 다하라. 평소에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 금옥진보를 같이 묻지 말라."

 

이 새로운 유언에서는 조조가 많은 것을 수정했다. 먼저, 공경대신들을 사후에 배장하라는 내용을 삭제했다. 왜냐하면,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법도를 따라서 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는 조조무덤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새로 증가한 내용은 외지의 주둔군에게 모두 주둔지를 떠나지 말라고 지시한다. 조주가 죽은 후에 누구도 자신의 임지를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구정권 교체기의 정권안정을 위한 고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박장을 강조한다. 이번에는 더욱 명확히 설명한다. 사후에 '평상시 입던 옷으로 염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묘 안에 '금은재물을 넣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도굴을 방지하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이 두 개의 정사에 수록된 조조의 유언으로 볼 때,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묘지의 위치는 '서문표 사당의 서쪽 언덕위'이다.

둘째, 박장을 실행하고, 묘지에는 금옥진보를 넣지 말라. 즉, 금은주보는 넣지 말라고 했다.

셋째, 전체 조조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번째 유언을 살펴보자. 이것은 가족들에게 남긴 것이다. <<삼조집>>에서는 <<유명제자(遺命諸子)>>라는 이름을 붙였다. 보기에 바로 가족들에게 남긴 것이다. 이 유언에서, 조조는 사후의 조치를 아주 상세하게 했다:

 

"내가 죽은 후, '업의 서쪽 언덕위(之西岡上)', 서문표사당에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 금옥주보는 묻지 말라. 남은 향은 여러 부인에게 나눠주고 제사지내지 못하게 하라. 나의 첩과 기인(伎人)들은 모두 동작대에 오르고, 동작대 위에는 6척의 상을 놓고,  수장(穗帳)을 내리고, 육포 곡식등을 놓고, 월 십오에 장막의 앞에서 공연을 하라. 너희들은 그 때 동작대에 오르면 나의 서릉 묘지를 바라보라."

 

이 사적인 유언 속에는 후세인들에게 그에 대한 제사를 아주 상세하게 분부하고 있다. 귀찮지도 않았나보다. 그는 다시 한번 묘지는 '서문표사당부근'의 '업의 서쪽 언덕위'라고 설명하고, 동작대위에 서면 '나의 서릉묘지가 바라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묘지와 동작대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위치를 더욱 상세하게 해준 것이다. 이들 기록은 공식유언과 일치한다. 다음으로, 다시한번 가족들에게 박장하라고 한다. 금옥주보는 묻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공식유언과 동일한 것이므로 상호간에 증명이 된다.

 

이들 유언은 우리가 조조묘의 진위를 파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당연히 조조가 죽은 후, 후세인들이 약간 바꾸고 완전히 유언대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효도가 아주 중시되던 시대에,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할 것이다.